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변론>
기억의 윤리와 몸으로 쓰는 글쓰기

― 검은 안식의 철학으로 쓰는 글쓰기의 존재·형식·실

by푸른킴

*나의 글에 대한 자기 변론

“나의 글은 망각의 시대에 기억을 붙드는 문장이며,
검은 시대의 애도를 기도의 형식과 몸의 실천으로 끝내 살아내려는
변방의 미시적 프락시스다.”


I. 말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

이 글은 내가 왜 글을 쓰는가에 대한 오랜 고백이자, 신학의 정치슬롯학적 글쓰기에 관한 작은 실험이다. 나는 오래전부터 글쓰기를 단순한 창작 행위로 생각하지 않았다. 또한 대중적인 읽기를 우선 고려하지도 않았다. 다만 나의 글쓰기를, 내가 살아가는 길 위에 세워 둔 나의 흔적으로 여겨왔다. 그것은 내게 언제나 존재의 수행이었고, 세계와 다시 관계를 맺기 위한 가장 느리고도 깊은 방식이었다. 나에게 글은 단지 사유를 전달하는 수단이 아니다. 정보의 전달이나 훈고의 가치만을 위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끊어진 것들을 다시 이어 붙여 사라질 기억을 붙잡아 두는 내 몸의 실천이다. 나아가 나라는 존재가 자기 자신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끝내 붙들어야 하는 마지막 숨결이다. 내가 쓰는 문장들은 그러므로 생각의 결과이기 전에, 나의 시간이 지나온 흔적이며, 또 지나갈 여정이다. 내 몸이 지나온 자리 위에서 태어난 고백들이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잊는 속도가 너무 빠르다. 슬픔은 즉시 소비되고, 고통은 타인의 뉴스가 되며, 애도는 어느 시점을 지나면 공적으로 발화될 수 없는, 이미 끝난 감정처럼 취급된다. 사건은 기록되지만 기억은 오래 남지 못한다. 사람들은 자기 눈으로 오래 읽지 않고, 자기 손으로 오래 써보지 않는다. 짧은 글 하나조차 끝까지 머물러 읽기보다 쉽게 다음 장면으로 건너가려 한다. 슬롯는 어떤 슬픔이라도 오래 끌지 않으려 하며, 더 빨리 정상으로 복귀하라고 재촉한다. 그러나 바로 그 ‘정상’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누군가의 죽음은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누군가의 고통은 너무 손쉽게 봉합된다. 나는 이 망각의 시대를 산다. 숨은 거칠어지는데 길은 지나치게 말끔하다. 어떤 것이든 망각의 숲을 벗어날 수 없는, 위장된 세계다.


국가와 슬롯는 기억보다 망각을 훨씬 효율적으로 조직한다. 슬픔은 빠르게 소비되고, 애도는 의전으로 포장되며, 반복되는 참사는 차츰 감각을 무디게 만든다. 하지만 내가 쓰는 문장은 그 망각의 속도에 맞서는 느린 지연이다. 그 지연은 작고 여리지만 결코 무력하지 않다. 나는 그것을 수도자적 수련이라 부르고 싶다. 아무것도 확실하게 바꾸지 못할지라도, 적어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나가게 두지 않기 위해 문장을 붙드는 일. 그 일이야말로 나에게는 신앙적 행위이면서도, 동시에 세계의 침묵에 응답하려는 인간적 수행이다. 그리하여 나는 용기를 내어 이 시대의 숨결과 포장된 도로를 자주 거슬러 보려 한다. 기억의 윤리를 회복하고 싶다. 나에게 기억은 단지 과거의 저장이 아니다. 그것은 타인의 고통을 내 안으로 들이는 일이며, 그 고통이 더는 나와 무관하지 않다고 인정하는 행위다. 그러므로 나에게 기억의 지속은 곧 저항의 신학이며, 글쓰기는 그 저항을 현실 속에 머물게 하는 가장 낮고도 오래가는 형식이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아도, 나는 나에게 ‘말해두는 것’으로 충분하다.


나는 이 글에서 먼저 내가 누구이며, 왜 쓰는지를, 곧 글쓰기의 존재 이유를 되새기려 한다. 무엇이 나로 하여금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 같은 시대 속에서도 문장을 시작하게 하는가. 이어 나는 ‘형식’의 문제로 나아갈 것이다. 글쓰기는 철저히 형식을 창조하는 행위다. 20세기 초 형식주의가 받았던 여러 비판에도 불구하고, 나는 형식을 고민하여 글을 창안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기억은 그 형식 안에서 비로소 윤리로 전진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질문은 단순하다. 어떤 형식 안에서 기억이 가장 오래 남을 수 있는가. 어떤 언어가 고통을 소비하지 않고, 어떤 문장이 타자의 부재 앞에서 자신의 속도를 늦출 수 있는가. 이어서 이 글은 글쓰기의 실천을 언급하려 한다. 곧 몸과 걷기와 기도라는 리듬 속에서 문장이 어떻게 살아나는지를 제안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나의 글쓰기의 심연에 자리한 철학 개념, 곧 ‘검은 안식의 철학’을 다시 언급하려 한다. 이는 나의 신학이 슬롯 속에서 어떻게 구현될 것인지를 나에게 되묻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이 전체 글쓰기 여정은 결국 한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


“쓰는 일은 곧 걷는 일이고, 걷는 일은 곧 기도하는 일이다.”


솔직히, 나는 글을 쓰며 글을 배웠다. 글은 몸의 리듬이었다. 또한 모든 글은 읽기에 대한 당연한 대응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모든 글은 번역이다. 그 번역은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침묵하지 않고, 침묵 속에서도 세계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으며, 절망이 사라지지 않는 자리에서도 그 언어를 붙들어 나의 자리로 끌어오는 법을 조금씩 배우는 일이다. 이 글은 삶을 번역하는 배움의 기록이다. 그 번역은 내가 잊어버릴 수 있는 기억의 어둠 속에서 다시 기억을 일깨워, 그것을 다시 태어나게 하는 작은 빛의 증언이다. 그래서 나는 오래전부터 스스로에게 이렇게 선언해 왔다.


