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철학시의 '단시'의 개념과 그 적용
삭제, 절단, 여백, 그리고 붕괴된 시간 위에서 재구성되는
미시거시적 사유 체계
사유체계로서 단시
단시는 ‘짧은 시’라는 형식적 정의에 갇히지 않는다. 그것은 길이의 문제가 아니라 밀도의 문제이며, 표현의 축소가 아니라 세계 인식 방식의 전환이기 때문이다. 단시는 언어를 덜 사용하는 문학이 아니라, 언어를 극한까지 제거함으로써 세계를 한 점으로 붕괴시키는 고밀도 사유 장치다. 이때 단시는 문학적 형식이자 철학적 도구이며, 동시에 인간의 감각과 슬롯적 구조를 재편성하는 인식론적 기제다.
단시는 하나의 장르라기보다 삭제(Erasure)–서사의 단절(Cutting the Narrative)–여백(Room of meaning)–재구성(Integration)–번역(Translation)이라는 다층적 작동 원리를 지닌 복합적 사유 체계다. 이 다섯 개의 작동 축은 선형적으로 전진하는 단계가 아니라 상호 침투하고 보완하는 역학 구조를 형성하며, 단시를 완성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그 내부에서 동시적으로 작동한다. 이때 단시는 단순한 텍스트가 아니라, 세계의 구조를 붕괴시키고 다시 구성하는 일종의 “사유의 장치”로 이해되어야 한다.
1. 삭제 — 언어의 연소와 침묵의 구조화
단시의 출발점은 문장 요소의 확장이나 생산이 아니라 축약과 제거다. 단시의 관점에서 보면, 시인은 의미를 덧붙여 이어가는 자가 아니다. 오히려 필요해 보이는 언어마저 제거하여 여백과 의미의 잔상을 극대화하려는 존재다. 이는 단순한 축약이나 요약이 아니라, 쓰인 언어마저 비켜 세움으로써 의미를 연소시키고, 마치 ‘검은 잔해’를 수거하여 다시 제련하는 연금술적 행위에 가깝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삭제의 결과로 문장이 남는 것이 아니라, 침묵과 상상이 잔해처럼 남는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단시는 말해진 언어보다 드러나지 않은 언어에 의해 성립하는 문학이다. 그리하여 의미는 텍스트 내부가 아니라 그 주변을 둘러싼 공백에서 중력처럼 응집된다. 따라서 단시가 단순히 짧은 시가 아니라 ‘작은 시’라는 말은 중요하다. 짧음이 양적 결핍이 아니라 질적 밀도가 포화된 압축 상태이며, 더는 제거할 수 없는 최후의 상태에 도달하는 미시적 문학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시인은 언어를 사용하는 주체이면서도, 언어 뒤에 형성되는 공백을 설계하는 정원 조형자와 같다. 단시는 ‘만들어지는’ 시다. 그것은 단순히 언어의 집이 아니라, 언어를 토대로 삭제와 제거를 거쳐 비로소 드러나는 사유의 공간이다. 그리고 그 공간 자체가 하나의 완결된 의미의 장으로 기능한다.
2. 절단 — 시간의 선형성 붕괴와 현존의 응축점
단시는 의도적으로 서사를 잘라낸다. 그런데 그것은 단순히 서사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서사를 가능하게 하는 시간의 선형 구조를 해체하는 것이다. 시에 담길 수 있는 예측 가능한 시간의 흐름은 단시 안에서 절단되고, 뒤틀리고, 변형된다. 결과적으로 시의 구도는 일직선이 아니라 입체가 되며, 그 안에서 시어는 하나의 좌표처럼 자리한다.
이때 단시는 시간을 공간처럼 변형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더 이상 단일한 선 위에 놓이지 않는다. 이질적인 시간이 같은 자리에 놓일 수도 있고, 같은 시간이 서로 동떨어진 좌표에 위치할 수도 있다. 원인과 결과, 맥락과 배경 역시 더는 연쇄적인 흐름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입체적 시공간 속에서 역설적으로 중첩되거나 분리될 수 있다. 따라서 단시의 시간은 제거된 시간이 아니라, 다층적 층위가 중첩된 현존이다.
