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석(道釋): 여린 초록 바다에 떠 있는 나

-故 김민기님의 <바다>를 들으며, -애도의 계절, 사월을 지나가며

by푸른킴
이 글은 故 김민기(1951~2024)님의 노래 <바다>에 대한 주관적 해석입니다. 오늘 새벽 캠핑장에서 텐트 밖으로 보이는 연초록 산과 작은 배 같은 간소한 봄날의 텐트, 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텐트가 흔들리는 순간 이 노래를 떠올렸고, 다시 이 노래를 들으며 나의 모든 지각과 감각을 동원해 오늘 내 삶에 자리에서 다시 해석했습니다. 이 글에 적용한 방식은 ‘도석(道釋)’입니다. 오전내내 이 노래를 길을 걸으며 암송하듯 들으면서 나의 언어로 다시 풀어보았습니다. 사월은 애도의 달입니다. 모두가 이 슬픔 중에서도 그 슬픔이 곧 우리의 위로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배경

4월은 꽃잎이 비처럼 눈처럼 내리는 계절이다. 그 비꽃을 내 눈으로 만나고 싶어 짐을 챙겼다. 42번 데크, 다시 찾은 이 터엔 바람이 먼저 와 있다. 비어있으나 비어있지 않은 이 세 평짜리 공간이 이틀밤사흘낮 나의 거주지다. 겨울의 끝이 여즉 멈칫하던 삼월과는 전혀 다른 텁텁한 사월의 햇살이 사정없이 내리쬔다. 텐트를 치는 짧은 시간 동안, 겨울보다 물을 서너 배나 더 들이켰다. 다행히 새들이 환영하는 소리가 겨울보다 더 생기있고 다양하다. 나를 아는지, 누군가 왔다는 것이 좋은지, 그 이유가 무엇이든 환대는 언제나 마음을 따듯하게 한다. 더위 끝에 하사한 기운이 가득해진다.


고요한 밤을 지나고 아침이 왔다. 겨울과 달리 상쾌한 기분이 온몸에 스며든다. 눈을 떴다. 부지런한 새들 덕분이다. 한결 가볍게 일어났다. 어제보다 조금 더 흩어진 바람이 텐트를 흔든다. 몸을 일으켜 닫힌 텐트 문을 열었더니 건너편 얕은 산에 연초록 풀잎이 바다처럼 펼쳐졌다. 바람이 가볍게 불어 마치 파도가 일렁이는 느낌이 물씬하다.


이번 캠프에는 처남이 새로 장만한 터널형 텐트를 처음 설치했다. 지난 겨울의 둔탁하고 묵직한 텐트와 달리, 이번 텐트는 가볍고 여릿하다. 봄에 어울리고, 가벼운 햇살이 적격이다. 그러나 바람이 조금 세게 불면 아마도 뒤뚱거릴 것 같다. 겨울 텐트가 뿌리를 깊게 내린 튼실한 나무였다면, 봄 텐트는 한낱 바람에도 흔들려 날아가는 벚꽃처럼 가엾다.


새들이 깨운 아침, 텐트 앞, 산벚꽃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며 커피를 내려 바다 같은 옅은 초록산을 바라본다. 노래가 흐를수록 마치 내가 앉아있는 이 공간이 바다에 놓인 배 같다. 바람이 불 때마다 출렁이는 듯하다. 텐트 안에 있는 내가 물결을 따라 어디론가 떠내려가는 것 같다. 그 틈에 노루 한 마리가 건너 산 뒤로 산바카라을 나온 것 같다. 낙엽 밟는 소리가 파도 쓸리는 소리처럼 몸에 와 닿는다.


그 아침, 나의 작은 텐트는 연초록 바다 위에 떠 있었다. 땅 위에 있으나 물 위에 있는 듯했고, 고요하나 흔들리고 있었으며, 머물러 있으나 어딘가로 떠나고 있었다. 바로 그때, 새벽부터 내 안을 떠나지 않던 노래 하나가 다시 들려왔다. 故 김민기님의 〈바다〉였다.


