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로마서 5: 5-11 '화목'의 개념
결론적으로, 전쟁은 누군가의 삶을 고립으로 몰아가는 사건의 지평선이다.
그 지평선 너머로 누군가 사라지기 전에 우리가 함께 지금-여기에
식탁을 차려야 한다. 나는 이 식탁의 이름을 '대동'이라 부른다.
사람은 무엇으로 함께 사는가
폭탄이 떨어졌다. 예고도, 경계도, 밤낮도 없었다. 삶의 자리는 순식간에 무너졌다. 이유는 늘 분명하지 않다. 국익이라는 말이 앞세워지지만, 그 명분만으로 전쟁이 정당화될 수 있는지는 끝내 의문으로 남는다. 국익이 인간의 생명과 맞바꿀 만큼 절대적인 가치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그것이 한 개인의 돌발적 판단이나 권력의 오만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 명분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가 지구촌이라 불리고, 세계화와 월드와이드웹이라는 연결망으로 묶인 이후 평화는 오랫동안 세계의 표어처럼 유통되어 왔다. 그러나 그것이 삶을 실제로 지키는 원리라기보다 슬로건에 가까웠던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다른 이유를 다 알 수 없다 해도 지금 가장 먼저 말해야 할 것은 분명하다. 모든 전쟁은 멈추어야 한다. 세계는 홀로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함께’ 공존할 때에만 존재의 가치를 획득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함께는 변하지 않는 공존의 가치다.
1885년 톨스토이는 단편소설집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와 다른 얘기들》을 출판했다. 이 작품의 중심에는 ‘사랑’이 있다. 시몬과 미하일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사람마다 마음 깊은 곳에 저마다의 방식으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힘이 남아 있다는 통찰과 마주하게 된다. 동시에 이 작품은 종교를 향한 우회적인 비판이기도 하다. 당시 러시아 사람들의 현실에서 멀어진 러시아정교회를 향한 쓴소리가 문학의 형식 속에 스며 있다. 사랑을 말하지만 사랑과 멀어진 교회의 모습, 민중과 ‘함께’ 살아야 할 자리를 외면한 종교의 자기모순이 이 작품의 배경을 이룬다. 사랑을 말하면서도 타인을 배척하는 신앙인에게 경종을 울린 소설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작품은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으면서도, 그 질문만큼은 가볍지 않다.
오늘 이 작품을 다시 떠올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질문이 삶의 근거를 묻는다면, 그 질문은 자연스럽게 이렇게 바뀔 수 있다. 사람은 무엇으로 ‘함께’ 사는가. 사랑이 삶을 지탱하는 힘이라면, 그 사랑은 필연적으로 관계의 문제를 품기 때문이다. 사랑은 홀로 성립하는 감정이 아니라, 언제나 누군가를 향하고 누군가와 얽히는 방식으로만 존재한다. 그런 의미에서 ‘함께’는 단순한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실천의 문제이고, 행동의 문제이며, 결국 프락시스의 문제다. 그러므로 여기서 ‘함께’를 말한다는 것은 어떤 추상적 당위를 선언하는 일이 아니라, 삶의 자리에서 그것이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지를 묻는 일이다. 이 글이 살펴보려는 것도 바로 그 점, 곧 ‘함께’의 정치슬롯적 실천 가능성이다.
사람은 원천적으로 혼자 살 수 없다. 그런데도 시대는 ‘초개인화’의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진단이 힘을 얻고 있다. 1인 식당, 마트의 1인 코너, 고시원의 1인실, 1인용 생활용품의 증가는 혼자 사는 슬롯 구조가 점점 더 공고해지고 있음을 보여 준다. 사람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고립의 감각을 자신의 삶에 익숙한 것으로 내면화해 왔다. 혼자 먹고, 혼자 일하고, 혼자 쉬는 삶은 이제 결핍이라기보다 하나의 생활 방식으로 받아들여진다. 개인의 자율성과 독립성은 현대 슬롯가 강하게 요청하는 가치가 되었다.