이러한 절단은 후설의 인식의 환원, 곧 판단중지(Epoché)를 급전환한 형태라 할 수 있다. 세계에 대한 모든 전제와 맥락을 인식 이전의 상태로 되돌림으로써 단시는 존재의 가장 날 선 단면을 드러낸다. 이는 빅토르 쉬클롭스키의 ‘낯설게 하기’와도 맥을 같이한다. 이때 하이데거적 의미에서의 현존(Dasein)은 ‘서술’이 아니라 ‘세계와의 충돌’이라는 방식으로 경험된다. 단시는 존재 자체를 직설적 언어로 설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언어의 의도적 왜곡과 절제를 통해 자동화된 인식을 해체함으로써, 존재와 독자를 직접 맞부딪치게 한다.
3. 여백 — 결핍이 아닌 생성의 잠재적 장(場)
단시의 핵심은 텍스트 내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가 의도적으로 또는 비의도적으로 만들어내는 여백에도 담겨 있다. 이 여백은 단순한 공백이나 결핍이 아니다. 그것은 의미가 발생하고 스스로 확장되는 잠재 상태, 즉 가능성이 최대한 포화된 장(場)이라 할 수 있다.
단시에서 이 여백은 세 가지 사유 전통과 교차한다. 첫째, 장자의 ‘무(無)’다. 무는 단순한 없음이 아니다. 그것은 ‘있음의 없음’에 가까우며, 다시 말해 잠정적인 비움이다. 따라서 비어 있음이라고 말해도 무방하다. 비움은 채워짐의 가능성을 항상 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단시의 여백은 시 밖의 빈 종이가 아니라, 언제든 의미가 채워질 수 있는 빈자리다. 둘째, 코헬렛의 ‘헤벨(Hebel)’이다. 언어의 기원을 고려하면 헤벨은 존재의 덧없음, 바람처럼 사라지는 현상을 의미한다. 나아가 그것은 ‘존재 인식의 흔들림’, ‘사유의 유한성’, ‘사건의 불확정성’, ‘시간의 불확실성’을 포괄한다. 따라서 헤벨은 무의미해 보이는 속에서 오히려 진실이 드러나는 역설적 구조를 제시하는 지혜의 언어다. 셋째, 동아시아 미학의 ‘간(間)’이다. 이는 사유와 감각이 머무는 일정한 시공간이다. ‘틈’이라는 의미가 이를 좀 더 선명하게 설명할 수 있다. 다른 말로는 ‘사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시공간적 공백을 넘어서, 의미와 의미가 맞닿을 수 있는 한 팔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는 정형화된 여백이다.
단시는 이 세 층위를 비의도적으로만 결합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의식적으로 호출하면서도 최종적으로는 비의도적 결과로 남겨 둔다. 이런 여백은 단순히 의도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가 완성된 후 뒤따라오는 텍스트의 능동적 결과다. 언어를 마구 제거한다고 해서 여백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언어가 모두 제자리를 찾고 난 뒤에야 필연적으로 생겨난다. 비로소 그 여백은 비어 있음이면서도 채워짐으로 자리한다. 따라서 여백은 시의 완성도를 가늠하는 사유의 척도다. 나아가 이 여백은 시인에게서 완성되지 못한다. 독자의 감각과 사유가 침투한 뒤에야 비로소 작동한다. 단시에서 여백은 의미 자체가 아니라, 의미가 생성될 수 있는 조건에 가깝다. 비어 있어야 밀려들 수 있고, 또 흘러나갈 수 있다. 바로 그 밀려듦과 흘러나감 속에서 단시는 여백을 입증하고 스스로를 완성한다.
4. 재구성 — 미분된 경험의 적분적 사유
단시는 표면적으로 미완의 형태를 갖는다. 문장이 미완성이고, 말의 구성 요소가 불완전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내면적으로는 바로 그것이 단시의 정체성이다. 단시는 텍스트 안에 자기 경험을 완전한 상태로 투사하지 않는다. 시인이 제공하는 것은 단편적 징후, 즉 미분된 경험의 조각들이어야 한다. 이 사유의 조각들은 독자의 의식과 만나 상호 참조되며 새롭게 결합된다.
