—새로운 문학의 길을 찾는 이들에게-
“가벼움에서 다양성까지…문학의 여섯 좌표를 만나다”
교보문고 제공
https://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203921
이 글은 <교수신문> 2026. 4. 20 인터넷판에도 게재되었습니다.
왜 지금 다시 칼비노인가
문학은 숲이다. 자연과 신화, 철학과 일상이 서로 얽히고설키며 다시 태어나는 거대한 우주의 축소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학은 때때로 한 권의 바카라 안에 머물지 않는다. 어떤 바카라은 자기 자신의 내용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읽는 시대의 감각과 사유의 조건까지 함께 비춘다. 이탈로 칼비노는 문학을 그렇게 넓은 관점에서 사유한 작가다.
그의 문학 강의에는 바로 그런 사유가 담겨 있다. 오래전 쓰인 문학론이지만, 오늘 다시 읽을 때 그것은 단지 한 작가의 유고를 회고하게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 문학은 무엇으로 성립하는가, 글쓰기는 어떤 조건 속에서 가능하며 또 어떤 방식으로 위태로워지는가를 새롭게 묻게 한다. 이 점에서 문학 강의를 읽는 일은 한 권의 바카라을 이해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바카라을 통해 바카라 너머의 문학적 조건을 읽는 일, 다시 말해 칼비노의 문학론이 오늘 어떤 위상을 지니는지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지금 칼비노를 다시 읽는다는 것은 과거의 글을 반복해서 읽는 일이 아니다. 오늘의 글쓰기 환경 속에서 그의 개념들이 여전히 살아 움직이는지, 아니면 새로운 조건 속에서 수정과 번역이 있어야 하는지를 따져 묻는 일이어야 한다. 칼비노 사후 이 바카라이 『미국 강의』,(영어판 『다음 천년기를 위한 여섯 가지 메모』)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것은 다가오는 시대의 문학이 지녀야 할 덕목들을 제시하려는 그의 의도를 어느 정도 잘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그가 남긴 가벼움, 신속성, 정확성, 가시성, 다양성이다. 그리고 끝내 완성되지 못한 여섯 번째 항목인 ‘일관성’은 모두 그 시대를 넘어 오늘 우리의 시대를 향한 그의 마음속 고언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선별한 이 목록은 단순히 문학의 속성을 열거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문학이 세계를 감각하고, 시간과 언어를 조직하며, 형식으로 살아남는 방식을 사유한 하나의 설계도에 가깝다. 바로 그래서 이 바카라은 오늘 다시 읽을 가치가 있다. 그것은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현재의 문학이 어디를 향해 나아가야 할지를 시험하는 질문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바카라의 개요
이 바카라은 이현경의 번역으로 국내에서 2022년 출간되었다. 단순한 강연록의 형식을 띠지만, 저자의 주장은 시대를 넘어 여전히 현실적인 문학적 사유를 보여 준다. 특히 이 바카라은 그의 갑작스러운 뇌출혈로 제목조차 붙이지 못한 채 미완으로 남겨졌다. 이후 그의 아내 에스더 칼비노에 의해 유고집으로 출판되었다. 에스더의 서문에 의하면 여섯 번째 항목이 미완으로 남겨졌고, 바카라의 제목도 정해지지 않았다. 다만, 이 강연록이 단순한 회고의 기록이 아니라 다가올 미래를 향한 작가의 치열한 성찰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서문에 이어지는 연대기 또한 단순한 생애의 나열을 넘어, 칼비노의 전 생애를 관통하는 문학적 실험과 시대적 응전의 기록을 입체적으로 보여 준다. 연대기 뒤에 정리된 참고 도서 목록 역시 그의 사유를 더 깊이 이해하려는 이들에게 실질적인 길잡이가 된다.
이 바카라의 중요한 매력은 그것만이 아니다. 문학론이면서도 건조한 이론서처럼 읽히지 않는다는 점 또한 크다. 칼비노의 삶은 그에게서 문학이 성장한 시간과 맞물린다. 그리하여 그의 문학관은 추상적 개념을 선언하는 데 머물지 않고, 자기 삶의 자리에서 해석된 고전과 현대 문학, 신화와 설화, 시와 소설을 자유롭게 직조한다. 독자는 여기서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교과서적 정의를 얻기보다, 문학이 자기 시대에 수행해야 할 사고와 감각, 이미지와 리듬의 형식을 체험적으로 따라가게 된다.