노래 <바다> 가사

어두운 밤바다에 바람이 불면

저 멀리 한 바다에 불빛 가물거린다

아무도 없어라 텅 빈 이 바닷가

물결은 사납게 출렁거리는데

바람아 쳐라 물결아 일어라

내 작은 조각배 띄워 볼란다

누가 탄 배일까 외로운 저 배

그 누굴 기다리는 여윈 손길인가

아무도 없어라 텅 빈 이 바닷가

불빛은 아련히 가물거리는데

바람아 쳐라 물결아 일어라

내 작은 조각배 띄워 볼란다

바람아 쳐라 물결아 일어라

내 작은 조각배 띄워 볼란다


알려진 대로 이 곡은 김민기 제2집(1993년) Side B 5번 트랙이다. 그의 다른 노래들과 달리 리메이크 버전을 쉽게 찾을 수 없다. 양희은과 윤선애가 부른 곡이 회자될 뿐이다. 그러나 내게 중요한 것은 이 노래의 바깥 정보보다, 이 노래가 지금 이 아침의 나를 어떻게 붙드는가 하는 점이다.

커피가 다 비워져 가는 시간, 나는 여전히 〈바다〉를 듣고 있다. 4분 56초의 노래를 몇 번이고 되돌려 거의 한 시간이 흘렀다. 나는 지금 이 노래에 나의 도석(道釋)을 통해 되새기고 있다.


도석은 텍스트를 몸으로 끌어와 그것을 암송하거나 경청하며 해석하는 나의 방식이다. 이번 나의 도석도 텍스트를 몸 안으로 기꺼이 초대하는 일이다. 텐트를 흔드는 바람 소리조차 해석의 일부로 받아들이며, 김민기의 호흡을 나의 폐부로 옮겨 적는 고된 경청의 기록이다. 걷기도 하고, 사물을 오래 바라보기도 하며, 몸을 기울여 반복해서 듣기도 한다.


그러므로 도석은 처음부터 객관적 거리두기를 목표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노래 자체를 몸 안으로 들여, 그 가사를 입 안으로 암송하듯 따라가며, 그 순간 내 안에서 일어나는 떨림과 기울어짐까지 함께 해석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그런 점에서 도석에는 필연적으로 주관이 스며들고, 때로 감정이 넘친다. 그러나 그것은 해석의 흠이 아니라, 노래가 몸을 통과할 때 생겨나는 하나의 진실에 가깝다. 오늘 나는 김민기님이 직접 부르는 이 노래를 오래 들었고, 이제 그 노래를 들으며 다시 재구성된 그의 가사를 나의 몸과 귀를 따라 옮겨보려 한다.

들리는 노래 분석

1. 프롤로그: 전주와 첫 장면

트럼펫 전주에 이어 신디사이저가 ‘붐 붐 붐 붐’하며 흐른다. 그 소리는 멀리서 밀려오는 물결처럼 단순하고 무겁다. 이어 “어두운 밤바다에”라는 첫 소절이 나오면, 마치 왈츠의 걸음처럼 한 글자씩 천천히 땅을 밟듯 진행된다. 아직 바다는 보이지 않는데, 발밑의 리듬이 먼저 바다의 어둠을 만든다.

“바람이 불면”에 이르러 순간 리듬이 변주한다. 바람이 불어오는 소리처럼 분명하게 들린다. 그러나 아직 그 바람은 완전히 터지지 않는다. 고요한 폭풍, 혹은 막 일어나려는 숨결처럼 스친다. 이어 “저 멀리 한 바다에 불빛 / 가물거린다---”에서 리듬은 점점 바다 쪽으로 나아가는 듯한 인상을 준다. 노래는 ‘바다’와 ‘불빛’을 연이어 붙여놓지만, ‘불빛’과 ‘가물거린다’ 사이에는 틈이 있다. 그 틈만큼 불빛은 이미 멀고, 이미 흔들리고, 이미 붙잡을 수 없는 것이 된다. 화자는 바다를 보는 자이면서, 그 불빛을 놓쳐가는 자처럼 서 있다.