그러나 고립, 개인화, 홀로라는 가치는 인간 존재의 실제 조건을 끝까지 설명하지는 못한다. 인간의 삶은 역사 이전부터 늘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유지되어 왔기 때문이다. 어떤 개인도 순전히 자기 힘만으로 존재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고대 히브리인들의 문서인 창세기에서도 신은 인간이 ‘홀로 있는 것’을 좋지 않다고 판단한다. 인간이 혼자 있다는 사실을 하나의 결핍으로 이해한 것이다. 실제로도 인간은 홀로 있기를 원할 때조차 끝내 홀로만 살 수는 없다. 이처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인간이 인간으로 살아가는 가장 기본적인 슬롯적 조건이다.
물론 사람은 자신이 독립된 개체라는 의식 아래 홀로 서기를 갈망한다. 하지만 실제의 인간은 언제나 관계 속에서 생멸하는 존재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태어남은 타인의 돌봄을 전제하고, 언어의 습득 역시 타인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인간은 혼자 있다가 나중에 관계를 맺는 존재가 아니라, 이미 관계 속에 던져진 존재로 살아간다. 그런 점에서 함께는 선택 이전의 사건이며, 윤리 이전의 조건이다. 우리는 함께 살기로 결심하기 전에 이미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 태어난다.
그렇다면 질문은 조금 달라진다. 함께란 무엇인가를 묻는 일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더 중요한 것은 함께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이다. 함께는 단순한 동거나 병존을 뜻하지 않는다. 같은 공간을 점유한다고 해서 함께가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함께는 서로가 서로의 삶의 조건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서 시작된다. 타인의 기쁨과 불행, 안전과 붕괴, 말할 수 있음과 침묵이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자각이 없다면, 공동 존재는 겉으로만 이어진 피상적 공존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함께는 공존의 감각이면서 동시에 타인을 향한 적극적 배려의 문제다. 다시 말해, 함께는 공생과 공존의 감각이 외부로 드러난 실천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함께 살아야 한다는 도덕적 당위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함께를 가능하게 하고, 무엇이 그것을 가로막는지를 구체적으로 따져 묻는 일이다. 또한 ‘함께’라는 말은 흔히 개인적 친밀감이나 연대의 정서로 이해되지만, 실제로는 훨씬 더 복잡한 정치슬롯적 층위를 갖는다. 어떤 함께는 슬롯적 합의를 통해 서로를 살리는 삶의 방식이 되지만, 어떤 함께는 단지 누군가를 노골적으로 배제하지 않는 수준에 머물기도 한다. 어떤 공동체는 ‘함께’라는 이름 아래 따뜻한 언어를 말하면서도 특정한 사람들을 가장자리로 밀어낸다. ‘함께’를 배타적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이런 ‘함께’의 대표적 표현이 바로 ‘우리’다. 따라서 함께를 말한다는 것은 단순히 관계를 회복하자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누가 관계 안에 들어와 있고 누가 바깥에 놓여 있는지를 묻는 일이며, 필요하다면 배타적인 ‘우리’를 해체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함께는 개인과 개인의 만남을 넘어서는 더 넓은 실천이며, 처음부터 정치적이고 슬롯적인 문제다.
‘함께’는 왜 정치슬롯적 개념인가
‘함께’가 정치슬롯적 개념이 되는 이유는 분명하다. 함께는 개인의 호의나 친밀감만으로 유지되지 않기 때문이다. 누가 함께 살아갈 자격을 갖는지, 누가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는지, 누가 식탁에 앉아 같은 음식을 나눌 수 있는지, 누가 공론장에 참여해 자기주장을 펼치고 타인의 주장에 반론할 수 있는지는 개인적 선택을 넘어 규범과 제도의 문제에 속한다. 이런 점에서 함께는 각자가 자유롭게 선별할 수 있는 사적 산물이 아니라, 슬롯적 합의와 권력의 작동 속에서 배분되고 조정되는 삶의 형식이다.
