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카시 「기도」 해설
배경
속절없이 꽃잎이 진다. 전날 비와 바람이 한꺼번에 몰려왔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그저 시간이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피는 일에도 때가 있듯, 지는 일에도 때가 있는 법이다. 비에 쓸려 쏟아진 벚꽃 잎이 눈처럼 길 위를 덮는다. 한꺼번에 피어난 꽃들은, 함께 피어난 만큼 함께 지고 싶었던 모양이다. 아마도 따로 오지 않았듯 따로 떠나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올해는 특히 비슷한 시기에 피고 진다. 어디선가 느닷없이 자신의 양식을 쟁취하려는 전쟁이 일어나 오래 묵은 전쟁과 뒤섞여 버린 이 시대에, 봄은 자기 시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또 한결같이 함께 전진한다. 꽃도 공존의 삶을 자기 몸으로 지켜내는데, 정치는 꽃만도 못한 건가.
며칠 전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하천을 따라 길게 이어진 둑길을 걸었다. 물가를 내려다볼 수 있는 길옆으로 오래전부터 거기에 심긴 벚나무들이 있다. 얇지도 두텁지도 않은 옷을 입고 봄을 맞이하려는 사람들이 꽃 아래를 걷는다. 나무들도 반가운지 꽃잎을 흔든다. 묵묵하게 버텨냈던 겨울을 떨쳐 버리는 듯 팝콘 같은 꽃잎으로 축포를 틔우고 있었다.
꽃길은 벗-꽃길이기도 했다. 혼자 걷는 사람도 있었고, 둘이 나란히 걷는 사람도 있었고, 삼삼오오 웃음소리를 흘리며 지나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수양벚꽃은 늘어진 가지마다 부드러운 꽃숨을 매달고 바람이 스칠 때마다 가볍게 흔들렸다. 사람들은 그 아래에 멈춰서 사진을 찍으며 화사함을 붙잡으려 했다. 왕벚꽃도 아름다웠다. 둥글고 옹골찬 자태로 하늘을 향해 활짝 열려 있었다. 가지마다 달린 꽃송이들은 금세라도 넘칠 듯 고유한 생의 기운을 품고 있었다. 겹벚꽃은 포근하며 겸손한 꽃이다. 짙은 분홍색으로 치장하고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향해 다소곳하게 허리를 숙인다. 그 모습 속에 담긴 조심스러움이 괜히 마음을 따뜻하게 했다.
나는 이 벚꽃 앞에 서면 작은 음악을 듣는 기분이 든다. 화려하기도 하고, 풍성하기도 하며, 느리게 흐르다가 빠르게 날리고, 눈에 바로 띄기도 하고 겨우 관찰해야 보이는 자리에 있기도 하고,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생명은 자기만의 리듬으로 차오르다가 결국 한 송이 꽃으로 자신을 증명해 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내 마음의 시선은 다른 곳으로 기울어졌다. 만개한 꽃 풍경 너머 거친 나무 몸통을 뚫고 불쑥 솟아난 이른바 ‘몸통꽃’이다. 처음 그 꽃을 보았을 때 신기했고 놀라웠다. 나무의 몸통에서, 그것도 단단하고 거친 수피를 가르고 당차게 핀다. 그 꽃은 마치 나무의 비밀이 세상으로 불쑥 튀어나온 것 같았다. 허리를 굽혀야만 만날 수 있는 꽃도 있다. 나무의 뿌리에서 피었기 때문이다. 거의 땅과 맞닿은 자리에 자리 잡은 그 작은 생명을 보고 있으면 괜히 몸 안에 생기가 돈다. 겨우내 한참 웅크리고 있다가 어느 날 끝내 자신을 밀어 올리고, 거친 껍질 틈을 헤치고 싹을 낸 것이 분명하다. 꽃을 피워내는 그 힘은 겨울을 밀어내며 다가오는 봄날의 기운처럼 느껴졌다. 작지만 묘하게 웅장하다.