단시에서 이 과정은 수학적 은유를 통해 설명 가능하다. 단시는 한 개인의 미분된 경험을 언어화한 것이다. 따라서 모든 표현은 단편적일 수밖에 없다. 이런 미분이 독자에게 전달될 때, 의미는 텍스트에 내재된 고유한 것일 뿐 아니라, 독자의 내면에서 생성되는 이질적인 것과 어우러져 새롭게 형성된다. 의미는 나와 너의 사유의 연대로 만들어지는 동적 구조를 갖는다는 말이다.
따라서 단시는 일방적 전달로 완성되는 문학이 아니다. 시인과 독자가 공동으로 의미를 생산하는 공동 생성(co-production)의 장이다. 또한 단시는 독자에게 정답을 제공하지 않는다. 오히려 독자가 해석의 바카라임을 공유함으로써 자신을 능동적 사유 주체로 전환시키는 권리를 허용한다. 그리하여 독자는 그 미분된 조각들을 자기 언어로 다시 ‘번역’하여 적분해 나간다. 독자는 이제 단시의 수용자가 아니라, 그 완성에 참여하는 번역자로 단시를 대하게 되는 것이다.
5. 번역 — 타자의 세계를 내 몸의 언어로 변환하는 수행
시인과 독자의 의식 공유라는 점에서 단시는 번역 과정을 수행한다. 이는 자아의 폐쇄적 독백이 아니라, 세계를 번역하는 일이라는 의미다. 세계는 무수한 타자의 경험으로 구성되어 있다. 단시는 그런 세계 속에서 자신이 수집한 파편화된 경험들을 글로 표현한다. 나아가 타인의 경험 또한 외면하지 않고 자신의 내면으로 끌어들이려 한다. 따라서 단시는 사건이나 현상의 재현이 아니라 번역이다.
번역은 일대일의 대응이 될 수 없다. 텍스트와 대상어 사이에는 결코 완전히 메워질 수 없는 의미의 간극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의 언어는 타자에게 그대로 전달될 수 없다. 사전적 의미만으로도 불가능하다. 타자의 경험은 그대로 재현될 수 없으며, 반드시 나의 감각을 통과하여 ‘변형’된다. 그러므로 단시는 단순한 설명보다 비균형적인 감각적 치환을 통해 타자의 흔적을 새롭게 구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는 상호 공감을 기계적으로 일치시키기 위한 과정이 아니라, 공감이 가능해질 수 있는 최소한의 접속면을 확보하기 위한 필수적인 조치다. 이를 위해 번역어는 세분되고 심화된 문법 요소를 추가로 반영해야 한다. 그래야만 타자의 세계를 내 몸의 언어로 다시 쓰는 존재론적 번역 행위가 가능해진다. 예를 들어 독일어 ‘Weg’은 우리말 ‘길’로 곧바로 옮겨올 수 없다. 그것은 경우에 따라 오히려 ‘삶으로 만들어진 길’이라 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번역은 단시를 개인적 표현에서 공공적 언어로 전환시킨다. 이런 방식에 의해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에 존재하는 타자들의 경험은 단시라는 짧은 형식 안에서 하나의 동시적 장으로 소환될 수 있다. 온전히 번역될 때에만, 단시는 파편화된 세계를 다시 연결하는 미세한 접속 장치로 기능한다.
6. 미시슬롯학적 렌즈 — 단면을 통한 구조의 현출
단시는 형식적으로 삼행 마흔 단어로 구성되는 작은 시다. 따라서 표면적으로는 거대 서사를 자세하게 담아내기 어렵다. 하지만 단시의 특성상 함축과 응축의 형식이라는 점에서 보면, 오히려 슬롯 구조를 더욱 포괄적으로 담아낼 수 있다. 장시가 설명을 통해 구조를 제시한다면, 단시는 단 하나의 단어와 찰나의 장면을 통해 숨겨진 구조까지 현출 시킬 수 있다.