특히 오늘의 슬롯에서 고립은 자연스러운 선택으로만 일어나기 어렵다. 그것은 노동과 빈곤, 차별과 배제, 돌봄의 붕괴, 불평등한 주거 구조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누구도 이런 조건을 자기 삶으로 끌어들이고 싶어 하지 않지만, 그것은 개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삶을 위협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공동체의 보호를 당연한 것으로 누리는 반면, 어떤 사람은 끊임없이 평가받고 심사를 견뎌야 하며, 때로는 배제의 위험 속에서 자기 소속의 자격을 스스로 입증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낮은 목소리로 말해도 크게 들리지만, 어떤 사람은 아무리 크게 외쳐도 끝내 들리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소속을 통해 보호와 혜택을 얻지만, 어떤 사람은 그 소속의 논리 때문에 끊임없이 바깥으로 밀려난다. 이런 조건 속에서 ‘함께’는 선한 의지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것은 공동체를 구성하는 자연스러운 조건인 동시에, 역설적으로 공동체 내부에서 배제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바로 이 점에서 함께는 개인 문제가 아니라 슬롯 공공적 문제가 된다.
한편, ‘함께’라는 말은 쉽게 오해되곤 한다. 그것을 곧 동일함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함께는 슬롯공동체 안에서 서로 균질적으로 같아지는 일이 아니다. 차이를 지운 채 하나로 묶이는 상태도 아니다. 오히려 함께의 핵심은 차이를 유지한 채 관계를 지속하는 데 있다. 타인을 나와 같은 존재로 환원하지 않으면서도, 그 다름 때문에 관계를 포기하지 않는 태도가 중요하다. 따라서 함께는 무조건적인 일치가 아니라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조율하려는 노력이며, 소유하려는 의지보다 존재 자체로 상대에게 응답하려는 태도에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함께의 중심에는 나와 타인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도, 나의 삶을 타인의 삶에 닿을 수 있도록 스스로 수정해 가는 내어줌이 있다. 그것은 타인을 내 질서 안에 편입시키는 일이 아니라, 타인의 삶 곁으로 다가가 보려는 실천이다.
이처럼 함께가 차이를 지운 통합이 아니라, 손상된 관계를 다시 조율하려는 삶의 형식이라면, 신약성서의 바울이 말한 ‘화목’은 이를 해석하는 중요한 언어가 된다. 바울이 로마의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특히 강조한 화목은 흔히 내면의 평화나 종교적 화해의 정서로 축소되어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로마서』 5장에 따르면, 화목은 단지 정서적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슬롯적으로 깨진 관계를 먼저 가로질러 상대를 인정하고, 닫힌 관계를 다시 공동체적으로 열어 가려는 회복의 사건이다. 바울은 화목의 기원을 인간의 준비나 자격이 아니라, 연약할 때, 죄인일 때, 원수 되었을 때 먼저 다가온 신의 공공적 행위에서 찾는다. 그런 점에서 화목은 결과라기보다 시작이며, 감정보다 행위이고, 개인의 미덕이라기보다 공동의 삶을 다시 세우는 실천에 가깝다.