이 때문에 그의 문학 강의는 문학이 인간 안에서 어떻게 작동해 세계로 나가는지를 보여 주는 안내서에 가깝다. 동시에 이 바카라은 미래의 문학을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문학의 오래된 힘을 다시 발견하게 한다는 점에서 문학의 자기 성찰서라 할 수 있다. 물론 칼비노가 다음 천년기를 향해 말을 건넬 때, 그가 붙든 것은 기술적 미래에 대한 예측이 아니었다. 그가 기대한 것은 문학이 오래도록 간직해 온 형식적 능력들이 다가오는 시대에도 여전히 가능하기를 바라는 일이었다. 다시 말해 그는 문학의 기법 자체보다, 문학이 인간의 삶 속으로 스며들기 위한 징검다리를 놓고자 했다. 그런 점에서 이 바카라은 미래를 향한 선언문인 동시에 문학 전통에 대한 성찰로 읽는 것이 타당하다. 요컨대 그의 문학 강의는 회고와 전망, 전통과 실험, 유산과 가능성이 한데 교차하는 바카라이라는 점에서 독특하다.
문학의 덕목 여섯 가지
칼비노의 문학론은 모두 여섯 개의 핵심어를 축으로 전개된다. 이 핵심어들은 단지 개념을 압축한 명사들이 아니다. 각각은 문학이 세계를 감당하는 서로 다른 형식적 능력을 보여 주는 실질적인 정의이기도 하다.
가벼움은 무게를 버리는 일이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의 각도를 바꾸는 일이다. 우리는 사물을 단단한 것으로, 의미를 고정된 것으로 이해하려 하지만, 칼비노는 그 익숙한 중심에서 벗어나라고 말한다. “다른 시각, 다른 논리, 다른 인식과 다른 검증 방법들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한다.”(88) 이때 세계는 더는 견고한 덩어리가 아니라, 미세하게 흔들리고 이동하는 흐름으로 드러난다. 이 가벼움은 존재를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변화와 이동 속에서 파악하려는 문학의 감각이다. (90~92)
그러나 이 가벼움은 결코 모호함이나 회피가 아니다. 오히려 “정확함과 결단력이다.”(101) 라는 말처럼, 불필요한 것을 덜어내고 본질에 도달하려는 더 단호한 선언이다. 이 가벼운 언어는 의미를 희석하는 것이 아니라, 무게 없이 조직된 구조를 통해 더 맑고 정밀하게 전달된다. (103~106)
이러한 태도는 곧 시간과 서사의 문제로 이어진다. 이야기는 시간을 따라 흐르지만, 시간에 완전히 묶이지는 않는다. 이런 점에서 칼비노는 신속성을 통해 서사의 리듬과 경제성을 강조한다. 사건들은 직선적으로 이어지기보다 점과 점 사이를 도약하며 연결되고, 반복과 생략을 통해 하나의 운율을 형성한다. “이야기는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다”(129) 는 말은, 서사가 물리적 시간보다 정신의 속도에 더 가까운 것임을 보여 준다. 이때 신속성은 단순한 빠름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제거하고 핵심만 남기는 경제성, 그리고 사고가 순간적으로 도약하는 민첩성이다. (126~ 130)
그러나 속도는 언제나 긴장을 동반한다. 빠른 추론은 때로 신의 영역에 가까운 것이지만, 인간의 사유는 그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다. 그래서 칼비노는 “천천히 서두르라”(144)는 역설을 제시한다. 신속성은 지연과 대립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포함하면서 문체와 사고의 리듬을 형성한다.
정확성은 이 모든 흐름을 붙잡는 또 하나의 축이다. 칼비노는 정확성을 세 가지로 정의한다. “정확하게 정의되고 잘 계산된 작품의 설계, 분명하고 예리하며 기억에 남을 만한 가시적 이미지, 그리고 사전처럼 정확한 단어.”(159) 이 세 요소는 작품을 하나의 필연적인 구조로 만든다. 문학은 이때 흩어지고 오염된 언어를 정화하는 장소가 된다.(161)
그러나 정확성은 단순한 명료함이 아니다. 칼비노는 모호함 또한 정확성의 일부가 될 수 있음을 인정한다. 의도된 불명료함은 무한을 암시하는 방식이며, 정확성은 그 무한을 향해 끊임없이 접근하는 긴장이다.(167~174) 또한, 그는 “언어를 올바로 사용함으로써 사물들이 말없이 전해주는 바를 존중하며 접근할 수 있다”(186)라고 말하며, 정확성을 하나의 윤리적 태도로 확장한다.