“기억하라, 그러나 절망하지 말라. 쓰라, 그것이 곧 가장 조용한 기도이며, 세계를 향한 가장 오래 지속되는 저항이다.”


이 문장을 남겨 둔 그 밤, 나는 한동안 창밖을 바라본 적이 있다. 불이 꺼진 창문들 사이로, 아직 잠들지 못한 불빛 하나가 오래 남아 있었다. 나는 그 불빛을 보며 생각했다. 아마 글쓰기란 바로 저런 것일지 모른다고. 세상의 마지막 등이 꺼진 뒤에도 누군가의 고통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대신 증언하는 잔향처럼, 끝내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작은 불빛 같은 것 말이다.


나는 오늘도 글을 쓴다. 잊히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잊을 수 없는 것들과 함께 살아남기 위해서다. 이 문장은 나에게 선언이라기보다 내 삶의 조건에 가깝다. 기억하지 않으면 더는 인간의 존재 이유를 유지할 수 없을지 모른다. 타인의 고통이 나와 무관한 것으로 남는 순간, 언어 또한 더는 인간의 것이 아니게 된다는 두려움이 있다. 그래서 글쓰기는 나에게 취향이나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이 시대에 대한 최소한의 윤리적 응답이며, 세계의 침묵 앞에서 내가 아직 인간으로 머물 수 있음을 증명하는 방식이다. 그 글이 짧거나 길거나 모두 내 삶이 지나온 흔적이며, 또 지나갈 전망이라는 것을 다시 떠올려 본다.


최근에 쓴 다섯 편의 글 ―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에 대한 문학적 비평, 위화의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에 대한 해석학적 독해, 「기억 저항의 계절과 작은 실천」에서의 신학적 성찰, 「10·29 참사에 대한 애도」에서의 정치적 고백, 그리고 「여린 초록 바다에 떠 있는 나―故 김민기의 〈바다〉」에 대한 에세이 ― 는 서로 다른 층위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결국 한 가지 질문으로 수렴된다. 기억은 어떻게 글쓰기의 윤리가 되는가.


내게 기억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윤리이며, 관계의 수행이다. 기억이란 인간이 타인의 고통을 자기 언어 안으로 들이는 방식이며, 글쓰기는 그 기억이 다시 타자에게 건너가는 다리다. 나는 이 윤리적 다리를 건너며, 언어의 내면에서 저항의 신학을 배우고 있다. 기억이 없다면 고통은 지나간 사건이 되지만, 기억이 있는 곳에서 고통은 아직 끝나지 않은 시간으로 남는다. 그리고 그 아직-끝나지-않음이야말로 글쓰기를 시작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다.


나는 앞서 언급한 다섯 개의 텍스트를 통해 이 질문을 오래 되묻고 있었다. 키건, 위화, 엘리엇, 이사야, 그리고 김민기의 노래. 이 서로 다른 시대와 언어의 텍스트들은 결국 하나의 공통된 물음으로 수렴된다.


“말할 수 없는 시대에, 어떻게 말할 것인가.”


키건에게서 나는 사소함의 윤리를 보았다. 위화에게서 나는 금지된 시간을 되살리는 문학적 기억 투쟁을 보았다. 엘리엇에게서 나는 절망의 파편을 보았고, 이사야에게서 나는 그 절망을 서둘러 봉합하지 않는 예언의 리듬을 보았다. 김민기에게서는 여린 존재가 끝내 시대의 슬픔을 버텨내는 의지와 저항을 경험했다. 이들은 모두 사건을 사실적으로, 분석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침묵과 부재를 관찰하고, 그 빈자리를 언어로 감싸 안는다. 글쓰기가 사건의 기술이 아니라 기억의 수행이 될 때, 문학은 비로소 윤리가 된다. 그 윤리의 핵심은 부재를 말하는 법, 곧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시선이다. 그래서 나는 점점 더 확신하게 되었다.


“글쓰기는 침묵과 기억 사이의 좁은 틈을 지나는 순례이다.”


그러나 이 글쓰기 윤리는 문학적 세계에만 갇히지 않는다. 나의 경우 그것은 신학적 당위에서 출발하여 현실 세계에 닻을 내린다. 다시 말해, 나는 탄원기도의 전통 속에서 이 글쓰기의 형식을 다시 이해하게 되었다. 탄원기도는 고통을 해결하지 않는다. 그것은 문제를 소거하거나 완전히 해결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고난을 즉시 희망으로 번역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고통이 아무 말 없이 사라지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는다. 그것은 말할 수 없음 속에서도 끝내 침묵하지 않으려는 몸짓이다.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말했다는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절규는 신학적으로만 완결된 문장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와 내 존재를 가르는 질문이며 항의이고, 동시에 관계를 끊지 않으려는 마지막 시도이기도 하다. 이 미완의 기도는 나의 글쓰기에도 적절한 지침을 준다. 글은 모든 것을 이해한 뒤에 쓰는 것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음 속에서도 계속 말하려는 시도라는 것이다. 설명이 아니라 탄원으로, 결론이 아니라 관계의 지속으로 남는 언어의 수련. 그것이 내가 믿고, 알고, 몸으로 겪고 싶은 글쓰기의 윤리다.


이 모든 것은 다시 하나의 질문으로 되돌아온다.


“이 기억과 윤리는 어떻게 현실 속에서 지속될 수 있는가.”


