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시 해설] 사월, 소리의 강처럼 흘러오는 애도

작은 철학시 3-39 <소리의 강>

by푸른킴

1. 애도의 시간성: 왜 ‘사월’인가

당신의 사월은 안녕하신가요?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월은 만화방창(萬化方暢)의 시간일지도 모릅니다. 모든 이들이 기다리는 화려한 절기, 꽃들이 묵혔던 꽃망울을 터뜨리는 화란춘성(花爛春盛)의 계절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나에게 사월은 슬롯적·역사적으로 몸 안팎의 통증을 상기시키는 ‘상처의 절기’가 되었습니다. 이 시에서 내가 사월을 만발하는 꽃의 계절이 아니라, 소리로 시작하여 내 삶의 저 밑바닥에 잠겨 있던 ‘태초의 소리’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려는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사월은 나에게 잔인한 계절이 아니라, 기어이 그 너머의 진실에 응답해야 할 애도의 절기입니다.


소리의 강


사월사월, 태초의 소리

아침마다 나를 깨워 터벅터벅

검푸른 바다숲 너머로―


이 시는 단시입니다. 삼 행으로 구성되어 서른 자에서 마흔 자 사이에 완성되는 작은 철학시입니다. 중요한 것은 철학시라는 장르적 속성입니다. 내 삶에 대해 어떤 개념이 남았는지를 명확히 할 때 비로소 마무리되는 이 형식은, 하이쿠의 정형성을 탈피하여 의성어와 의태어, 그리고 창의적 언어를 통해 독자적인 리듬을 구축합니다.


단시가 하이쿠와 다른 결정적인 차이는 계어(季語=계절을 나타내는 시어)와 절자(切字=시의 운율을 끊거나 여운을 주는 시어)를 정형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 대신에 의성어와 의태어와 같은 부사어, 형용사적 부사를 적극 활용합니다. 창의적 언어를 만들어 사용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또한, 한국 전통 시조처럼 가급적 초장, 중장, 종장의 구조를 비균형적으로 유지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단시는 특정어를 사용하면서 비균형적 구조를 지켜내는 나의 고유한 장르입니다. 특히 초장과 중장의 밀도가 종장에 이르러 예측 불가능한 여운으로 쏟아지는 ‘이미지의 비균형’은 완결을 거부하고 타자의 고통이 흘러 들어오게 하는 나의 전략적 불친절함이기도 합니다.

결국, 이 장르에 따르면, 이 시의 끝에 어떤 개념이 내 삶을 찌르는지 말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이 철학시는 일단 마무리된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나에게 글쓰기, 철학시란 독자를 설득하는 도구가 아니라, 자동화된 사유를 해체하고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게 하는 문학의 실천(praxis)입니다.


2. 시의 개요

사월의 어느 날 아침, 캠핑장 데크에 앉아 멀리 산을 바라본 적이 있습니다. 낮은 산이지만 하루가 다르게 녹색이 짙어졌습니다. 아침 햇살이 양분인지, 살랑 부는 바람이 양식인지 알 수 없지만, 초록은 저절로 물들리 없었을 겁니다. 나는 그 짙게 물들어가는 이유를 상상해 봤습니다. 아마도 산에 스며드는 소리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침 그 이른 새벽, 날이 채 밝기도 전에 한꺼번에 쏟아지는 새의 울음과 나뭇잎 살랑거림이 아우성처럼 온몸을 파고들었습니다.


시의 제목인 ‘소리의 강’은 그런 아침 풍경에서 얻은 것입니다. 이른 잠을 깨워 의자에 앉아 먼 산을 바라봅니다. 따뜻한 차를 한 잔 내립니다. 그 짧은 틈에 소리는 바람을 따라 흔들리다가 마치 강처럼 흘러 내가 머물러 있는 작은 텐트 안까지 밀려드는 것 같았습니다. 소리는 강처럼 나에게까지 닿았습니다. 결국, 이 시는 그 소리의 강이 나에게까지 밀려와 어디까지 흘러갔는지 그 순간의 여정을 글로 그려본 것입니다.

3. 시어 분석: 번역으로서의 상징들

단시는 다양한 시어를 활용하되 의도적으로 각 문장을 비균형적으로 배열합니다. 다시 말해 글을 ’ 만들어내는 ‘ 것입니다. 특히 명사의 나열과 의태어와 의성어 등을 적절히 사용해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이 시어들을 배치했습니다.