이러한 언어의 작동은 결국 이미지로 수렴된다. 가시성은 문학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만드는 능력이다. 단테의 경우, 이미지들은 부조에서 목소리로, 다시 순수한 정신적 영상으로 변형되며 점차 내면화된다. (193~ 194) 이 과정에서 상상력은 단순한 환상이 아니라 인식의 도구가 된다. 칼비노는 이를 “이미지들의 자발적 생성과 논증적 사고의 의도성을 하나로 통합하는 것”(205)이라고 설명한다.
이처럼 칼비노에 따르면, 문학은 현실의 관찰, 꿈과 환영, 문화적 상징과 감각의 농축을 통해 또 하나의 세계를 만든다. 그리고 이 세계는 단일하지 않다. 오히려 무수한 관계들이 얽힌 네트워크에 가깝다. 칼비노는 이를 다양성이라 부른다. 예컨대 그는 현대 소설을 “백과사전으로, 인식의 방법으로, 그리고 무엇보다 관계의 체계로 보는 것”(226~227)이라고 말한다. 이때 문학은 하나의 이야기라기보다, 세계 전체를 담아내려는 구조가 된다.
이 구조는 닫히지 않는다. 모든 것을 포괄하려는 시도는 결국 측량할 수 없는 것에 닿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말한다. “문학은 모든 실현 가능성을 넘어서 측량할 수 없는 대상들에 접근할 때만 살아남는다.”(236) 문학은 완결된 체계가 아니라, 끝없이 확장되는 가능성의 장이라는 뜻이다.
마지막으로 부록은 칼비노가 완성한 것은 아니다. 다만 시작과 끝이라는 파편적인 주제들을 종합할 때 이는 실질적으로 여섯 번째 항목이라 할 수 있다. 이 글에서 ‘시작과 끝’은 앞선 다섯 덕목을 하나의 작품으로 묶어 주는 형식적 중력, 다시 말해 일관성의 문제를 예고한 것으로 보인다. 만약 그렇다면, 칼비노가 말하는 ‘일관성’은 구조의 통일이라기보다, 세계와 언어와 이야기가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지는 생성의 원리에 가깝다. 글쓰기 이전의 세계는 “정보와 경험과 가치의 총합”으로 열린 가능성의 상태이며(254), 일관성은 그 혼돈 속에서 언어를 선택하고 이어 가는 과정에서 형성된다.
이 흐름을 여는 것이 ‘시작’이라는 행위다. “시작은 완전히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기다.”(255) 이 시작은 고정되지 않는다. 근대에 이르러서는 이야기의 어디서든 발생할 수 있는 유동적 지점이 된다. (259~260) 한편, 시작은 서사 내부에서 보이지 않는 선율처럼 지속하는 어떤 성격이며(270), 결말에서 글의 전체 흐름이 다시 반사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따라서 시작과 관련해서 결말은 종결이 아니라 “이미 일어난 것을 다시 상기하는 순간”이다. (273) 일관성이라는 측면에서 시작과 끝은 대응하지만, 절대 대칭되지는 않는다. (274) 칼비노가 일관성을 어떻게 말하려 했는지 단정할 수는 없지만, 마지막 항목이 가리키는 바를 ‘일관성’이라 부르는 데에는 무리가 없다.
그렇다면, 일관성은 시작에서 변형으로, 변형에서 반사로 이어지는 과정이 끝까지 지속하며 다시 시작으로 되돌아가는 순환적 긴장이다. 나아가 하나의 이야기 안에는 여러 이야기가 중첩되고, 그것은 다시 우주로 확장된다. (276) 일관성은 중심의 고정이 아니라, 다양성을 견디면서도 흐름을 잃지 않는 힘이다. 바로 그 일관성 덕분에 문학은 닫힌 체계가 아니라 살아 있는 유기체가 되고, 이야기는 계속될 것이라는 새로운 확신을 부여받는다. 결국, 일관성이란 완결이 아니라 지속이며, 형식이 아니라 흐름이고, 끊임없이 다시 시작되는 문학의 생명력이다.