단시는 개인적 경험과 슬롯적 관계, 그리고 권력 구조를 엄격하게 분리하지 않는다. 나와 너는 단어의 앞뒤에서 동시에 응축될 수 있다. 서로 무관한 듯 사소해 보이는 몸짓 하나, 짧은 시선 하나도 부사어 하나를 통해 거대한 슬롯적 조건과 연동될 수 있다. 개인은 공동체를, 공동체는 개인을 상호 공존하는 삶의 흔적 속에 함께 내포할 수 있다. 시인의 의도와 독자의 의식은 하나의 행 안에서 같은 언어로 중의적으로 표현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단시는 언어와 그 언어 너머의 상상이 함께 수렴되는 형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시는 슬롯를 물리적으로, 사실적으로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슬롯를 보는 일은 드러난 영역뿐 아니라 드러나지 않은 상상의 영역에서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거대한 징후만이 슬롯를 견인하지 않는다. 오히려 미세한 징후들이 결합하여 더 거대한 구조를 형성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단시는 미시적 관찰로 거시적 사유를 톺아내는 미시거시적 사유의 총체다.
7. 감각의 복원 — 언어 이전으로의 회귀
단시는 언어를 사용하지만, 그 목표는 언어를 넘어서는 데 있다. 일상적 언어는 이미 개념화된 체계다. 그것은 정해진 의미를 우선적으로 말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언어로 표현되는 세계는 직접적 서술로 받아들여질 때가 많다. 그러나 바로 그 점 때문에, 언어가 세계의 내면을 가리는 역효과를 낼 수도 있다. 단시는 사실을 적확하게 짚어내는 언어라기보다, 사실 너머를 전망하도록 이끄는 언어가 된다. 언어의 단순화와 절제는 몸의 직접적 감각을 복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짧은 문장은 개념적 의미를 전달하기보다, 감각적 반응을 촉발하는 데 유리하다. 단시는 독자에게 그 시어를 이해하기 전에 먼저 느끼게 해야 한다. 감각은 개념보다 더 원초적인 방식으로 세계를 재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시는 의미 전달이 목적이 아니라, 감각의 환기를 통해 세계를 다시 자기 몸으로 경험하게 하는 상상력의 장치다.
8. 윤리와 위험 — 침묵의 바카라임과 공허의 경계
단시는 타자를 직접 설명하지 않음으로써, 타자의 내면을 보존한다. 장시가 서사를 통해 타자를 실체로, 혹은 객관적 대상으로 규정하려는 경향을 보인다면, 단시는 짧음과 침묵을 통해 타자의 불가해성을 인정하고 유지하려 한다. 단시는 타자를 객관화된 대상으로 고정하지도 않고, 동시에 주관적 동일시 속으로 함부로 끌어들이지도 않는다. 오히려 적절한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객관과 주관 사이의 긴장, 곧 윤리적 형식을 유지한다.
하지만 이러한 형식은 동시에 위험을 내포한다. 타자에 대한 무바카라임성, 의미가 없는 흑암시, 과소하거나 과잉된 타자 해석, 형식적 장식으로의 전락이 그 위험들이다. 짧음은 깊이를 보장하지 못할 때가 많고, 여백은 언제든 빈터로 남을 수 있다. 그러므로 단시는 자기 형식에 대한 경계와 자기 검열을 동시에 품어야 한다.
따라서 단시는 끊임없이 단어의 재배열과 문장의 수정을 거쳐야 한다. 짧은 것이 빛나려면 갈고닦는 시간이 길어야 한다. 만들어진 단시를 스스로 의심하며 무한한 교정을 감수해야 한다. 단시에서 완성된 체계란 더는 수정할 여력이 없을 때가 아니라, 더는 수정하지 않을 이유가 없을 만큼 내부의 균형이 극한에 도달했을 때에 가깝다. 동시에 그 찬란한 무기력에 이르렀을 때, 마침내 드러나는 ‘여백’을 시인 자신이 먼저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단시가 비로소 자신을 떠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항상 붕괴의 가능성을 내포한 불안정한 균형 위에 서 있는 시, 그것이 단시다.
결론 — 붕괴된 중심으로서의 단시
단시는 세계를 이해한 결과를 설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해하기 위한 교두보다. 그 과정에서 세계를 압축하고, 절단하고, 붕괴시키기도 한다. 그리고 그 붕괴의 자리에서 새로운 의미가 생성되기를 기다린다. 따라서 단시는 하나의 점 같은 문학이다. 그러나 그 점은 비어 있는 듯 채워져 있고, 무(無)로 축소되면서도 완전한 없음으로 소멸하지 않는다. 무한한 의미가 잠재된 ‘검은 안식’ 같은 문학이다.