“사월사월”은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표현입니다. 사월(四月)을 두 번 반복하여 리듬을 살렸습니다. 아울러 사월이 물결처럼 출렁이는 모습을 만들어내려 했습니다. 사람이 걷는 모습을 그려내는 사뿐사뿐과 같은 느낌이지만, 나는 그것을 물결이 걷는 모습처럼 상상한 것입니다. 출렁출렁이 바다의 파도를 떠올리게 하는 것과도 유사하면서 다른 뉘앙스를 생각했습니다.


“태초의 소리”는 강물처럼 흘러오는 사월의 정체성이 무엇인가를 생각한 시어입니다. 나는 사월이 태초의 절기라고 생각합니다. 을씨년스러운 겨울이 마지막 숨을 거둬간 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사월사월‘은 태초의 시간이 물처럼 흘러 들어오며 만들어내는 ‘소리’를 형상화한 것입니다. 이처럼 사월사월은 새들의 경쾌한 울음이나 움찔하듯 소음이 뒤섞이고, 까치의 둔탁하면서도 날카로운 소리가 함께 실려오는 소리의 덩어리입니다.


“아침마다 나를 깨워 터벅터벅”은 그 세계의 소리 덩어리가 나에게 바짝 다가온 순간을 포착한 표현입니다. 생활 습관상 아침을 경전의 한 구절로 묵상하는 것이 익숙한 나를 이제 소리가 깨워줍니다. 오늘 나의 묵상 텍스트는 강처럼 밀려온 소리였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터벅터벅’은 그 소리가 다가오는 모습을 그려낸 의성어이자 의태어입니다. 즉, 소리이자 모습입니다. 동시에 기능적으로도 중의적입니다. 이 표현은 소리가 들려주는 모습이자, 내가 걸어가는 소리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본래 ‘터벅터벅’은 사전적으로 ‘힘없는 다리를 조금씩 떼며 무겁고 느릿느릿 걷는 모양을 나타내는 의태어’입니다. 무기력해진 몸을 무겁게 움직이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내가 이 시어를 선택한 것은 소리가 다가오는 모습이 강력한 힘으로 쏟아지는 것이 아님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 소리는 힘을 빼고, 자신이 위로받아야 할 존재인 것처럼 느릿한 모습으로 내 앞에 까지 흘러왔습니다. 어쩌면 ‘꿀렁꿀렁’ 밀려오듯 다가왔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느릿한 걸음은 나에게 은근히 힘을 실어 주었습니다. 그 소리의 물결을 경험한 나도 이제 내달리는 탄성이 아니라 천천히, 여백을 지키며 한 걸음씩 흘러가는 소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도 ‘터벅터벅’ 한 발자국을 뗍니다. 결국, 이 시어는 중장과 종장을 이어주는 연결 기능을 하는 셈입니다.

“검푸른 바다숲 너머로―” 마침내 나의 걸음은 ‘검푸른 바다 같은 숲을 지나 그 너머까지’ 이어집니다. 이 시어는 완전히 에크프라시스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입니다. 보이지 않으나 볼 수 있도록 그려내는 회화적 기법입니다. 지금 저 멀리 바라보이는 ‘숲’을 어느새 내 앞에 다가와 검고 푸른색의 바다로 달리 그려본 것입니다. 어느 저녁, 제부도 바다를 걸을 때, 썰물이 지나 밀물이 되어 너른 해변을 빠르게 뒤덮으며 내 발아래까지 밀려왔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지금 내 앞에도 그렇게 바다가 바투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모두 사실 ‘숲’이었습니다. 초록이 짙어가는 숲은 바다처럼 소리를 싣고 나에게로 왔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바다숲 속으로 걸어갔습니다. 마침내 그 바다숲 한가운데 내가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 숲에 오래 머물지 않습니다. ( ―)는 멈추지 않는 흐름을 그려냅니다. 하여 다시 소리를 따라 터벅터벅 다른 숲 너머로 걸어가 봅니다. 거기는 어둔 밤 같은 세계가 바다처럼 출렁이고 있고, 그 바다 위에 누가 띄웠는지 작은 조각배 같은 불빛이 가물거리고 있습니다.