바카라의 후기는 조르조 만가넬리가 썼다. 그는 칼비노 문학 전체를 하나의 이미지로 압축한다. 그것은 ‘거울로서의 선명함’이다. 칼비노는 흔히 투명함을 추구한 작가로 읽히지만, 만가넬리는 그의 핵심을 선명함에서 찾는다. 투명함이 평면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라면, 선명함은 ‘페이지 너머까지 보는 능력이며 그 형식은 거울이다.’(282) 이 거울은 단순한 반사가 아니라 이중 구조를 지니며, 세계뿐 아니라 작가 자신까지 그 안으로 끌어들인다.
이때 선명함은 명료함에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모호함과 이중성까지 드러내는 위험한 상태이다. 만가넬리는 칼비노가 신화와 불명료함을 통해 그 긴장을 유지한다고 평가했다. “불명료함은 그것 자체로 명료하다”라는 역설 속에서 그의 문학은 단순한 해명이 아니라 구조적 긴장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만가넬리는 이를 “수정과 불꽃”의 공존으로 설명한다. 차가운 구조와 타오르는 에너지가 동시에 작동하며, 이 모든 것은 결국 수사학, 곧 상상력을 통제하고 조직하는 힘으로 수렴된다.
결국, 그는 칼비노의 모든 논의를 하나로 묶는 문장으로 마무리한다. “문학은 무한한 목표를 세울 때만 살아남는다.”(287) 이 문장은 그의 결론이자, 동시에 칼비노의 주장을 다시 시작으로 되돌리며 새롭게 듣게 하는 마지막 선언처럼 지금-여기에 공명한다.
여섯 덕목은 어떻게 하나의 문학론이 되는가
칼비노의 여섯 가지 덕목은 서로를 견제하고 보완하며 하나의 역동적인 운동을 이룬다. 이는 개별 개념의 병렬적 나열을 넘어 유기적인 문학론으로 이어진다. 요컨대 문학이란, 현실에서 길어 올린 사유의 결과물을 치밀한 기법을 통해 재구성함으로써 파편화된 언어를 하나의 흐름 안에 다시 배치하는 상상력의 실천이라 할 수 있다.
가벼움이 세계를 무게의 정박 상태에서 떼어 놓는 힘이라면, 신속성은 그렇게 떠오른 세계에 리듬을 부여하는 힘이다. 정확성은 그 운동이 산만한 비약으로 흩어지지 않도록 언어를 벼리고, 가시성은 그렇게 다듬어진 언어가 독자의 내면에서 하나의 장면으로 현현하게 한다. 다양성은 그 장면과 구조를 단일한 중심에 고정하지 않고 복수의 관점과 관계 속으로 열어 두며, 미완의 여섯 번째 항목은 이 모든 운동이 하나의 작품으로 호흡하도록 붙드는 내적 긴장의 문제를 남긴다.
따라서 칼비노의 여섯 항목은 단순한 미학적 취향의 나열이 아니다. 그것은 문학이 세계를 대면하고, 통과하며, 형식으로 살아남는 과정을 설명하는 체계적이면서도 상상적인 사고다. 이는 성서학자 월터 브뤼그만이 말한 ‘예언자적 상상력’과도 맞닿아 있다. 이때의 상상력이란 철저히 현실에 발을 딛고 현실 너머를 내다보는 전망적 사유이며, 그런 의미에서 칼비노의 사유는 곧 ‘현실적 상상력’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이러한 현실적 상상력의 체계 안에서 어느 한 덕목의 과잉은 본질을 흐릴 위험을 품는다. 가벼움만을 취하면 경박함으로 오독될 수 있고, 정확성만을 취하면 차가운 규범에 갇히며, 다양성만을 취하면 무질서한 확산으로 흐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덕목들이 서로를 교정하는 관계 속에서 읽힐 때, 비로소 칼비노의 문학론이 총체적으로 드러난다. 그의 사유는 개별 미덕에 대한 찬양이 아니라, 문학이 세계의 복잡성을 견디면서도 형식적 생명력을 잃지 않기 위해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를 끝까지 묻는 시도다.
이 지점에서 조르조 만가넬리의 비평을 다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칼비노를 단순히 겉으로 투명하고 명쾌한 작가로 읽지 않았다. 오히려 표면 아래의 모호함과 이중성까지 비추어 내는 선명함의 작가로 파악했다. 칼비노의 정확성과 선명성은 세계를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명료함이 아니라, 복잡한 것을 복잡한 채로 더 또렷하게 보이게 만드는 형식적 긴장에 가깝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비평 덕분에 그의 문학론이 과거의 미학으로만 박제되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오늘의 문학과 글쓰기를 향해서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문학은 어떻게 세계의 무게를 견딜 것인가. 어떻게 시간과 이미지와 언어를 조직할 것인가. 어떻게 복잡성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하나의 형식으로 살아남을 것인가.