나는 그 답을 나의 몸에서 찾는다. 기억은 사고로만 유지되지 않는다. 그것은 반복되는 행위, 머무르는 시간, 멈추는 태도 속에서 지속된다. 나의 경우, 걷기와 멈춤, 호흡, 그리고 다시 쓰기가 그렇다. 이 반복 속에서 기억은 존재한다. 이렇듯 몸은 기억의 장소다. 어떤 사건은 잊힌 것처럼 보이지만, 특정한 계절의 냄새처럼, 특정한 빛의 결처럼, 특정한 걸음의 리듬처럼 다시 돌아온다. 글은 바로 그 몸의 기억이 언어로 번역되는 순간이다. 그러므로 글쓰기는 한 번의 행위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계속되는 실천이다. 나는 때때로 같은 문장을 다시 쓴다. 그것이 새롭기 때문이 아니라,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글쓰기는 몸철학의 문학적 성취다.

특히 나는 ‘애도’를 깊이 생각한다. 잠정적이지만,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애도의 기억은 자연스럽게 지속되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사라질 위험 속에 놓여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계속해서 다시 불러와야 한다. 글쓰기는 그 불러냄의 최소한의 형식이다. 나는 완전한 언어를 사용할 수 없다. 그러나 최소한의 언어는 찾아낼 수 있다. 아무것도 바꾸지 못할지라도, 적어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나가게 두지 않는 언어 정도는 되살릴 수 있다. 그 최소한이라 해도 애도의 언어를 살려내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글쓰기의 윤리다.


기억은 언어를 필요로 한다. 언어는 다시 형식을 요구한다. 애도의 기억이 현실 속에서 오래 버티기 위해서는, 그것이 타자의 고통을 훼손하지 않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애도 역시 철저한 문학의 형식 속에서 생명의 호흡을 얻는다. 그러므로 다음의 질문은 자연스럽다.


“기억은 어떤 형식 안에서 비로소 윤리로 머무를 수 있는가.”


II. 글쓰기의 형식 ― 시간의 언어, 기억의 형식으로서의 애도

글쓰기는 ‘나’라는 존재가 내 몸으로 겪어가는 수행이다. 다른 사람을 위한 글이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내 글을 받아주거나 다독여 줄 뿐이다. 그렇다면 그 수행은 어떤 형식을 취해야 하는가. 이 질문은 단순히 문학의 미학적 성격을 고민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언어가 인간의 시간을 어떻게 통과하고, 어떻게 머물며, 어떻게 타자의 고통 앞에서 스스로를 절제하는가의 문제다. 무엇을 쓰는가 보다 ‘어떻게’ 말할 것인가가 더 중요한 이유다. 나의 글을 지탱해 온 것은 언제나 이 두 번째 물음이었다.


어떤 진실은 내용만으로는 전달되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속도로 말해졌는가, 어디에서 멈추었는가, 무엇을 끝내 말하지 않았는가를 통해 비로소 드러난다. 형식의 문제라는 것이다. 문체와 시점, 기법, 나아가 슬롯적 배경까지 총합된 조형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형식은 생각의 외피가 아니라, 진실이 자기 자신을 견디기 위해 취하는 시간의 자세다. 말하자면 형식은 문장의 옷이 아니라, 존재가 자기 호흡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나는 형식을 문법이나 배열의 문제로만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논리의 틀이 아니라 보이지 않아도 글 속에 살아 있는 리듬이며, 글이 살아 있다는 호흡의 세기다. 문장은 단순히 사유를 표현하는 장치가 아니라, 단어와 단어 사이에 한 인간이 세계와 맞닿는 방식이 새겨진 그림이다. 그래서 형식은 늘 인간의 감성과 보이지 않는 숨결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장치다. 이탈로 칼비노의 말로 하자면, 가시성의 문제이기도 하다. 타인의 고통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 부재를 어떻게 부재로 남겨둔 채 말할 것인가. 이보다 한걸음 더 나아가, 고통과 부재를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 희망을 절망의 대척점으로만 두지 않고, 절망이 어떻게 절망으로서 인간에게 희망의 가능성을 보여주는가를 글로 만들어내는 형식의 창작이다.

그런 형식을 위해 나는 때때로 문장을 쓰다가 잠시 멈춘다. 더 적절한 단어를 찾기 위해서가 아니다. 나의 말을 계속해도 좋은가를, 내 몸이 나에게 묻기 때문이다. 어느 날은 노트 위에 몇 줄의 문장이 완성되지 못한 채 숨만 내쉬고 있을 때도 있다. 나는 그것들이 스스로 이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형식이란 완벽한 결말이 아니라, 글의 여백마저 수용한 형태다. 따라서 글쓰기의 형식이란 보이게 말해진 것과 보이지 않게 남겨진 것이 어우러진, 여백과 가득참의 조화다.


그런 점에서 내 글에는 신학, 문학, 철학의 개념들이 각자의 자리를 가지고 만난다. 신학은 내 글의 기초다. 그것은 침묵 속에서도 끝내 들려오는 묵시적 언어다. 철학은 내 글의 기둥처럼 존재한다. 이 기초와 기둥 사이를 엮어내는 것은 문학이다. 문학은 말해진 것보다 말해지지 않은 것의 무게와 용도를 따라, 내 글 속에 하나의 집을 조립하는 중요한 작업이다. 이를 통해 내가 관찰한 세계의 존재 이유와, 그것이 유지되는 시공간의 관계를 사유한다. 나는 이들을 경계에 세우고 나의 형식을 생각한다. 이제 형식은 틀이나 뼈대가 아니다. 세계와 인간을 다시 연결하는, 가장 조심스럽고도 깊은 내용이 담긴 망태기와 같다.