이렇게 보면 화목은 신학적 개념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함께’라는 말이 지닌 정치슬롯적 성격을 집약하는 언어가 된다. 화목은 공동체의 구성원을 배제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손상된 관계를 다시 공동의 삶 안에 세우려는 실천의 이름이다. 다시 말해, 화목은 삶의 질서를 배제와 단절이 아니라 재구성과 회복의 방향으로 배열하려는 공동체적 프락시스다. 그런 의미에서 화목은 단지 종교적 화해를 뜻하는 말이 아니라, 사람들이 함께 만들어 가는 슬롯의 질서를 위해 공공적 행위를 도모하는 정치슬롯적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취약성, 애도, 언어: 함께의 인문학적 조건들
함께는 다음 세 가지 조건을 토대로 활성화된다. 첫째, 인간의 취약성이다. 함께는 강한 존재들 사이의 단단하고도 폐쇄적인 결속 속에서 완성되지 않는다. 오히려 취약한 존재들 사이에서, 느슨하지만 필연적인 상호의존 속에서 훨씬 더 또렷하게 실현된다. 인간은 스스로 자율을 욕망하고, 가능한 한 독립적인 존재로 살아가고자 하지만, 실제의 삶은 결코 그 욕망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병들고, 서서히 늙고, 예기치 않게 상실하며, 결국은 누군가의 돌봄 없이는 끝까지 살아갈 수 없는 존재다. 그러므로 취약성은 인간의 일시적 결핍이나 우연한 약점이 아니라, 아주 근본적으로 인간 조건의 일부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함께는 자율적인 개인들이 나중에 선택적으로 맺는 계약이라기보다, 취약한 존재들이 서로의 삶을 조심스럽게 기대고, 때로는 불완전하게 떠받치며 형성해 가는 관계의 구조에 훨씬 더 가깝다. 요컨대, 함께는 대체로 결속력을 통한 강함의 증명이라기보다, 오히려 연약함을 견디고 받아들이는 방식에서 더 실감 나게 입증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함께는 밝고 안정된 순간에만 확인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몹시 흔들릴 때, 서서히 무너질 때, 자기 힘만으로는 더는 버틸 수 없다고 느끼는 순간에, 서로를 견고하게 붙잡아 주는 애도의 힘으로 드러난다. 애도는 상실과 고통, 돌봄과 의존이 인간 삶의 주변적인 예외가 아니라, 어쩌면 삶의 중심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공감의 슬롯적 구조임을 보여 준다. 그런 점에서 애도는 공동체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방식일 뿐 아니라, 무너지는 삶을 천천히 대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이처럼 함께의 두 번째 요소인 애도는 공감의 가장 깊은 슬롯적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애도는 함께를 이루는 의미 있는 행동 방식이다. 누구의 죽음과 상실이 공적으로 애도될 수 있고, 누구의 고통은 끝내 사적인 불행으로만 처리되는가는 그 공동체의 윤리적 수준을 은밀하지만 분명하게 드러낸다. 함께는 살아 있는 자들 사이의 친교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또한 상실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무너진 삶을 어떤 이름으로 남겨 둘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검은 안식은 단지 어두운 정조나 우울한 감수성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공동체가 누구의 상처를 기억할 것인지, 누구의 붕괴를 역사 속에 남겨 둘 것인지를 끝내 묻는 기억의 정치학이다. 함께는 결국, 매우 적극적으로 잊지 않는 기억 저항의 방식으로도 실현된다.
한편, 애도라는 공감은 자주 말로 시작한다. 그리고 그 말은 때로 말없음까지도 포함한다. 침묵마저도 언어에 속하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위로, 고통을 말로 표현하거나 글로 써내는 일, 이런 일들은 모두 언어가 지닌 함께의 힘이다. 어떤 사람은 상처를 추스를 시간과 여유를 비교적 충분히 보장받지만, 어떤 사람은 다친 채로도 계속 살아내야 한다. 어떤 사람은 슬픔을 천천히 통과할 수 있지만, 어떤 사람은 생존의 압박 때문에 애도조차 뒤로 미뤄야 한다. 그러므로 언어는 그렇게 비켜나 있거나 비켜서게 된 사람들을 향해, 슬롯적 안식을 함께 나누자고 건네는 초대일 수 있다. 안식은 단순히 쉬게 한다는 사실을 넘어, 쉼을 자기 언어로 다시 써낼 수 있는 용기를 북돋는 슬롯적 치유의 행위이기도 하다.