칼비노 문학론의 현재성
칼비노의 문학론에 따르면, 이제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이 분명해진다. 그것은 오늘의 글쓰기 조건 속에서 그의 관점이 어디까지 유효한가 하는 점일 것이다. 그의 문학론이 고전적 미학을 넘어 다시 현재의 자원으로 읽힐 수 있는지도 되물어야 한다. 그가 문학을 단순한 이야기 전달이 아니라 세계를 다시 구성하는 형식적 실천으로 이해했다는 점이 특히 관심의 대상이다. 이에 따르면, 기술과 매체가 빠르게 변할수록 문학을 문학이게 하는 형식의 감각이 무엇인지 되묻고 답을 찾을 수 있다면, 그 순간 칼비노의 개념들은 다시 의미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칼비노가 예상했는지는 모르지만, 오늘의 독자는 속도와 즉시성, 즉각성의 압력 속에서 읽고 쓴다. 문장은 빠르게 생성되고, 의미는 빠르게 소비되며, 독서는 점점 더 짧고 효율적인 단위로 분절된다. 역설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칼비노의 문학론은 문학이 다른 시간과 감각을 요청하는 형식임을 다시 일깨운다는 점에서 오늘날에도 유의미해진다. 특히 그의 가벼움은 무게를 지워 버리는 경박함이 아니라 무게를 다른 방식으로 사유하게 만드는 힘이며, 신속성은 단순한 속도가 아니라 시간의 밀도를 조직하는 리듬이다.
또한, 정확성 역시 정답을 생산하는 기술이 아니라 끝내 붙들 수 없는 세계를 향해 더 정밀하게 접근하려는 태도로 남는다. 그 밖에도 가시성은 이미지의 과잉 속에서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새롭게 발생하는 장면으로, 다양성은 정보의 병렬적 축적이 아니라 서로 다른 관점들이 충돌하며 공존하는 구조로, 일관성은 자동으로 완결되는 질서가 아니라 하나의 형식을 끝까지 바카라임지려는 선택으로 읽힌다.
결국, 칼비노의 문학론은 이미 완성된 답이라기보다, 여전히 진행 중인 질문을 함의한다. 문학이 세계를 어떻게 감각하고 견디며 다시 형상화할 것인가를 끊임없이 묻게 하는 사유의 장치로 남아 있다. 그의 주장이 과거에 이뤄진 것으로 지금-여기 우리 시대에도 공명한다는 말이다.
칼비노 문학의 자리—형식주의에서 상상력의 확장으로
칼비노의 현재성을 더 분명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문학론이 어떤 계보와 접속하며, 또 어디에서 그것을 넘어서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는 그의 개념들이 왜 오늘의 감각 재편 문제와 이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우선, 칼비노의 문학론은 러시아 형식주의와 분명한 접점을 이루며, 익숙한 세계를 낯설게 만들어 다시 보이게 하는 형식적 장치로 기능한다. 그러나 거기에 그치지 않고 그는 이러한 형식주의적 사유를 상상력과 이미지, 세계의 복수성을 향한 문학적 운동으로 확장한다. 그의 작업에서 문학은 더는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감각과 의미를 다시 배열하는 실천이 된다.
중요한 것은 이 문학론을 보존된 이론으로 되풀이하는 일이 아니라, 오늘의 감각과 환경 속에서 다시 시험하는 일일 것이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칼비노의 사유는 문학 내부의 형식과 감각, 상상력의 운동을 정교하게 해명하지만, 그러한 형식이 어떤 역사적 조건과 기술적 환경 속에서 생산되고 유통되는가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적게 다룬다는 것을 간과할 수 없다. 다시 말해 그의 문학론이 내적 원리에 대한 성찰이라면, 오늘의 문학은 외적 조건 속에서 그 원리가 어떻게 변형되는지까지 함께 물어야 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는 칼비노의 주장을 그가 말한 대로 반복하는 대신, 현재의 언어로 다시 ‘번역’해야만 한다. 이 점에서 그의 문학관이 미처 내다보지 못한 한계가 좀 더 분명히 드러나고, 그를 통해 우리가 가야 할 길이 더 선명해질 것이다.