이때 단시의 여백은 하나의 정원처럼 이해될 수도 있다. 일본의 정원이 여백을 정제된 질서와 인위의 극도로 통제된 침묵으로 다듬어낸다면, 중국의 정원은 여백을 확장과 배치의 장엄함 속에서 유람 가능한 공간으로 펼쳐 보인다. 그러나 한국의 정원은 그 둘 사이에서, 다듬되 과시하지 않고, 비워 두되 황량하지 않으며, 자연과 인위가 서로를 밀어내지 않은 채 스며들게 하면서 ‘자연의 사물’과 조화하는 미학을 지향한다. 단시의 여백 또한 그러하다. 그것은 텅 빈 공터가 아니라, 의미가 스스로 드나들 수 있도록 열어 둔 자리이며, 과도한 장식도 완강한 통제도 없이 독자의 감각과 사유가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머물게 하는 한국적 정원의 차경(借景)처럼 작동한다.
한편 이 중심은 하나로 단정되지 않는다. 독자의 사유 속에서 끊임없이 재구성되며, 매번 새로운 세계를 생성하면서 더 농축된다. 단시는 세계와 존재를 다시 사유하게 만드는 문학의 원자이자, 가장 급진적인 문학의 지평선이다. 짧다는 것은 가볍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작다는 것이다. 그리고 작다는 것은 모든 것을 제거한 끝에 남은, 더 나눌 수 없는 미시적 사유를 의미한다. 단시는 그 핵을 통해, 우리가 잊고 있던 거대한 세계의 본질을 다시 드러낸다. 그런 점에서 단시는 미시거시적 사유의 쿼크(Quark, 양성자와 중성자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물질의 최소 단위)라 할 수 있다.
다시 하루(夏淚)
-4.16 다음 날 4.17 더워지는 날
너의 하루하루 느닷없이
그 봄 채 익기도 전, 꿈 피기도 전
밀려온 어둠, 눈물처럼 여름바다에-
배경
이 단시는 2026년 4월 17일 오전에 탈고했다. 어제(4월 16일) 세월호 12주기 기억식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대통령의 추도사가 있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기념사 중 끝 부분을 다시 읽다가 이 대목에서 잠시 멈췄다. “지난 슬픔을 넘어, 더 나은 내일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몫입니다.” 어떤 세계가 더 나은 내일일까?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아마도 이런 아픔과 슬픔을 억지로 거세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자기 삶의 자양으로 삼아내는 것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죽음으로부터 넘겨받은 ‘생존의 씨앗’을 가꿔가는 삶 말이다. 나의 그 마음을 오늘 단시에 담았다. 세계는 아직 여름 눈물을 피할 방법이 없는 전쟁 중이다. ‘욕망의 전쟁’이다.
다시 하루(夏淚) — 붕괴된 시간과 기억의 번역
나의 시 <다시 하루(夏淚)>는 내가 정립한 단시 개념론을 그대로 반영한 실천적인 작업이다. 특히 부제에서 암시한 4.16이라는 거대한 비극을 4.17이라는 ‘그다음’의 시점과 여름(夏)이라는 계절적 변주로 치환함으로써, 슬픔의 밀도를 한 점으로 응축하고자 했다.
1. 삭제와 절삭: 의미의 연소를 통한 검은 잔해
나는 4.16이라는 거대한 서사를 단 세 줄의 언어에 응축했다. “채 익기도 전”, “꿈 피기도 전”이라는 표현을 통해 희생된 생명들의 물리적 시간을 과감히 삭제하고, 그 자리에 ‘느닷없음’이라는 존재론적 급습만을 남겼다. 나는 슬픔의 과정을 구태여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모든 수식어를 연소시킨 뒤 남겨진 ‘여름바다’라는 표현을 통해 그 죽음과 슬픔이 남긴 검은 잔여물만을 독자에게 제시했다. 이로써, 더는 제거할 수 없는 슬픔의 최후 상태를 구현하려 했다.