2. 빈 바닷가의 리듬

다시 리듬이 달라진다. 노래와 반주의 속도는 느려지고, 트럼펫 소리가 그 사이로 끼어든다. 화자가 바라보던 바다와 불빛과 가물거림이 스러진다. 빛이 꺼지고 어둠이 다시 바다를 덮는다.

“아무도 없어라”에서 노래는 갑자기 자기를 비우는 느낌이다. 가사도, 리듬도, 부르는 소리도 모두 공백을 만든다. “아무도”를 천천히, 그러나 거의 같은 음으로 평평하게 부른다. 이어지는 “텅 빈 이 바닷가”도 비슷하다. 모든 것이 눌린 채 펴지고, 사라진 채 남아 있다. 그런데 바로 그 뒤 “물결은 사납게”에서 음이 떨리기 시작한다. “출렁거리는데”에 이르면 소리는 길게 이어지다가, 물방울 튀어오르듯 떨어졌다가 다시 솟는다. 불빛을 거둬간 뒤의 바다는 오히려 더욱 거칠게 살아난다. 화자의 묵직한 음성이 잔향이 되어 몸에 맴돈다.

3. 후렴: 명령과 호소의 음성

“바람아 쳐라.” 화자의 호소가 바다를 뚫고 떨어진다. 이제 그는 바라보기만 하지 않고 부르기 시작한다. 이 호명의 사건은 바다 위를 정조준한 폭풍처럼 들린다. ‘쳐라’는 명령이고, 그 명령을 부르는 목소리는 천천히 그러나 더욱 묵직해진다. 이어 “물결아 일어라”에서 음은 더 길어지고 간절해진다. 바람과 물결이 모두 화자의 목소리 앞에 불려온다.


그리고 “내”라는 한 음절에서 노래는 순간 멈칫한다. 이 짧은 멈춤은 특이하다. 한 사람의 호흡이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순간처럼 들린다. 짧게 뱉어내는 소리이면서 동시에 숨을 거두어들이는 소리다. 그 뒤 “작은 조각배 띄워 볼란다”가 이어진다. 여기서 음은 다시 앞으로 나아간다. 거칠고 넓은 바다 앞에 ‘작은’ ‘조각배’라는 말이 연이어 놓이면서, 가사의 크기는 한없이 줄어든다. 그러나 바로 그 왜소함 때문에 오히려 이 후렴은 쉽게 꺾이지 않는 의지로 남는다.

4. 둘째 연: 시점의 흔들림

“누가 탄 배일까 외로운 저 배”에서 노래는 다시 가라앉는다. 화자는 묻는다. 그러나 이 물음은 정보를 얻기 위한 질문이라기보다, 자기 앞에 떠 있는 어떤 존재를 더듬는 질문처럼 들린다. 노래는 이 대목에서 읊조리듯 흘러가며, 가사도 음도 거의 사라질 듯 약해진다. 작은 배가 바다에 띄워져 출렁거리는 것처럼, 시점도 흔들린다. 배를 띄운 사람과 배에 탄 사람이 같은지 다른지, 이제는 분간하기 어렵다.


“그 누굴 기다리는 여윈 손길인가”에서도 목소리는 계속 낮고 가늘다. 그러다가 “아무도 없어라”에 이르면 다시 절규에 가까운 늘어짐이 나타난다. “텅 빈”은 앞에서처럼 평평한 음으로 불리지만, 이번에는 같은 평평함이 다른 무게를 가진다. 첫 번째의 빈자리가 풍경의 비어 있음이었다면, 두 번째의 빈자리는 더 깊은 허무의 심정으로 들린다. 이어 “이 바닷가 불빛은 아련히 / 가물거리는데”에서 불빛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멀리 남아 있는 것으로 다시 나타난다. 처음의 불빛보다 더 멀고, 더 닿지 않으며, 더 오래 흔들린다.