칼비노 문학론의 한계와 오늘의 문학 상황
결과적으로 그의 문학론은 형식과 상상력의 운동을 탁월하게 해명한다. 그렇다면 그것만으로 오늘의 문학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가. 이제 그 대답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지금까지 그의 문학론이 무엇을 가능하게 하는지를 보았다면, 이제는 그것이 무엇을 충분히 말하지 않는지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의 문학론이 내적 원리에 대한 성찰이라면, 오늘의 문학은 외적 조건 아래서 더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그의 문학관이 지금의 조건 속에서 어디까지 유효하냐는 질문을 필연적으로 불러낸다고 생각한다.
투박한 이해이긴 하지만, 이러한 문제의식은 에드문트 후설과 미셸 푸코의 사유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후설이 의미 형성의 조건을 묻기 위해 판단을 중지했다면, 푸코는 그 조건이 역사적 권력과 담론 속에서 구성된다는 점을 드러낸다. 이때 사유는 내면 운동에 머무르지 않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외적 배치까지 함께 문제 삼는다. 칼비노의 문학론을 최대한 확장한다면, 이 둘 사이 어디쯤 놓일 수는 있다. 하지만 앞서 말한 대로, 그는 형식의 정밀함을 통해 세계를 다시 사유하게 만들긴 했지만, 그 형식이 놓인 외적 조건까지는 끝까지 밀고 나아가지는 않았다. 따라서 오늘날 그의 문학관을 다시 살펴본다는 것은 그가 말한 ‘형식’을 개인의 내적 운동에만 그치지 말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거나 제약하는 시대적 배치와 긴장까지 확장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전통적으로 이러한 외부 조건을 자기 안으로 받아들여 스스로 긴장을 유지하는 태도는 오래전 한국 근대 글쓰기에서도 이미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났다. 예를 들어, 박지원의 산문은 익숙한 세계를 비틀어 현실을 다시 배치하며, 정약용의 글쓰기는 형식과 현실이 맞닿는 자리에서 새로운 질서를 모색한 것이다. 근대로 더 나아오면, 조선학에 천착한 정인보는 ‘얼’이라는 사상으로 글쓰기를 시도하며, 시대를 견디는 내적 리듬을 외부로 확장하려 했다. 이들의 실천은 칼비노의 ‘정밀한 형식’이 어떻게 시대적 진실을 담아내는 그릇이 될 수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 주는 한국의 예라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칼비노가 남긴 과제는 문학이 형식 내부의 미학적 완결성을 추구하는 문제인 동시에, 그 형식을 둘러싼 역사적 조건에 응답하는 공공적 실천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동서양의 사유를 빌리자면, 철학과 한국 근대 글쓰기의 흐름에서 문학은 언제나 형식 내부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그 형식을 둘러싼 조건의 문제였다는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칼비노의 문학론이 여전히 유효하다면, 그 이유는 그가 형식의 정밀함을 통해 개인과 세계의 내면을 다시 보게 만드는 장치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이 점은 분명히 그의 공헌이다. 그러나 오늘의 글쓰기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형식이 놓인 감각의 조건과 역사적 배치까지 함께 사유해야 한다는 것은 그의 사유를 보완한다.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는 칼비노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문학론을 현재 속에서 다시 번역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런 번역의 태도는 곧 ‘공공적 번역’이라고 명명할 수 있다는 점이다.
실천적 대안으로서 공공적 번역
공공적 번역이란 서로 다른 삶의 온도와 시간의 결을 무리하게 동일화하지 않으면서도, 과거의 이야기와 기억을 현재로 이끌어 오는 일이다. 타인의 경험을 지금 나의 언어로 옮겨 올 수 있도록 언어의 다리를 놓는 일이다. 이해는 언제나 불완전하고, 번역은 언제나 어긋난다. 그러나 바로 그 어긋남을 삭제하지 않고 남겨 두는 태도, 그 틈을 통해 타자의 낯섦이 끝내 사라지지 않도록 붙들어 두는 윤리가 반영된 글쓰기야말로 공공적 번역의 핵심이다.
이때 글쓰기는 완결된 의미를 전달하는 도구가 아니라, 서로 다른 세계들이 잠시 스쳐 지나가며 머물 수 있는 하나의 장이 된다. 누군가의 문학 속에 담긴 하나의 문장이라도 타인의 침묵을 완전히 대신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문학을 통해 그 침묵이 사라지지 않도록 내 삶의 곁으로 끌어들일 수는 있다. 공공적 번역은 타인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그 불가능성마저도 무시하지 않는다. 그것은 충분히 이해되지 않는 것들의 권리를 문장 속에 남겨 두어 기억하려는 저항의 윤리이기 때문이다.