이와 더불어, 함께는 언어의 차원에서도 다시, 그리고 훨씬 더 섬세하게 생각될 필요가 있다. 인간은 혼자 세계를 소유하지 않는다. 인간은 언제나 언어를 통해 세계를 함께 구성한다. 말한다는 것은 단지 자기 생각을 전달하는 일이 아니라, 타인과 더불어 하나의 세계를 조금씩 세우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공공적 번역은 종교 언어를 세속적 표현으로 단순히 치환하는 기술이 아니다. 그것은 서로 다른 삶의 자리들이 하나의 공통 세계를 가질 수 있도록 언어를 세심하게 조율하는 작업이다. 공공의 언어란 모두가 똑같은 말을 쓰는 상태가 아니라, 서로 다른 경험들이 무리하게 삭제되지 않은 채 서로에게 도달할 수 있도록 만드는 언어의 질서다. 함께는 공간의 공유만이 아니라 의미의 공유이며, 더 정확히 말하면 의미를 함께, 그리고 어렵게 만들어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공동체가 무너지는 자리는 대개 말이 사라지는 자리와 겹친다. 누군가는 말할 수 없고, 누군가는 말해도 제대로 들리지 않으며, 누군가는 처음부터 말할 자격이 없는 사람처럼 취급된다. 이때 함께를 회복한다는 것은 곧 언어의 불평등을 바로잡는 일과도 깊이 연결된다. 누가 말할 수 있는가, 누가 해석할 수 있는가, 누가 자신의 경험을 공적 언어로 번역할 수 있는가를 묻지 않는 공동체는 결국, 반복적으로 배제의 구조를 재생산하게 된다. 그러므로 공공적 번역은 함께의 정치슬롯적 의미를 드러내는 핵심 실천이다. 그것은 내부의 언어를 외부의 바카라임으로 옮겨 놓는 작업이며, 보이지 않던 고통을 공적 가시성 속으로 천천히 밀어 올리는 과정이다. 말해질 수 없는 것을 말해지게 하고, 들리지 않던 삶을 끝내 들리게 하는 일, 바로 그 자리에서 함께는 비로소 공동의 현실이 된다.
이처럼 취약성과 애도, 그리고 언어의 위로를 함께 생각하다 보면, 함께는 자연스럽게 ‘검은 안식’이라는 말과 잇닿게 된다. 검은 안식이라는 의미에서 함께는 다른 누군가의 고통을 억지로 해결해 버리려는 의지가 아니다. 오히려 그 고통 곁에 함께 머물러 주고, 어깨를 기꺼이 기대어 주며, 지친 다리를 조용히 북돋우면서 끝내 그 시간을 함께 관통해 나가려는 삶의 저항적 태도에 가깝다. 또한 검은 안식은 상처가 이미 봉합되었다는 성급한 선언이 아니다. 그것은 아직 회복되지 않은 고통 곁에 조금 더 오래 머무는 시간이며, 쉽사리 밝은 화해의 언어로 덮을 수 없는 슬픔 앞에서 조용히 멈추어 서는 태도다. 공동체가 다소 서둘러 지나가려 했던 상실, 슬롯가 지나치게 사적인 문제로 축소해 버린 고통의 잔여를 다시 붙드는 일, 바로 그 일이 여기에 속한다. 그래서 검은 안식은 평온의 미학이라기보다 훨씬 더 깊은 차원의 기억 저항의 윤리라고 해야 한다. 그것은 고통을 삭제하지 않은 채 그 고통에 참여하는 일이고, 타인의 어둠을 외면하지 않은 채 죽음 같은 계곡을 끝까지 걸어가는 일이다. 그리고 그 길을 조심스럽게 의심하는 일이다.
‘함께’의 실천 형식: 내어줌, 받아들임, 놀이, 전쟁의 금지
이제 ‘함께’가 보다 구체적으로, 그리고 실제의 삶 속에서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려 한다. 내어줌, 받아들임, 놀이, 그리고 전쟁의 금지는 함께를 실현하는 네 가지 토대로 읽을 수 있다. 이 네 가지는 서로 분리된 덕목이라기보다, 함께라는 삶의 형식이 현실 속에서 스스로를 드러내는 서로 다른 얼굴들에 가깝다.
먼저 내어줌은 자기 안의 것을 꺼내놓는 행위이지만, 동시에 자기 중심성을 조금씩 비워 내는 일이기도 하다. 공동체 안에서 내어줌은 단순한 베풂이나 선의의 표현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누군가가 실제로 들어올 수 있도록 구조를 조정하고, 자리를 다시 배치하는 행위가 되어야 한다. 늘 같은 사람만 말하고, 늘 같은 방식만 정당한 것으로 인정되는 공동체에서는 내어줌이 실제로 일어나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내어줌은 타인에게 호의를 베푸는 일이 아니라, 타인이 존재할 자리를 현실 속에 마련하는 일이라고 해야 한다.