5. 반복과 에필로그

이후 후렴은 다시 돌아온다. 그러나 같은 가사가 같은 뜻으로 반복되지는 않는다. 두 번째 “바람아 쳐라”는 첫 번째보다 더 늘어지고 더 애절하게 들린다. “물결아 일어라”는 더 길고 무거워지며, 마지막 하나 남은 부탁처럼 몸에 박힌다. “내” 역시 처음과 같은 소리가 아니다. 한때 멈칫하던 음절이 이제는 더 분명해졌다가, 끝에 가면 다시 가늘어지고 길어진다.


마지막에 이르면 리듬은 처음의 왈츠로 돌아간다. 그런데 신디사이저가 먼저 흐르고, 이어서 트럼펫 독주가 섞인다. 프롤로그로 되돌아왔으나 순서는 바뀌었다. 같은 자리로 돌아온 듯하지만, 이미 같은 자리라고는 할 수 없는 끝이다. 이 뒤바뀜이야말로 이 노래 전체가 지나온 정서를 조용히 증언하는 듯하다.


도석-죽음을 애도해야만 하는 모든 이들을 위한 위로

도석은 객관적 분석만으로는 다 닿을 수 없는 자리를 더듬는다. 가사를 암송하듯 따라 부르고, 같은 후렴을 여러 번 되감아 들으며, 몸 안에서 떨리는 지점을 오래 붙든다. 그러므로 여기서부터의 해석은 다분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나는 바로 그 주관 속에서 이 노래가 자기 얼굴을 드러낸다고 믿는다. 이 노래는 감정을 억제한 채 바라보는 노래가 아니다. 오히려 감정이 몸 안에서 넘치고 흔들리는 그 자리에서만 들리는 노래다.

항간에, 어떤 이는 이 노래를 개인적인 죽음 경험으로 이해하려하고 또 어떤이는 그 시대를 저항하는 노래로 이해하려한다. 그러나 나는 이 노래를 자기 실존을 죽음같은 슬픈 일을 겪은 이들을 위로하는 노래로 해석한다. 그 죽음에 자기 바카라임이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을 다독이는 노래로 이해한다. 특히 4월은 개인은 물론이고 슬롯적으로도 죽음을 애도하는 일이 많아서 우리 모두를 위로하는 노래로 받아들이고 싶은 것이 이 글을 쓰게 된 이유이다.

그래서인지 내가 이 노래를 들을수록, 곡조는 새로워지고 가사는 살아난다. 노래의 배경으로 회자되는 이야기는 차치하고, 중요한 것은 바다에 쓸려간 어떤 기억인지, 바다에 쓸며 무엇인가 가버렸는지 끝내 묻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노래에는 그 죽음같은 어떤 절망을 그저 지나갈 수 없는 어린 인간의 고요한 절규가 흐르는 듯하다. 반복될수록 그 절규는 단순한 슬픔에 머물지 않고, 운명 너머 재회의 희망 같은 것을 자기 몸 안에 끝내 쑤셔 넣으려는 몸짓처럼 느껴진다. 이것은 노래의 객관적 사실이라기보다, 내가 이 노래를 오래 들으며 몸으로 이끌어낸 정조이다.


1. ‘내’의 3중주

내게 이 노래의 가장 미세하고도 결정적인 시어는 ‘내’이다. 후렴 속 “내 작은 조각배”의 ‘내’는 매번 같은 1인칭이 아니다. 처음의 ‘내’는 숨이 막혀 잠시 멈추는 자의 ‘내’다. 말하기 전에 숨부터 걸리는 사람의 ‘내’다. 두 번째의 ‘내’는 조금 더 분명하고 낮아진다. 절망을 통과한 뒤에도 아직 포기하지 않은 자의 ‘내’다. 마지막의 ‘내’는 다시 가늘어지고 길어진다. 의지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의지마저 더 이상 큰 소리로 말할 수 없게 된 자의 ‘내’다. 그래서 이 ‘내’는 단순한 주어가 아니라, 한 사람의 마음이 무너지고 버티고 다시 놓아가는 세 겹의 음성으로 들린다.