공공적 번역’은 세 가지 기법으로 구체화할 수 있다. 먼저 치환이다. 완전히 이해될 수 없는 것들을 억지로 동일화하지 않으면서도, 서로 다른 세계 사이를 조심스럽게 건너갈 수 있도록 언어의 자리를 바꾸어 보는 시도다. 과거의 언어를 현재에 상응하는 언어로, 타인의 경험을 내가 가까스로 감각할 수 있는 나의 언어로 옮겨 오는 최소한의 변환이다. 다음은 확장이다. 그렇게 옮겨진 의미를 더 넓은 삶의 맥락 속으로 펼쳐 놓는 일이다. 끝으로 심화이다. 서로 다른 시간과 감각이 한 문장 안에서 내 삶으로 깊이 스며들게 하여, 마침내 나의 언어로 다시 되돌아 나오게 하는 과정이다.
예컨대 작고한 문화운동가 김민기(1951~2024)의 노래 <바다>에는 “바람아 쳐라, 물결아 일어라”라는 구절이 있다. 유신시대를 통과하며 그가 버텨 내야 했던 실존적 긴장이 이 짧은 명령형의 리듬 속에 스며 있는 듯하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여기서 ‘쳐라’의 목적어가 끝내 제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바로 그 비어 있음 때문에, 이 구절은 특정한 하나의 대상을 가리키기보다 삶을 뒤흔드는 모든 힘을 향해 열려 있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여기서의 ‘바람’을 시대의 폭력과 불안, 혹은 인간을 흔드는 모든 고통의 징후로 다시 읽을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그 의미를 다시 시대의 슬픔으로, 더 나아가 인간 일반의 슬픔으로 확장해 볼 수 있다. 그럴 때 이 구절은 단지 한 시대의 노래가 아니라, 아직 이름 붙지 않은 고통까지 불러내는 문장이 된다. 내가 말하는 공공적 번역이란 바로 이러한 글쓰기의 전환, 곧 타자의 언어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오늘의 삶 속에서 다시 울리게 만드는 실천을 뜻한다.
이런 기법들은 다음과 같은 예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칼비노가 괴테의 사례를 빌려 “문학은 모든 실현 가능성을 넘어서 측량할 수 없는 대상들에 접근할 때만 살아남는다”(236)고 말했을 때, 그는 우주라는 거대한 목표를 통해 세계의 확실성을 파괴하는 소설들의 힘을 조명한다. 먼저 칼비노는 저 먼 우주를 우리가 대면해야 할 현실의 구체적 층위로 치환한다. 이어 그 현실을 개별적 사건에 가두지 않고 문학적 전통과 시대적 감각이라는 넓은 맥락 속으로 확장한다. 끝으로 이러한 확장 끝에 도달한 ‘확실성의 분쇄’를 다시 작가 자신의 글쓰기 윤리로 가져옴으로써, 타자의 침묵과 세계의 불확정성을 문장 속에 끝내 보존하는 심화의 과정에 이른다. 이처럼 공공적 번역은 칼비노의 미학적 엄밀함을 우리 시대의 고통과 타자의 언어를 마주하는 구체적 실천으로 탈바꿈시킨다.
이런 공공적 번역의 기법은 칼비노의 문학론을 현재의 문학 조건 속에서 다시 살아 움직이게 하는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 칼비노가 형식의 미덕을 통해 자기 내면의 세계를 문학의 방식으로 구성하여 세계를 감당하는 방식으로 다뤘다면, 오늘의 글쓰기는 이를 토대로 그 형식적 미덕을 타자와 세계 사이를 다시 잇는 윤리로 확장하는 일로 나아갈 수 있다. 특히 최근, 알고리즘이 문장을 매끄럽게 만들고, 플랫폼이 의미를 빠르게 소비하게 만드는 시대이다. 이런 때일수록 글쓰기는 더 쉽게 이해되는 ‘가벼운’ 문장을 생산하는 데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오히려 칼비노가 끝내 놓지 않았던 형식의 긴장을 오늘의 조건 속에서 공공적 번역의 실천으로 바꾸어, 서로 다른 경험과 고통, 감각과 시간을 성급히 동일화하지 않으면서도 한 문장 안에서 조심스럽게 만나게 해야 한다.