2. 절단과 현존: 붕괴된 시간의 좌표
부제에 명시한 4.16과 4.17의 절단은 의도적으로 날카롭게 설정되었다. 4.16이 멈춰버린 시간이라면, 4.17은 살아남은 우리가 마주해야 할 ‘더워지는’ 물리적 생존의 시간이다. 나는 이 이질적인 두 시간을 ‘여름눈물(夏淚)’이라는 계절적 조어로 전치하여 나의 시공간에 하나의 좌표처럼 정위 했다. 4월의 봄을 여름의 바다로 밀어 넣는 이 ‘시간의 공간화’는, 비극이 과거의 기록에 박제된 것이 아니라 현재의 감각(더위, 눈물)으로 끊임없이 환원되는 다층적 현존임을 입증하려는 시도다. 과거는 언제나 지금-여기를 찌르는 묵시적 현재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3. 여백과 차경: 독자의 사유가 스며드는 자리
"밀려온 어둠, 눈물처럼 여름바다에-"에서 마지막 행의 하이픈(-)은 나의 시가 설계한 가장 의도적인 여백이다. 그 여백이 얼마나 큰지는 나도 가늠할 수 없다. 이 시어에서 나는 문장의 마침표를 찍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 시어의 핵심어인 여름 눈물이 강이 되어 바다로 흘러가는 장면을 상상하도록 안내했다. 물론 그 순간에 나의 언어는 침묵한다.
여기서 독자에게 여백이 감지되어 발견되면 좋겠다. 그 여백은 단순한 공백이 아니라, 독자가 자신의 기억을 가지고 침투해야 할 ‘차경(借景)’의 정원이기 때문이다. 바다로 흘러가는 눈물, 그 바다에 닿은 후 어떻게 되살아날지 모르는 눈물, 나와 독자에게 그 바다로부터 어떤 파도가 밀려올지, 쓸려갈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그 어둠이 어떻게 우리를 견인할지, 아니면 잠식할지는 나와 독자의 사유가 조화를 이뤄 채워가야 할 몫일지 모른다. 누구도 타자의 불가해한 고통을 함부로 규정할 수 없다. 다만, 그 고통의 밀도가 무력에 의해, 아니 타자에 의해 무기력하게 산산조각 나지 않도록 단단히 엮어 묶는 나의 윤리적 결단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4. 미시거시적 번역: '눈물'로 적분된 슬롯적 구조
이 시에서 ‘너의 하루’는 거대한 인생에 비춘다면 미시적 삶의 자리다. 순식간에 아주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일 수도 있다. 이 하루는 어느새 ‘밀려온 어둠’이라는 거시적 재난과 결합할 수밖에 없다. ‘느닷없는’이라는 부사는 그 불가시적인 어둠의 급습을 상징한다. 누구나 알 듯이 거대한 슬롯적 비극(여름바다)은 느닷없이(아니 수많은 예고를 지나친 끝에) 밀려온다. 그 큰 비극은 놀랍게도 한 개인의 삶에 닿을 때 미미한 삶까지 송두리째 거둬간다. 삶의 모든 것은 미시거시가 비균형적으로 환치된다. 다시 말해 삶의 비극이란 미시거시적 사유의 총체라는 것이다. 나는 이 비극을 사전적 정의가 아닌, 몸의 직접적 감각(더위, 눈물)으로 번역해냄으로써 타자의 세계를 나의 내면으로 호출하고 공공의 언어로 복원해내고자 했다.
맺음말
나의 단시는 단순히 짧은 시가 아니다. 오히려 삶의 가장 작은 요소와 같다. 몸의 피부 같고, ‘사유의 쿼크’ 일 수 있다. 4.16(봄/어둠)과 4.17(여름/눈물) 사이의 간극은 시간적으로 이어져있다. 하지만, 그 사이에 담긴 사건의 간극은 무한에 이를 것이다. 나는 그 무한의 차이를 세 줄의 언어로 가로질렀다. 이유는 간단하다 독자에게 ‘설명’이 아닌 ‘충돌’의 경험을 선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제목의 ‘다시 하루’는 그런 비극이 매일 반복되는 통증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수행해야 할 번역의 과정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번역은 언제나 비균형적 의미를 남긴다는 것도. 이번 나의 단시가 독자의 사유 속에서 무한히 적분 되어, 마르지 않는 검은 안식의 원천 같은 여백으로 남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