2. 바람아 쳐라, 물결아 일어라

이 후렴은 단순한 명령이 아니다. 내게는 이것이 세계를 향한 마지막 호소처럼 들린다. 바람과 물결을 부르는 것은 자연을 지배하려는 말이 아니라, 더는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자가 세계 전체를 향해 던지는 외침에 가깝다. 그러니 “쳐라”와 “일어라”는 파괴의 요구이면서 동시에 응답의 요청이다. 나 대신 움직여다오, 나 대신 흔들려다오, 내가 하지 못하는 일을 너라도 해다오 하는 마음이 그 속에 겹쳐 있는 듯하다. 이 노래의 화자는 끝내 가만히 있지 못한다. 아무도 없고 텅 비어 있으나, 그렇다고 침묵으로 가라앉지도 않는다. 그는 끝까지 부른다. 바람을 부르고, 물결을 부른다.


3. 배의 실체

“작은 조각배”는 무엇인가. 그것은 실제 바다 위에 띄우는 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노래를 따라가다 보면, 그 배는 점점 더 상징이 된다. 잃어버린 친구일 수도 있고, 친구를 보내는 마음일 수도 있으며, 남겨진 자의 끝내 놓지 못하는 희망일 수도 있다. 시대의 저항일수도 있고, 더 분명한 것은 자기 실존일 수도 있다. 무엇보다 '작다'와 '조각배'가 엮여 그 실존이 더 왜소해보인다. 배를 띄운 사람과 배에 탄 사람이 같은지 다른지 알 수 없게 되는 지점에서, 이 배는 더욱 깊어진다. 어쩌면 그 배는 화자 자신이다. 어쩌면 살아남은 사람이 바다에 띄워 보내는 자기 자신의 일부다. 그러므로 “누가 탄 배일까”라는 질문은 남을 향한 질문이 아니라, 자기 상실을 향한 질문처럼도 들린다.

나는 “텅 빈 것은 바다가 아니라 배였다”고 생각하며 이 노래를 들었다. 바다는 오히려 끝까지 살아 움직인다. 불빛은 가물거리고, 물결은 출렁이고, 바람은 불며, 바다는 응답한다. 비어 있는 것은 그 속을 건너는 존재 쪽이다. 그래서 이 노래의 공허는 자연의 공허가 아니라, 인간의 공허이며, 남겨진 자의 공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바로 그 비어 있음 때문에 배는 더 멀리 간다. 아무것도 싣지 않은 듯한 배, 혹은 너무 많은 것을 실어서 도리어 비어 보이는 배가, 거친 바다 위로 띄워진다.


이때 “작다”와 “조각배”는 왜소함의 언어이면서 동시에 희망의 언어가 된다. 거친 바다 앞에서 인간의 의지는 얼마나 작은가. 그러나 바로 그 작음 때문에 이 의지는 진실해진다. 거대한 승리를 꿈꾸는 의지가 아니라, 그저 작은 배 하나라도 띄워보겠다는 의지. 장담할 수 없는 결말 앞에서, 그래도 무엇이라도 해보겠다는 결연함. 내게 이 노래는 바로 그 작음의 힘을 노래하는 것처럼 들린다. 절망은 절망이지만, 그 절망 속에서도 끝내 배 하나를 띄워 보내는 마음을.