결국, 그의 문학 강의를 오늘 다시 읽는다는 것은 그의 문학론을 오늘의 현실 속에서 다시 번역하는 일이며, 그 번역이 어디까지 가능한지를 계속해서 시험하는 일이다. 바카라을 읽되 바카라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을 자기 시대의 언어로 번역해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칼비노의 여섯 항목은 바카라 읽기와 바카라 쓰기 모는 영역에 걸쳐 여전히 유효한 미학적 토대를 제공한다. 비록 그의 사유가 내다본 문학의 전망이 아주 급격하게 달라지리라는 생각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동시대 문학의 조건을 설명하기 위해서 역사, 기술, 자본, 권력의 문제 속에서 비판적으로 보완되어야 한다는 점을 일깨운 것은 자명하다.
이처럼 그의 문학관을 다시 생각하는 일은 결국 오늘 인간의 감각과 사유, 공존의 형식을 다시 생각하는 일과 필연적으로 이어진다. 하나의 문장이 모든 것을 구원하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무엇이 아직 구원되지 않았는지를 잊지 않게 하는 방식으로는 여전히 남을 수 있다. 또한, 오늘 다시 그의 문학 강의를 읽는다는 것은 우리가 어떤 문장으로 세계를 견디고, 어떤 형식으로 서로에게 건너갈 수 있는가를 다시 묻고 답을 찾아가는 지적 여정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 여정을 잘 마친다면, 그때 이 바카라은 비로소 바카라 너머를 열어 주고, 문학이 자기 자신의 경계를 넘어 다시 현재의 일이 된다는 사실을 더 명확히 알려 주는 지침으로 재평가될 것이다.
그가 자극한 지침을 다시 살펴보면, 오늘날 글쓰기는 지금까지 무엇을 이해하고 있다고 믿어 왔는가. 그리고 그 믿음의 껍질이 벗겨진 뒤에도 여전히 이 세계를 온전히 사유할 수 있는가를 묻게 된다. 아니, 더 궁극적으로 오늘날 문학, 곧 글쓰기는 무엇을 스스로 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이 질문이 사라지지 않는 한, 칼비노가 미처 예측하지 못한 오늘의 환경에서도 작가의 글쓰기는 문학의 의미와 속성을 살려 지속될 것이라 기대하는 이유다.
다시 말해 그런 글쓰기는 결국 작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의 주장을 따르면, 작가는 언제나 자신을 먼저 해체하고 다시 엮어내는 일로부터 그의 문학을 시작할 것이다. 칼비노의 글쓰기를 따르는 작가는 자신이 쓰는 모든 문장이 결국 자신을 향한 질문이며, 내가 통과해야 할 어둠의 한 조각이라는 것을 좀 더 분명히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설명보다 유예를, 해답을 급히 내밀기보다 해답을 찾는 과정에 머무름을, 밝은 확신보다 검은 안식을 더 중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어느 정도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믿음 아닌 믿음 위에서 오늘도 새로운 문장이 쓰인다는 사실도 말이다.
맺으며 — 바카라으로 바카라 너머를 읽는다는 것
4월에 칼비노를 읽는다는 것은, 문학을 종이나 기계 위에 쓰인 텍스트 너머의 이미지와 리듬, 그리고 인간의 현실에 울려 퍼지는 감각의 총체로 다시 듣는 일일 것이다. 동시에 미로 같은 숲을 더듬어 걸어가는 일과 닮았다. 그의 사유는 고대의 묵시 문학에서 『돈키호테』를 거쳐 현대 SF에 이르기까지 문학의 거대한 계보를 가로지르지만, 그 여정 속에서 문학은 언제나 실패를 벗 삼는다. 시대의 어둠 속을 작은 빛으로 더듬듯, 비틀거리면서도 끝내 멈추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의 문학적 핵심어 여섯 가지 뒤에는 무엇이 이어질 수 있을까. 어쩌면 오늘의 문학은 끝내 확정되지 않는 상태 속에서만 자신을 유지하는지도 모른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리고 나는 그 자리에 ‘불확정성’을 덧붙이고 싶다.
“완전히 규정되지 않음 속에서만 살아 있는 것,
흔들림 자체를 조건으로 삼는 문학.”
그것이 우리가 지금, 칼비노를 힘입어 오늘의 문학을 다시 붙들고 내일로 나아가는 방식일 것이다.
<교수신문> 2026년 4월 13일자 14면 연재서평 [바카라으로 바카라 너머를 읽다] 스물한번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