한편 시간은 글의 숨결이다. 문장은 시간을 어떻게 견디고, 어떻게 통과시키며, 어떻게 다시 불러오는가에 따라 그 형식을 수정하고 변형한다. 나는 오래전부터 문장에는 저마다의 시간이 있다고 생각했다. 어떤 문장은 급히 닫히고, 어떤 문장은 끝을 이어 붙여 열린 채로 오래 흐른다. 그 흐름과 멈춤의 유기적 관계 안에 머무는 문장이 인간의 몸을 흔든다. 기억이라는 장치로. 내가 읽고 남긴 다섯 편의 글은 바로 그런 형식과 내용이 기억이라는 장치로 남겨진 흔적들이다.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이 사실을 극히 미세한 방식으로 보여준다. 그의 문장은 거대한 사건을 향해 달려가지 않는다. 오히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느린 시간 속에 머문다. 찬 공기가 남아 있는 거리, 말해지지 않은 눈빛, 손끝 하나의 머뭇거림 같은 것들이 먼저 우리를 흔든다. 바로 그 느림이 인물의 내면을 비추고, 양심의 떨림을 드러낸다. 그 리듬은 서사적 시간이라기보다 관찰의 시간에 가깝다. 사건보다 시선이 먼저 움직이고, 결과보다 감지의 떨림이 앞선다. 키건의 문장은 큰 목소리로 말하지 않지만, 오히려 그 낮은 목소리 때문에 더 오래 남는다.


나는 이 바카라을 읽으며, 시간을 기억하는 방식이 곧 인간을 존재시키는 방식이라는 사실을 다시 배웠다. 펄롱이 한 아이를 품는 장면은 단 한순간이지만, 그 순간은 그의 과거와 미래를 모두 새롭게 배열한다. 삶이 변한 것은 시간이 흘러서가 아니라, 그 시간을 새롭게 읽었기 때문이다. 시간은 직선으로만 흐르지 않는다. 때로는 한순간이 오래된 생 전체를 다시 해석한다. 기억은 바로 그 재해석의 형식이다.


반면 위화의 “5월 35일”은 전혀 다른 시간의 구조를 보여준다.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날짜다. 그러나 바로 그런 이유로 문학 안에서 더 진실한 시간이 된다. 국가가 지우고 금지한 시간을 그는 허구의 날짜로 복원한다. 이때 문학은 사실을 꾸미는 것이 아니라, 파괴된 시간의 윤곽을 다시 세운다. 말할 수 없게 된 시간, 역사에서 삭제된 시간, 공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으나 인간의 내면에서는 지워지지 않는 시간. 위화는 바로 그 시간을 문학의 형식 안에 붙잡아 둔다. 숫자 하나가 어긋났을 뿐인데, 그 어긋남이 도리어 진실의 입구가 된다. 금지된 날짜는 사라지지 않고, 다른 이름을 입고 다시 돌아온다.


이 두 사람의 문학은, 내가 말하는 기억의 복원으로서 문학의 의의를 다른 관점에서 동일한 목적 아래 지향하는 흔적이다. 키건의 시간은 느리게 흐르며 인간의 양심을 드러내고, 위화의 시간은 멈추거나 지워짐으로써 역사의 폭력을 드러낸다. 하나는 너무 조용해서 들리고, 다른 하나는 너무 침묵당해서 오히려 더 크게 들린다. 나는 이 두 시간 사이에서 글쓰기의 형식을 배운다. 언어는 단지 흘러가는 시간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훼손된 시간을 다시 인간의 시간으로 돌려놓는 일이라는 것을.


한편, 이 두 사람의 글에 따르면 결국 기억이 언어로 형성되는 순간, 시간은 직선에서 원으로 변한다. 삶 바깥으로만 밀려나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 내면 안에서 맴돈다. 그 원 안에서 인간은 과거를 붙잡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다시 말할 수 있는 현재의 언어를 얻는다. 이때 글쓰기는 바로 시간의 저항이 된다. 망각이 시간을 지워버리는 힘이라면, 글쓰기는 그 지워진 시간의 가장자리를 다시 손으로 더듬어 이름 붙이는 일이다. 언어는 그 저항의 리듬이며, 형식은 그 리듬이 오래 지속되도록 붙들어 주는 보이지 않는 구조다.


나에게도 그런 경험이 하나 있다. 어느 날 나는 같은 길을 다시 걸은 적이 있다. 어제도 지나갔던 거리였고, 특별히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 길을 걷는 나의 시간은 전날과 달라져 있었다. 사물은 같았지만, 그것을 통과하는 기억의 결은 달라졌다. 내 몸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길은 같으나 돌아와 쓴 글은, 같은 과거를 새로운 현재로 재생했다. 글쓰기 역시 그러하다. 쓰는 일은 과거를 그대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다시 말할 수 있는 현재의 리듬을 찾는 일이다.


한편 형식이란 곧 언어의 윤리다. 나는 「기억 저항의 계절과 작은 실천」에서 이사야의 노래와 엘리엇의 시를 나란히 놓고 읽었다. 둘은 모두 절망을 말하지만, 말하는 방식은 전혀 다르다. 엘리엇은 절망을 파편으로 흩어 놓고, 이사야는 절망의 파편들을 예언의 리듬으로 다시 엮는다. 이 차이를 가르는 것은 내용이 아니라 형식이다. 나는 이 반복의 리듬을 ‘단절가의 문법’이라 불렀다.


엘리엇의 언어에는 무너진 시대의 질감이 있다. 그의 시는 끊기고, 갈라지고, 연결되지 않은 채 남는다. 반면 이사야의 언어는 절망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그 절망의 한복판에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놓는다. “그러나”라는 접속사는 이때 단순한 문법이 아니라 존재론적 전환의 자리다. 절망의 기술이 끝나는 지점에서, 아직 도래하지 않은 희망의 시간이 문장 안으로 들어온다.