그래서 마지막에 가서 나는 다시 나의 텐트로 돌아온다. 초록 바다처럼 펼쳐진 봄 산 앞에서, 작은 텐트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이 노래를 더는 바다에 관한 노래로만 들을 수 없었다. 이 노래 속에는 작은 배처럼 여릿한 인간이 있고, 동시에 거친 바다를 향해 끝내 선언하는 흔들리는 인간이 있다. 떠날 사람, 남은 사람, 밀려와 삼키는 바다, 밀려가 떠나는 바다가 함께 있다. 그리고 그 모든 사이에서 나 역시 여린 초록 바다에 떠 있는 작은 존재로 앉아 있었다. 이 땅의 삶과 죽음을 온몸으로 겪어야만 하는 작은 인간으로. 하여 나는 이 노래를 들으며, 바다를 해석한 것이 아니라, 바다 같은 노래 앞에서 다시 나 자신을 해석하게 되었다.


애도라는 우리의 위로: 출렁이는 바다에 배를 띄우는 의지

이 노래를 듣는 나의 태도는, 슬픔을 건너가려 하기보다 그 한가운데에 머무르려는 쪽에 가깝다. 김민기의 〈바다〉는 절망을 빠르게 희망으로 번역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무도 없어라”라는 텅 빈 진술을 여러 번 되풀이하면서, 그 비어 있음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는지를 몸으로 견디게 한다. 이 점에서 나는 이 노래가 그의 다른 곡들, 이를테면 〈친구〉나 〈잘가오〉와 한 결에 놓여 있다고 느낀다. 떠나간 이를 애도하는 목소리는 결코 서둘러 위로로 돌아서지 않는다. 남겨진 자의 자리는 끝내 비어 있고, 그 비어 있음은 쉽게 봉합되지 않는다.

이러한 정조는 시편의 탄원시를 떠올리게 한다. 거기서도 절망은 곧바로 희망으로 치환되지 않는다. 오히려 절망은 절망인 채로 길게 지속되고, 인간은 그 상태를 통과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어둠은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통과되어야 할 계곡처럼 남는다. 〈바다〉의 화자 역시 그렇다. 그는 바다를 향해 부르고, 바람과 물결을 향해 명령하지만, 그 부름은 상황을 단번에 바꾸는 기적을 기대하기보다는, 바뀌지 않는 세계 속에서도 끝내 말을 멈추지 않으려는 몸짓에 가깝다.


그래서 이 노래에서 드러나는 인간은, 단순히 슬퍼하는 존재가 아니라 의지로 버티는 존재, 곧 죽음의 골짜기를 걸어가면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는 인간이다. 절망 속에서도 무엇인가를 띄워보려는, 작고 연약하지만 끝내 포기하지 않는 존재. 나는 그를 저항하는 인간, 혹은 의지의 인간(Homo Voluntatis)이라 부르고 싶다. “내 작은 조각배 띄워 볼란다”는 선언은 거대한 승리를 향한 의지가 아니라,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지라도 행위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최소한의 결의다. 그 결의는 바다를 이기지 못하지만, 바다 앞에서 완전히 사라지지도 않는다.


도석에 따른 저항의 조가 <바다> 다시 듣기- 작사·작곡: 김민기

이제 나는 이 노래를 김민기씨가 부르는 대로, 그의 감정에 실린 표현, 가사의 밀고 당김, 음의 음영을 내 몸으로 감지한 대로 그대로 표현해 본다.

트럼펫의 묵직한 소리가 검은 바다의 보이지 않는 수평선을 가르고, 신디사이저의 낮은 음이 파도처럼 밀려와 노래 속으로 흩어진다.

(전주: 조가의 트럼펫이 밤바다의 적막을 깨우며 가득 찬다. 신디사이저의 음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어두운 밤바다에 (왈츠의 리듬을 따라)

바람이 - 불면

저~ 멀리 한 바다에

불빛 가물거린다---

아무도 없-어어-라 (라르고로 느려지며)

텅 빈 (천천히) 이 바아닷가 물결은~

사아나압게

출-렁 거.리.는. 데 (트럼펫 사이)

바람아 - 쳐라

물결아 – 일어라 (고조되는 감정)

내(거친 숨) - 작은 조각배 (아다지오) 띄워 볼란다

(신디 파도음, 트럼펫 뒤따름)

누가 탄 배일까

외로운 저 배...