받아들임 역시 단순한 감정의 문제를 넘어선다. 그것은 누군가를 좋은 마음으로 맞이하는 태도만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누군가를 바깥에 세워 두던 규칙을 수정하고, 경계의 선을 다시 그어 보는 일에 더 가깝다. 함께 먹는다는 것은 가장 일상적인 일이지만, 동시에 가장 정치적인 장면이기도 하다. 누가 식탁에 앉는가, 누가 초대받는가, 누가 끝내 불편한 존재로 남겨지는가는 공동체의 구조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따라서 받아들임은 심성의 따뜻함이라기보다, 경계의 재조정이자 질서의 수정이라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
놀이는 자주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되지만, 실은 인간 존재를 도구화하지 않는 매우 드문 시간이다. 생산하지 않아도, 유용하지 않아도, 성과를 내지 않아도 존재가 그대로 긍정될 수 있다는 감각은 놀이 속에서 비로소 회복된다. 그렇기 때문에 놀이는 단순한 여흥이 아니라, 때로는 하나의 해방적 형식이 될 수 있다. 물론 모든 놀이가 곧바로 해방적인 것은 아니다. 어떤 놀이는 차별과 소비의 질서를 무심히 반복하기도 한다. 그러나 상처 입은 존재들이 다시 웃음을 배우고, 기능이 아니라 존재 자체로 서로를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이 가능하다면, 놀이는 분명 회복의 중요한 언어가 된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함께의 실천은 반드시 금지를 포함해야 한다. 함께가 포용과 환대의 미명 아래 스스로를 쉽게 미화하는 말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그것이 무엇을 거부하는지를 분명히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함께의 프락시스는 전쟁의 금지다. 이 문장은 단순한 평화주의의 표어가 아니다. 오히려 함께의 가장 낮고도 근본적인 조건을 가리킨다. 전쟁이 계속되는 곳에서는 함께가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전쟁은 관계를 파괴하고, 말의 자리를 끊고, 식탁을 무너뜨리며, 놀이와 안식을 함께 허물어뜨린다. 그러므로 전쟁은 함께의 반대말이라기보다, 함께를 구조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드는 체계라고 해야 한다.
한편 여기서 말하는 전쟁은 단순한 무력 충돌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삶의 조건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총체적 쟁탈의 형식이다. 고대 히브리어의 감각에서 보자면, 전쟁은 적대적 집단 간의 충돌에 그치지 않고, 양식의 쟁탈이 일어나는 터, 곧 생존을 둘러싼 공간의 파괴와 점유를 함께 가리킨다. 레헴이 양식을 뜻하고, 밀하마가 전쟁을 뜻한다는 사실은, 전쟁이 처음부터 먹고사는 문제, 곧 생존의 조건과 무관하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그런 점에서 전쟁은 결국 누군가의 삶의 양식을 빼앗는 행위이며, 그 결과 누군가는 먹고 누군가는 굶으며, 누군가는 머물고 누군가는 떠나야 하는 상태를 낳는다. 이때 전쟁의 본질은 살육 그 자체에만 있지 않다. 그것은 생존의 조건을 비대칭적으로 배분하고 박탈하는 데 있다.
이 의미를 조금 더 확장해 보면, 오늘날의 전쟁은 훨씬 더 일상적인 형태로 우리 곁에 나타난다. 노동의 불안정, 주거의 박탈, 돌봄의 붕괴, 차별과 배제의 제도는 모두 다른 얼굴을 한 전쟁이라 할 수 있다. 그것들은 총성이 들리지 않는 대신, 삶의 조건을 서서히 침식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어떤 사람은 안전한 방 안에서 미래를 계획할 수 있지만, 어떤 사람은 오늘 하루를 버티기 위해 자기 몸과 시간을 과잉으로 소모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공동체의 보호를 비교적 당연한 것으로 누리지만, 어떤 사람은 늘 심사받고 배제되며, 소속의 자격을 입증해야만 한다. 이때 전쟁은 비상사태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평시의 구조 속으로 조용히 스며든다. 무엇보다 전쟁은 국가와 국가 사이의 이기적, 무력적 대립이 아니다. 슬롯적 갈등으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보이는 전쟁보다 보이지 않는 전쟁이 난무하는 세상이다. 특히 인간의 내면에서 언제나 상대를 겨냥하여 무기를 쏘아 올릴 준비로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전쟁은 먼 나라의 아픔이 아니라 지금 나와 너 사이를 지배하는 슬픔이다.