단절가는 희망가가 아니다. 절망을 서둘러 봉합하지 않는다. 오히려 절망 속에 남아 버티며, 그 틈새에서 희망의 언어가 태어나는 과정을 보여준다. 절망의 언어는 대개 쉼 없이 쏟아지지만, 희망의 언어는 종종 멈춤 속에서 태어난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더 보탰는가가 아니라, 어디에서 멈추어 다음 말을 기다렸는가이다. 문장이 자기 과잉을 멈출 때, 비로소 타자의 고통이 들어올 자리가 생긴다. 그리하여 형식은 선택된 어휘의 문제인 동시에, 선택된 침묵의 문제다.


문장을 끊고 난 자리에는 짧은 공백이 남는다. 그러나 그 공백은 비어 있지 않다. 오히려 다음 문장이 태어날 자리를 조용히 비워두고 있다. 나는 그 여백 앞에서 자주 오래 머문다. 무엇을 더 말해야 하는가를 묻기보다, 무엇을 끝내 내 말로 소유하지 말아야 하는가를 묻는다. 타인의 고통과 공동체의 상처를 다룰 때, 형식은 더욱 조심스러워져야 한다. 그것은 고통을 소비하지 않기 위한 문장의 윤리이며, 침묵을 단순한 침묵으로 남겨두지 않기 위한 가장 낮고도 엄격한 접근 방식이다.


끝으로 나는 형식을 단순히 미학으로만 이해하지 않는다. 형식은 고통을 견디는 언어의 태도이며, 세계 앞에서 문장이 취하는 바카라임의 자세다. 절망을 빨리 희망으로 봉합하지 않는 것, 상처를 너무 쉽게 의미화하지 않는 것, 아직 끝나지 않은 아픔 앞에서 문장을 한 걸음 늦추는 것. 이 느린 윤리야말로 내가 말하고 싶은 형식의 핵심이다.


공동체의 목소리 역시 형식의 문제를 피할 수 없다. 글쓰기의 형식은 언제나 타자를 향한다. 문장은 혼자 태어나더라도 결코 혼자 완성되지 않는다. 특히 애도의 언어는 더욱 그렇다. 「10·29 참사에 대한 애도」를 쓰면서 나는 그 사실을 깊이 체험했다. 그날의 언어는 나 혼자의 것이 될 수 없었다. 죽은 자를 위하여 쓰지만, 살아 있는 이들이 함께 읽어야 하는 글. 슬픔을 기록하지만, 그 슬픔을 통해 공동체의 윤리적 감각을 다시 묻는 글. 그 글 앞에서 나는 형식이야말로 가장 공적인 바카라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결국 이 모든 기억의 실천은 오늘날 ‘애도’라는 행위로 수렴될 수 있다. 애도의 언어는 빠를 수 없다. 그것은 사건을 정리하는 문장이 아니라, 아직 끝나지 않은 시간을 함께 붙드는 문장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죽음을 서둘러 해석하지 않고, 쉽게 의미화하지 않으며, 그 죽음이 남긴 시간 앞에 오래 머무는 것. 그것이 애도가 지켜야 할 가장 엄격한 문법이다.


애도하는 삶 앞에서 글은 단지 개인의 기록이 아니라, 공동체적 기억의 장치가 된다. 글은 증언의 자리를 만들고, 그 자리에서 독자는 다시 ‘듣는 자’로 거듭난다. 그리고 바로 그 듣기의 행위가 공동체를 다시 세운다. 공동체는 언제나 함께 말하는 능력보다, 함께 듣는 능력에 의해 먼저 복원된다. 애도의 언어는 큰 목소리로 외치는 언어라기보다, 서로의 떨림을 놓치지 않기 위해 속도를 늦추는 언어다.


애도는 결국 문장을 통해 지속되는 공적 바카라임의 시간이다. 눈물은 마르지만 언어는 남는다. 남은 언어는 다시 사람들을 부르고, 불린 사람들은 다시 공동체를 만든다. 그리하여 글쓰기의 형식은 더 이상 개인의 취향이 아니다. 그것은 누군가의 부재를 공동체의 기억 안에 머물게 하는 시간의 구조이며, 그 시간을 통해 인간의 존엄을 끝내 지켜내려는 윤리적 장치다. 기억은 과거의 저장이 아니라 현재의 실천이며, 글쓰기는 그 실천을 지속시키는 도구다.


애도의 글쓰기 역시 형식을 필요로 하고, 형식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시간은 흘러가지만 언어는 그 흐름 속에 잠시 머문다. 나는 그 머묾의 순간을 글쓰기라 부른다. 쓰인 글은 지나가는 시간을 붙잡아 정지시키는 것이 아니라, 흘러가는 시간 안에서 인간이 끝내 잃지 말아야 할 존엄의 결을 드러내는 일이다. 예를 들어 『이처럼 사소한 것들』의 침묵, 위화의 “5월 35일”, 이사야의 단절가, 그리고 이태원의 애도. 이 장면들은 서로 다른 시대와 언어를 가졌지만 모두 하나의 형식적 진실을 품고 있다. 그것은 시간의 윤리, 다시 말해 기억의 형식이다. 글쓰기는 시간을 되돌리는 일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지워지려는 인간의 흔적을 다시 읽을 수 있도록 만드는 일이다. 기억은 그 존엄의 언어이며, 저항은 그 언어가 취하는 형식이다.


내가 문학의 형식을 단지 표현의 기술로 이해하지 않는 이유도 명확하다. 형식은 시간을 견디는 몸의 리듬이며, 기억이 무너지지 않도록 붙들어 주는 존재의 태도이기 때문이다. 이때 문장은 단지 머리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한 인간이 시간을 통과해 온 방식, 고통 앞에서 멈추었던 방식, 침묵을 견디며 다시 말을 배웠던 방식 속에서 선별되고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형식은 문장 밖으로 나와 걷는 속도, 멈추는 법, 숨을 고르는 리듬, 타자의 아픔 앞에서 목소리를 낮추는 태도로부터 만들어진다.