그 누굴 기~다리.는. 여윈 손길인가 (생각하듯)

아~무도 없어어라~

텅 빈 이 바닷가

불~~빛.은 아아려언히 가물-거.리.는.데

바람아 - 쳐라

물결아 - 일어라

내(단호한 의지) - 작.은 조각배 (흘러내리듯) 띄워 볼란다

(바다로 던져지는 소리, 단호하게)

바람아 – 쳐라~

물결아 – 일어라~

내(들릴 듯 말듯 숨이 터지듯 가라앉는) - 작.은. 조각배 띄워 (여리게) 보올란다(의지적으로)


(에필로그: 신디사이저가 파도소리처럼 먼저 들리고, 이어서 조가의 트럼펫이 크게 들렸다 멀어진다. 처음 소리와 반대가 되었다. 노래가 사라진다)


간단히 다시 설명하면, 이 도석(道釋)은 김민기라는 한 거장이 남긴 연주와 목소리를, 나의 몸을 들은 결과를 옮겨 놓은 것이다. 노래에 대한 도석은 ‘청각적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종이 위에 쓰인 가사, 노래로 흘려 보내는 가사가 아니라 노래를 몸으로 붙들어 내 안에 박제한 가사라는 의미이다. 故 김민기님의 노래는 호흡과 연주, 그리고 자기 일상에 대한 지난한 저항이 조화롭다. 특히 이 노래에서 나는 세 가지를 주목했다.


1. 찰나의 호흡과 리듬의 분절

이 노래에는 그의 호흡이 분절되는 순간이 자주 있다. 친구의 죽음에 대한 한탄, 그 죽음 소식을 친구의 부모님께 전달해 드리러 가는 슬픈 심정이 담겨있다. 하지만 그것을 넘어 이 노래에는 그가 죽음을 삶의 질서로 애써 받아들이려는 아련한 마음이 박혀있다. 그리고 그 숨결이 송곳처럼 듣는 이를 찌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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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렁 거.리.는. 데': 이 분절은 가수로서 김민기는 이 대목에서 죽음 직전의 숨을 재현하는 것 같다. 얼마나 정교하게 리듬을 쪼개는지 나는 이 부분에서 나의 아버지가 숨을 거두는 마지막 장면을 떠올렸다. 아버지가 본향으로 돌아가던 어느 일요일 오후 4시 특수병동에서 숨이 출렁거리던 순간이 스쳐간다.

'아아려언히': 그는 노래 중에 가사를 길게 늘여 부른다. 숨을 이어가는 것이다. 단순히 길게 부르는 것이 아니다. 이 노래에서 그는 소리를 다 내뱉지 않고, 남겨둔다. 그리고 마지막에 넘어갈 듯한 숨결로 소리를 흘려보낸다. 마니 내뱉은 소리의 잔향이 내가 강릉 어느 바닷가에서 밤공기를 들이마시며 검고 푸른 파도소리를 눈으로 보던 때를 떠올리게 한다.

2. '내'의 변주: 세 겹의 생애

이 노래에서 김민기는 ‘내’‘라는 대목을 모두 다르게 표현한다. 이는 단순한 반복이 아닌 것 같았다. 그것은 친구의 죽음 앞에서 ’나‘라는 사람이 해낼 수 있는 모든 감정을 최선을 다해 드러내는 탄식같았다. 처음에는 들릴 듯 말 듯, 그리고 단호한 의지, 마지막으로 봄날 꽃 터치듯 쏟아내는 최후의 숨결같은 소리다. 나는 그렇게 이 슬픈 사건 앞에서 분해되고, 다시 살아난다. 그가 부른 이 노래는 과도할 정도로 인간의 마지막 순간, 또는 그 장면을 목격하는 시간, 나아가 그것을 어찌할 수 없이 애도해야만 하는 사건을 그대로 리듬과 음에 담아냈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 리듬 앞에서 무기력함과 허탄함, 나아가 좌절해야만 하는 인간에 대한 애도가 들어있다. 따라서 그의 노래에 담긴 세 번의 ‘내’는 죽은 이 앞에 있는 ‘나’에 대한 애도의 변주라 할 수 있다. 애도는 죽어간 이들을 위한 것임과 동시에 살아남은 자를 향한 의식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3. 음악에 담은 진솔한 애도-조가(弔歌)의 미학