이 네 가지는 겉으로 보면 서로 다른 덕목처럼 보이지만, 인문학적으로 들여다보면 모두 ‘함께’를 구성하는 핵심 행위들이다. 내어줌은 타인을 위한 공간을 만드는 행위이고, 받아들임은 경계를 다시 조정하는 행위이며, 놀이는 인간을 목적 없는 존재로 다시 환대하는 행위다. 그리고 전쟁의 금지는 서로의 삶의 조건을 내가 임의로 파괴하지 않겠다는 가장 최소한의 약속이다. 이 네 가지는 모두 인간을 경쟁하는 개체가 아니라 상호의존하는 존재로 이해할 때 비로소 의미가 분명해진다. 그런 점에서 함께는 감정적 친밀성의 부산물이 아니라, 삶의 조건을 공동으로 유지하려는 실천의 체계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식탁은 이 네 가지가 자연스럽게 만나는 상징적 장소다. 식탁은 양식을 나누는 곳이면서도, 누가 안으로 들어오고 누가 밖에 남겨지는가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자리다. 그것은 생존의 장소이면서 동시에 언어의 장소이고, 때로는 놀이와 기억의 장소이기도 하다. 전쟁이 식탁을 파괴한다면, 함께는 결국 식탁을 다시 차리는 일로도 이해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함께는 추상적인 이상이 아니라, 누가 먹고, 누가 쉬고, 누가 말하고, 누가 웃을 수 있는가를 둘러싼 가장 물질적이고도 구체적인 문제와 깊이 맞닿아 있다.
‘함께’의 정치슬롯적 의미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함께’의 정치슬롯적 의미는 더욱 분명해진다. 함께는 단순한 적대감의 해소가 아니라, 삶의 조건을 전쟁 상태로 몰아가는 구조에 대한 거부다. 그것은 관계의 회복일 뿐 아니라, 삶이 더는 쟁탈의 논리로만 조직되지 않게 만드는 다른 질서, 새로운 공동체성의 시작이다. 그것은 누군가의 생존이 타인의 결핍 위에 세워지는 체제를 정당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말과 자리, 양식과 시간을 다시 나누는 방향으로 공동의 삶을 재구성한다.
이 대목에서 화목은 다시 중요해진다. 화목을 슬롯적으로 번역한다는 것은 그것을 추상적 화해의 언어로 순치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화목의 급진성을 드러내는 일이다. 화목은 배제를 중단하고, 점유를 나눔으로 바꾸며, 생존의 독점을 공동의 조건으로 전환하는 작업으로 읽혀야 한다. 그것은 제도 바깥의 사람을 다시 공동의 언어 안으로 들이는 일이고, 말할 수 없던 사람에게 발화의 자리를 돌려주는 일이며, 보이지 않던 고통을 공적 가시성 속으로 옮겨 오는 일이다. 이때 화목은 종교적 미덕이 아니라 슬롯적 재배치의 문법이 된다.
검은 안식 또한 여기서 새로운 밀도를 얻는다. 검은 안식은 전쟁이 남긴 흔적 위에서 가능해지는 쉼이다. 그것은 이미 평화가 도래했다고 선언하는 상태가 아니라, 여전히 지속되는 전쟁의 폭풍을 함께 인식하면서 그 폭력에 저항하며 온몸으로 감내하려는 감각이다. 검은 안식은 무사함의 감각이 아니라, 무사하지 못한 이들의 삶을 기억하는 방식이다. 그것은 평온을 누리는 자의 안락한 휴식이 아니라, 아직 쉬지 못하는 자의 어둠을 공동의 기억 안에 붙들어 두는 일이다. 그러므로 검은 안식은 비폭력의 감정이 아니라, 전쟁의 구조를 다시는 반복하지 않겠다는 실천적 멈춤에 가깝다.