이처럼 형식은 시간을 담는 그릇이고, 시간은 존재를 증언하는 언어다. 그러므로 글쓰기는 단순한 표현이 아니라, 시간과 존재를 이어주는 가장 깊은 관계의 형식이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다음의 물음이 떠오른다.

“언어는 어떻게 다시 몸이 되는가. 기억의 리듬은 어떻게 걸음과 호흡, 기도와 침묵의 실천으로 이어지는가.”

III. 글쓰기의 실천 ― 몸, 걷기, 기도, 존재의 리듬으로서의 글쓰기

앞서 말한 대로, 형식은 문장 안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몸의 리듬으로 살아질 때 비로소 현실 속에서 지속한다. 글쓰기가 몸의 기억이 언어로 변하는 과정이며, 세계와 맺는 가장 오래된 관계의 형식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나는 오랫동안 걷기와 글쓰기를 함께 생각해 왔다. 걷는다는 것은 세계를 읽는 일이고, 글을 쓴다는 것은 그 읽힘의 흔적을 남기는 일이다. 몸이 먼저 읽고, 언어는 그 뒤를 따라온다. 실제로 글은 몸이 통과한 시간의 응축이다.


걷기의 시간은 시계가 재지 못하는 리듬을 품고 있다. 발걸음은 반복되지만, 그 반복 속에서 사유는 매번 다른 방향으로 열린다. 같은 길을 걸어도 같은 생각이 반복되지 않는 이유는, 몸이 매번 다른 시간의 결을 통과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리듬을 존재의 문법이라 부른다. 글을 쓴다는 것은 이 문법을 언어로 옮기는 일이다. 그래서 글쓰기는 생각보다 느리고, 기도처럼 조용하다.


나는 종종 글을 쓰다 말고 산바카라한다. 아무 목적 없이 산 위로, 옆으로 난 길을 걷는다. 길을 돌아와 다시 문장을 보면, 방금 전까지 보이지 않던 것이 희미하게 드러난다. 그 순간 나는 안다. 쓰는 몸이란 단지 글을 적는 몸이 아니라, 세계를 다시 받아들이는 몸이라는 것을 말이다.


나는 오래전부터 ‘걷는 기도’라는 글쓰기를 연습해 왔다. 걷는 동안 나는 문장을 의식적으로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걷는 행위가 나를 대신해 문장을 만들어낸다. 발밑의 길은 문장이 되고, 들숨과 날숨은 문단이 된다. 길은 외부에 있지만, 그 길을 걷는 질문은 언제나 내 안에서 시작된다. 어느 날 길 끝에 도착했을 때, 나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 것처럼 느꼈다. 그러나 돌아서는 순간, 이미 많은 것이 나를 지나갔음을 알았다. 생각은 남지 않았지만, 어떤 감각이 몸 안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감각은 시간이 지난 뒤 문장이 되어 돌아왔다.


기도는 글쓰기의 원형이다. 인간이 처음으로 말을 내뱉었을 때, 그것은 설명이 아니라 고백이었을 것이다. 기도는 언어 이전의 언어이며, 존재의 호흡으로 쓰인 최초의 시다. 나는 글을 쓸 때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문장을 시작한다. 어떤 문장은 억지로 밀어붙이면 생기지만, 오래 남지 않는다. 나는 그런 순간에 멈춘다. 그리고 기다린다. 언어가 나를 통과할 때까지. 이것이 내가 이해하는 ‘쓰는 기도’의 방식이다. 기도의 언어는 자신을 과시하지 않는다. 그것은 세계를 향해 외치기보다, 세계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언어다. 그래서 기도의 힘은 소리의 크기가 아니라 침묵의 깊이에서 나온다. 글쓰기 역시 그러하다. 진실한 문장은 종종 가장 낮은 목소리로 말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나는 한 봄날의 캠핑장에서, 여린 초록 바다처럼 펼쳐진 산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글쓰기의 실천이 무엇인지를 배웠다. 바람이 불 때마다 텐트는 작은 배처럼 흔들렸고, 나는 그 안에 앉아 故 김민기의 〈바다〉를 오래 들었다. 그때 내게 글쓰기는 그저 사유의 정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바람 소리와 노래의 숨결과 내 몸의 미세한 떨림을 함께 끌어안는 경청의 행위였다. 나는 그 노래를 단순히 해석한 것이 아니라, 몸 안으로 들여와 암송하듯 되풀이하며 나의 감각으로 다시 읽었다. 내가 ‘도석’이라 부른 이 방식은 결국 텍스트를 몸으로 통과시키는 애도의 방식이기도 했다.


“아무도 없어라”라는 빈 바닷가의 노래와, 바람에 흔들리는 봄 텐트, 그리고 연초록 파도처럼 일렁이는 산의 풍경은 하나의 장면 안에서 겹쳐졌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애도는 머리로 이해하는 일이 아니라, 흔들리는 몸으로 견디는 일이라는 것을. 기억은 설명으로 남지 않고, 냄새와 빛과 호흡과 떨림으로 다시 돌아온다는 것을. 그래서 글쓰기는 내게 여전히 조각배를 띄우는 일과 같다. 거친 바다를 멈추게 하지는 못하더라도, 끝내 아무것도 띄우지 않은 채 물러서지 않으려는 가장 작고도 완강한 의지. 어쩌면 검은 안식이란 바로 그런 순간의 이름인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흔들리고 있음에도, 그 흔들림 속에서 끝내 한 문장을 붙들고, 한 조각의 기억을 띄워 보내며, 사라지는 존재들 곁에 더 오래 머물고자 하는 인간 본질의 자세이다.