이 노래는 전주와 에필로그에서 트럼펫과 신디사이저가 뒤바뀐다. 처음에는 조가같은 트렛펨이 먼저 울리고, 이어서 파도가 밀려오는 소리가 들어온다. 하지만, 곡의 마지막에는 파도가 밀려가고 트렘펫이 울린다. 나는 이 구조가 김민기가 치밀하게 조직한 애도의 설계도라 생각한다. 아니 미학의 장치라 해야겠다.

끝으로, 트럼펫이 수평선을 가르며 나타났다 파도 소리(신디사이저)가 겹처지는 처음에는 떠나간 친구를 배웅하는 장면이 그려진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는 그를 보내고 난 뒤 홀로 남겨진 자를 위한 애도를 보여준다. ‘조가(弔歌)’의 상호성이다.


결국 이 노래는 김민기라는 가수가 부름으로써 비로소 <바다>가 되었다. 소리와 숨결로 그린 '죽음 앞에서 늘 채무감을 가진' 인간에 대한 경이로운 애도가 담겼다.

애도의 계절:그대 한없이 슬퍼하자, 그 슬픔으로 서로 위로하자.

우리 시대에 4월은 단순한 봄의 절기가 아니다, 슬픔의 마음을 함께 견디는 시간이다. 우리 중 어떤 상실은 개인의 기억으로만 남기에는 너무 크고 깊다. 그래서 나는 이 계절을 공공의 애도의 절기로 보내고 있다. 각자의 빈 배와 가물거리는 불빛을 기억한 채, 서로의 슬픔이 완전히 이해되지 않더라도 함께 머무르는 시간. 그 시간 속에서 우리는 절망을 지우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붙든 채 한 걸음씩 걸어간다. 김민기의 이 노래는, 바로 그 느린 걸음의 리듬으로 가장 짙은 슬픔에 참여하는 것이 곧 우리에게는 또 다른 위로라고 들려주는 것같다

이 계절, 산벚꽃 아래서 이 노래를 들은 것은 나를 위한 애도의 선물이다. 유난히 슬픈 죽음이 많은 이 계절에 우연히 이 조가가 나를 깨워 위로해준다. 누군가 죽음 앞에서 마음이 움츠러 드는 이들과 우리 시대에 슬픔을 자기 위로로 해석할 기회를 준 것인지도 모른다. 슬픔은 억지로 극복되지 않을 것이다. 또 슬픔을 감춘다고 사라지지도 않을 것이다. 슬픔은 손으로 만져야 하고, 눈으로 보아야 하며, 온 몸으로 체감해야 한다.

한 개인의 죽음을 마음에 담은 노래 <바다>를 산을 바라보며 숲에서 듣는다. 이제야 비로소 속절없이 떨어지는 눈앞의 꽃잎이 꽃잎답게 보인다. 지는 꽃이 아니라, 모든 애도를 힘입어 다시 피어날 준비를 하는 꽃들처럼 말이다. 오늘 이 한 사람의 노래는 곧 세계 위에 내리는 모든 죽어가는 이들을 위한 애도의 숨결같다. 꽃이 진다. 소리 없이, 그러나 꽃이 핀다, 삶의 모든 애도를 힘입어 숲에서도 바다의 슬픔, 바다에서도 산의 슬픔을 조금 노래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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