결국, 이 시어들은 숲에서 밀려온 소리를 따라 어둑해진 바다 같은 세계를 따라 걸어걸어 들고나는 나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특히 종장은 초장과 중장에서 흘러온 느릿하고, 묵직한 물줄기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예측할 수 없는 여운으로만 남았다는 점에서 이미지의 불균형을 드러냅니다.

4. 나의 의도

내가 이 단시에서 그려내고 싶은 사월의 이미지는 분명합니다. 사월은 이 밤바다 같은 세계를 자기 두 발로 느릿하게나마 걸어가 달라는 소리로 나를 초대하는 손짓의 계절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초대가 태초부터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내가 쓴 ‘태초’는 바로 모든 것이 시작된 순수함을 뜻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잃어버린 근원적 대상을 향한 향수와 비탄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아침마다 나를 깨우는 '터벅터벅'의 발소리는 하늘의 느릿한 소리이자, 이 세계에서 살아남은 자를 위로하는 하늘의 촌철같이 들립니다.

또한, 나는 이 시에서 소리의 현상학을 생각해 보고 싶었습니다. 다시 말해 자기 존재를 증명하는 소리를 ‘터벅터벅’으로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나의 시에서 이 소리는 공기의 파동이 아니라 ‘강’이라는 유체로 흐릅니다. 단절되었던 과거와 현재를 유연하게 이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터벅터벅'이라는 묵직한 의태어를 찾았습니다. 단어만으로도 가볍지 않은 모습이 떠오릅니다. 이는 중력을 거스르지 못하는 몸의 소리이며, 우리가 잊으려 해도 기어이 문 앞까지 당도하고야 마는 기억의 저력을 표현하기에 적합합니다.


사월에 마주한 ‘검푸른 바다숲’은 달리 말하면, 슬픔이 퇴적된 심연의 공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소리가 그 너머로부터 와서 나를 다시 그 너머로 밀어낸다는 것을 사월의 슬롯적 현상으로 말하자면 애도와 맞닿아 있습니다. 애도는 결코 종결될 수 없는 계속되는 과정입니다. 타자의 고통에 응답해야 할 바카라임은 멈출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애도는 사라질 수 없고, 바람처럼 소리처럼, 강처럼 내 삶에 흘러들어왔다 되돌아 나가는 어떤 은총입니다.


5. 검은 안식의 시학과 나 밖의 세계와 연대

결국 이 짧은 시편이 도달하고자 하는 지점은 ‘검은 안식의 시학’입니다. 나는 애도를 ‘타인의 슬픔을 나의 삶으로 번역하는 행위’라고 정의합니다. 사라진 이들의 언어를 살아남은 자의 문법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통증은 온몸을 찌르기도 하고, 때로는 침묵이나 묵음으로 수렴되기도 합니다. 그것은 마치 어두운 밤 속으로 쓸려 들어가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 틈에 알맞게 식은 흑차가 몸 안으로 낮게 흘러들어옵니다.


내가 말하는 ‘검음’은 빛의 완전한 소멸이 아니라, 한 톨의 빛이라도 머금은 채 모든 색과 소리를 품고 인내하는 세계의 색입니다. 사월의 바다숲이 검푸른 이유는 그곳이 상처받은 영혼들이 비로소 투쟁을 멈추고 쉴 수 있는 가장 깊은 안식처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나의 애도는 기념일처럼 돌아오는 의식이어서는 안 됩니다. 아무 날이 아닐 때라도 거대한 소리의 강물에 몸을 맡긴 채 그 ‘검은 세계’ 속으로 함께 잠기는 행위여야 합니다.

번역은 원어와 대상 언어 사이에 불가피하게 이미지의 불균형을 초래합니다. 나는 그 번역의 틈새에서 의미를 채워나갈 정직한 이미지를 찾아야 합니다. 그것은 죽음을 소멸로 보지 않고, 사라진 이들의 느릿한 소리에 내 발걸음을 맞추는 고요하고도 뜨거운 사후적 연대의 풍경입니다. 이 시는 바로 그런 번역의 언어를 위한 입구이자, 타자의 고통을 나의 존재 안으로 받아내는 겸허한 기록입니다.


“사월의 소리에 응답하는 나의 쓰기는, 타자의 고통을 나의 존재 안으로 겸허히 모셔오는 번역의 실천(praxis)이다. 그것은 다양한 소리의 강물에 몸을 맡긴 채, 모든 상처 속으로 함께 들어가는 ‘검은 안식’의 심연에서 비로소 완성되는 인간다운 연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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