시간이 쌓이는 것은 결국 기도의 언어를 몸에 새기는 수련이다. 기억은 머리보다 먼저 몸에 새겨진다. 손끝이 문장을 쓰고, 발끝이 사유를 남긴다. 몸은 장소를 기억한다. 내가 걸었던 길, 머물렀던 공간, 들었던 목소리, 스쳐 지나간 표정들. 이 모든 것은 명확한 언어로 기억되지 않더라도 몸의 감각 속에 남아 있다. 어떤 냄새, 어떤 온도, 어떤 빛의 결이 오래된 기억을 불러오는 순간이 있다. 그때 나는 깨닫는다. 기억은 저장되는 것이 아니라, 몸 안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어둠이 깊어질수록 몸은 더 많은 것을 기억하고, 그 기억은 언젠가 문장이 되어 돌아온다.


이제 나는 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단지 언어를 다루는 기술이 아니라, 세계와 몸이 다시 관계를 맺는 수행이라는 것을. 걷기, 기도, 쓰기. 이 세 가지는 서로 다른 행위처럼 보이지만, 나에게는 하나의 리듬이다. 그것은 느리지만 가장 깊은 변화를 일으킨다. 그리고 이렇게 몸으로 살아낸 글쓰기는 결국 하나의 내적 이름을 얻게 된다. 그것은 단순한 습관이나 작법이 아니라, 밤을 견디는 존재의 자세이며, 기억을 놓지 않기 위한 가장 깊은 영성이다. 나는 그 느린 버팀의 이름을 검은 안식이라 부른다.


IV. 검은 안식의 철학 ― 기억의 밤, 저항의 사랑, 새벽의 언어

기억은 형식을 필요로 했고, 형식은 몸의 실천으로 실현되었다. 그리고 그 실천이 반복되면 하나의 철학으로 남는다. 나는 그것을 ‘검은 안식’이라 이름 붙였다. 나의 글쓰기는 결국 이 한 이름으로 귀결된다. 그것은 하나의 개념이기 이전에, 내가 오래도록 통과해 온 밤의 형식이며, 끝내 놓을 수 없었던 신학이 문학을 통해 다시 확보한 슬롯화다. 세계는 빛이 스민 채로 여전히 어둡다.


나는 오랫동안 빛의 언어보다 어둠의 언어에 더 가까이 서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어둠은 단지 부재나 절망의 다른 이름이 아니다. 그것은 상실 이후에도 남아 있는 시간, 말이 끊어진 뒤에도 계속되는 호흡, 세계가 등을 돌린 자리에서 끝내 인간의 존엄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존재의 느린 결단이다. 나는 그 결단의 시간을 검은 안식이라 부른다.


검은 안식은 어둠과 빛의 공존 신학이다. 빛이 어둑해진 자리에서 발견하는 안식, 망각하는 세계 속에서 끝내 기억하려는 의지, 침묵의 밤을 걸어가는 몸의 저항이다. 여기서 안식이란 단순한 휴식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방향을 묻는 걸음의 멈춤이며, 상실과 고통이라는 어둠의 한가운데서 여전히 존재하는 빛을 놓치지 않고 뒤따라가는 행위다.

내가 캠핑장에서 떠올리고 해석한 김민기의 노래는 이런 검은 안식을 다시 일깨우는 한 예다. 며칠 전 그 캠핑장에서, 나는 검은 안식이 단순한 개념이 아니라 하나의 감각이라는 사실을 다시 배웠다. 바람이 불 때마다 텐트는 작은 배처럼 흔들렸고, 텐트 문을 열자 건너편 산의 연초록 풀잎이 바다처럼 일렁였다. 그때 나는 땅 위에 있으나 물 위에 있는 듯했고, 고요하나 흔들리고 있었으며, 머물러 있으나 어딘가로 떠나고 있었다. 아마 검은 안식은 이런 상태에 더 가까울 것이다. 완전히 안전한 정박이 아니라, 흔들리는 한가운데서도 끝내 뒤집히지 않으려는 존재의 자세. 상실 이후에도 남아 있는 시간 속에서, 무너지지 않기 위해 가장 낮은 중심을 붙드는 몸의 리듬. 검은 안식은 그런 의미에서 평온의 이름이 아니라, 흔들림 속의 지탱이다.


故 김민기의 〈바다〉는 그 힘의 증거다. 그의 노래를 오래 들으며, 나는 이 사랑의 형식이 어떻게 몸 안에서 다시 위로의 언어로 살아나는지를 경험했다. 나는 그 노래를 다른 방식으로 분석하여 그 노래 속으로 들어가 보려 했다. 동시에 몸 안으로 들여와 암송하듯 되풀이하며, 내 안에서 일어나는 떨림과 기울어짐을 해석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내가 ‘도석’이라 부른 이 방식은 텍스트를 몸으로 통과시키는 경청의 수행이며, 동시에 애도의 시학이다. 그러므로 검은 안식의 문장은 단지 낮고 느린 문장이 아니다. 그것은 숨을 남겨두는 문장, 떨림을 지우지 않는 문장, 완결된 의미보다 오래 머무는 호흡을 더 신뢰하는 문장이다. 검은 안식은 말하는 자의 시학인 동시에 듣는 자의 시학이며, 설명하는 글쓰기인 동시에 끝내 귀 기울이는 글쓰기다.


검은 안식의 가장 깊은 중심에는, 세계가 어둠과 빛의 공존이라는 것을 자기 몸으로 기억하는 몸의 신학이 놓여 있다. 기억은 단지 내 몸으로 과거를 보존하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망각을 거슬러 흐르는 몸의 저항이며, 사라지라고 명령받은 것들을 끝내 사라지게 두지 않으려는 인간의 가장 오래된 육체적 저항이다. 슬픔의 무게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그 무게를 견디며 공감으로 함께 유지하는 공동체적 삶의 방식을 실현하는 예언자적 제자도이다. 우리 시대라면 사월의 세월호, 시월의 10·29 참사, 이름 없이 망각되는 수많은 삶들이 모두 그런 기억 저항의 대상이다. 이 모든 시간은 우리 슬롯가 집단적 망각과 싸워야만 지켜낼 수 있는 기억 투쟁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 기억 행동 중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바로 글쓰기다.