결국 함께는 인간을 바라보는 하나의 인문학적 관점이기도 하다. 인간을 독립성과 성취의 관점에서만 이해할 때, 함께는 선택 가능한 부가적 가치로 밀려난다. 그러나 인간을 상호의존, 취약성, 언어, 돌봄, 애도의 존재로 이해할 때, 함께는 그저 선택 사항이 아니라 인간 삶의 기본 구조로 치환된다. 이때 윤리란 고립된 주체의 선한 의지가 아니라, 이미 서로 얽혀 있는 삶을 어떻게 덜 폭력적으로 조직할 것인가의 문제로 확장된다. 정치 역시 권력의 경쟁만이 아니라, 함께의 조건을 누구에게까지 보장할 것인가의 문제로 다시 개인의 삶으로 심화된다.
이 지점에서 공공신학, 해방신학, 정치신학은 서로 맞닿아있다. 특히 신학은 개인 내면의 구원만으로 충분할 수 없다. 구원은 공적 삶의 조건과 만나야 하며, 해방은 배제된 자의 시선에서 슬롯를 다시 읽는 일이 되어야 한다. 이제 구원은 고립으로부터 벗어남으로 다시 번역되어야 한다. 정치성은 당파적 선택 이전에, 인간의 삶이 언제나 권력과 분배, 인정과 배제의 구조 속에서 조직된다는 사실을 승인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러므로 ‘함께’에 대한 성찰은 슬롯 윤리의 출발점으로 유익하지만, 거기서 멈출 수는 없다. 그것은 공공의 장으로 더 나아가야 하고, 관계의 문제를 제도와 역사, 권력의 문제와 연결해야 한다.
결국 ‘함께’라는 말은 가장 사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가장 공적인 단어 가운데 하나다. 그것은 사랑을 말하면서 동시에 정의를 요구하고, 친밀함을 말하면서 동시에 배제의 구조를 비판한다. 함께는 다정함의 언어이기 이전에, 고립을 방치하지 않겠다는 결단의 언어다. 이때 화목은 손상된 관계를 다시 회복하는 사건이 되고, 검은 안식은 지워진 고통을 다시 기억하려는 저항의 윤리가 된다. 공공적 번역은 내부의 신념을 외부의 바카라임으로 건너가게 하는 통로가 된다. 이 세 개념은 병렬적인 나열에 머무르지 않는다. 오히려 ‘함께’의 정치슬롯적 의미를 비로소 깊이 있게 해석하게 만드는 서로 다른 사유의 장치들이다.
사람은 무엇으로 함께 사는가. 이 질문에 단 하나의 정답이 있을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참된 함께는 언제나 누군가의 고립을 끝내는 방향에서만 비로소 성립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누군가를 공동체 안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는 힘이다. 누군가의 침묵이 끝내 말이 되게 하며, 누군가의 어둠이 그를 홀로 감당해야 할 밤에 남겨두지 않도록 붙들어 주는 사랑의 실천이다. 그런 점에서 함께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하나의 형식적 미학이며, 일시적인 태도에 그치지 않는 미학적 무의식이기도 하다. 이처럼 ‘함께’는 단순한 미덕이나 추상적인 이상으로 머무를 수 없다. 그것은 삶의 조건을 둘러싸고 끝없이 조직되는 배제와 고립, 상실과 침묵에 맞서, 공동의 삶을 다시 가능하게 하려는 가장 정치적이고도 슬롯적인 말 가운데 하나다.
결론적으로, 전쟁은 누군가의 삶을 고립으로 몰아가는 사건의 지평선이다. 그 지평선 너머로 누군가 사라지기 전에 우리가 함께 지금-여기에 식탁을 차려야 한다. 나는 이 식탁의 이름을 '대동'이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