나의 글쓰기는 이 기억의 밤을 견디는 방식이다.
역사의 소음 속에서 쉽게 사라지는 기억을 글로 다시 불러낼 때,
비로소 기억은 누구보다 나를 구원하는 힘이 된다. 그러나 그 구원은 초월의 빛이 아니라, 인간의 어둠 속에서 태어나는 가장 낮은 빛이다. 검은 안식의 글쓰기는 그 빛을 뒤따르는 순례의 태도다.

검은 안식은 저항의 철학이면서 동시에 저항의 신학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저항은 단순한 대립이나 폭로의 기술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가 강요하는 냉소와 체념을 자기 영혼 안에서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느린 결단이다. 침묵해야 한다는 명령 앞에서 끝내 침묵하지 않는 것, 망각하라는 슬롯적 압력 앞에서 끝내 기억하는 것, 증오가 더 쉬운 시대에 끝내 사랑의 형식을 포기하지 않는 것. 나는 그 느린 지속을 저항이라 부르고 싶다.

그리고 이 저항의 가장 깊은 뿌리는 사랑이다. 망각은 권력이 선호하는 언어이지만, 기억은 인간다움을 입증하는 시민의 언어다. 무엇을 기억한다는 것은, 그것이 나와 무관하지 않다고 인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타인의 슬픔을 내 삶 밖으로 밀어내지 않는 것, 사라진 존재의 이름을 오래 부르는 것, 아직 회복되지 않은 상처를 너무 빨리 정리하지 않는 것. 이 모든 것은 결국 사랑의 다른 이름이다. 그래서 검은 안식의 글쓰기는 잊지 않기 위해 분노하는 것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기억하기 위한 사랑에서 시작된다. 분노는 상처의 진실을 드러내지만, 사랑만이 그 상처 곁에 오래 머문다. 사랑은 가장 오래 지속되는 저항의 형식이며, 가장 조용하게 공동체를 다시 세우는 힘이다.


검은 안식의 문장은 그래서 느리다. 그것은 독자를 설득하기 위해 급히 결론으로 달려가지 않는다. 오히려 머문다. 상처 옆에, 부재 옆에, 말할 수 없음의 경계 옆에. 그리고 바로 그 머묾 속에서 시는 태어나고, 산문은 비로소 기도가 된다. 좋은 문장이란 명쾌한 문장이기 이전에, 오래 머무를 수 있는 문장이다. 인간의 고통 앞에서 너무 빨리 지나가지 않는 문장,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못하더라도 곁에 남아 있는 문장. 그것이 내가 쓰고 싶은 검은 안식의 문장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 글쓰기를 하나의 조각배로 이해한다. 거친 바다를 멈추게 하지는 못하더라도, 끝내 아무것도 띄우지 않은 채 물러서지 않으려는 가장 작고도 완강한 의지. “내 작은 조각배 띄워 볼란다”는 그 한 문장은, 내게 애도 이후의 글쓰기와 닮아 있다. 우리가 쓰는 문장은 세계를 구원할 만큼 크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문장은 망각의 물결 위에 한 조각의 기억을 띄워 보낸다. 검은 안식은 바로 그 작음을 포기하지 않는 태도다. 그것은 거대한 승리의 언어가 아니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나가게 두지 않으려는 최소한의 저항이며, 기억하기 위한 사랑의 가장 낮은 형식이다.


나는 이제 글쓰기를 믿음, 곧 ‘믿으려는 용기’로 받아들인다. 글을 쓰는 일은 기도이며, 기억이며, 저항이다. 그리고 이 셋은 서로 다른 이름처럼 보이지만, 결국 하나의 생명 운동을 가리킨다. 기도는 세계를 향해 자신을 열어두는 일이고, 기억은 타인의 고통을 자기 안에 오래 머물게 하는 일이며, 저항은 그 고통이 무의미해지지 않도록 끝내 인간의 존엄을 붙드는 일이다. 검은 안식은 이 세 운동이 하나의 밤 속에서 만나는 자리다.


그러므로 검은 안식은 끝이 아니다. 그것은 무너진 세계 앞에서 더 이상 아무것도 말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다시 한번 언어를 시작하기 위해 필요한 밤이다. 낮의 언어가 감당하지 못한 것들을, 밤의 언어가 비로소 받아 적는 시간. 설명의 문장이 끝난 자리에서 기도의 문장이 시작되고, 분노의 문장이 다 타버린 자리에서 사랑의 문장이 남는 시간이다. 나는 그 시간을 통과하며 다시 쓴다. 세계를 고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적어도 세계를 끝내 포기하지 않기 위해, 여전히 나의 글쓰기로 기억하는 의식을 거행한다.


글쓰기에서 나는 마지막에 이르면 다시 처음의 문장으로 돌아온다. 모든 마지막은 다시 처음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애도의 기억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글쓰기는 기억의 반복이라는 최소한의 윤리로 현실 속에 생존한다. 나의 읽히지 않을 글 역시, 내가 나를 위해 남겨둔 기억이다. 몸이 경험한 최소한의 기억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쓰인 것이다. 그 기억 속에서 내가 오래 붙들어 온 마지막 문장이, 여전히 이 글의 마지막에 놓여 있다.


“검은 안식은 끝이 아니라, 시작
밤의 기억이자, 새벽의 언어
나는 그 언어로 나의 세계를 다시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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