내가 그 몸통꽃 앞에서 자꾸 마음이 기우는 이유는, 그 꽃이 내 안의 어떤 감각과 닮았기 때문일 것이다. 내 안에서 오래 숨죽이고 있던 ‘희망’이라는 말이 그렇다. 나의 희망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오래 버틴 끝에 겨우 드러나는 힘이다. 가장 낮고 거친 자리에서도 끝내 피어나고 마는 생의 고집에 더 가깝다. 그래서 몸통꽃을 만나는 날이면 나는 묵혀두었던 ‘희망’이라는 단어를 꺼내 길을 걸으며 기도한다.
그날도 나는 다시 몸통꽃을 만났다. 반가운 마음에 다가가 사진을 찍으려다가 손을 거뒀다. 대신 한참 그 꽃을 바라보았다. 하얗고 붉은색이 번진 꽃잎에 둘러싸인 노란 꽃술이 평안해 보인다. 꽃은 여전히 작고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말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사진을 찍으려 보니 그 꽃 앞에 굵고 거친 뿌리가 꽃을 가로막고 있었다. 나와 꽃 사이를 일부러 갈라놓으려는 듯, 시선을 방해했다. 그런데 오히려 그 거친 줄기가 말을 건다. 움직이지 않고 그 앞에서 오래 머뭇거렸다.
그 뿌리는 단순히 시야를 가리는 방해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꽃을 너무 쉽게, 너무 익숙하게 보고 있는 것 같다는 충고를 들려주는 것 같았다. 무슨 이유인지 나는 그 말을 피해 가지 않았다. 그냥 그 가로막힘을 그대로 둔 채 꽃을 바라보았다. 그때, 보이지 않던 꽃의 모습이 눈에 보였다. 가려짐은 결핍이 아니었다. 새로운 시선을 열어주는 문이었다.
그렇게 나와 꽃 사이에 놓인 거친 뿌리 덕분에, 익숙했던 그 꽃이 새롭게 보였다. 그제야 나는 카메라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서두르지 않았다. 꽃에 조금씩 다가갔다. 봄날의 파란 하늘은 조명처럼 맑고 환하게 빛내주었다. 그 아래에서 몸통꽃을 사진에 담았다. 찍은 사진을 다시 열어보니 조금 어두웠다. 분명 환한 낮에 찍었는데 마치 막 해가 지는 듯한 어둠이 스며 있었다.
그런데 그 어둠이 오히려 꽃을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꽃이 견뎌왔을 낮고 어두운 시간, 거칠고 단단한 몸통 속에서 오래 밀어 올렸을 생의 미세한 힘이 몸을 찌르듯 밀려왔다. 결국, 나는 꽃의 어둠을 찍은 것이다. 가려진 자리에서 비로소 꽃을 제대로 본 것이다. 꽃을 보고 있자니 어둠 속에서 어둠과 함께 자신을 피워내는 것, 그것이 ‘희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희망은 나를 그것으로 미세하게 기울어지도록 가볍게 밀어주는 어떤 것이다. 그 보이지 않는 밀어줌은 내 몸 안에서 몸통꽃 같은 흔적으로 몸의 외피 사이로 드러난다.
사진
이 디카시의 사진은 무엇보다 꽃의 높이와 나의 눈높이를 맞추는 것이 특징이다. 올려볼 꽃이 가득한 산바카라길에서 아래에 핀 꽃을 향해 몸을 숙여 가까이 들여다본 것은 이 작은 존재와 나의 시선을 나란히 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몸을 낮춘 채 천천히 가까이 다가가 꽃을 초점화했다. 내가 이 꽃을 찍고 싶었던 것은 이 꽃이 나무에 가려 반쯤 보였기 때문이다. 전체가 또렷하게 파악되는 사물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겹쳐지고, 가려지고, 어딘가 분절된 듯한 이미지였다. 그런데 나는 그 순간 다른 꽃을 대할 때와는 다른 미묘한 감각을 경험했다.
사진 속에는 검푸른 바탕 위로 희미한 나무의 줄기와 뿌리로 이어지는 장면이 먼저 놓여 있고, 그 뒤편에는 마치 담벼락 너머를 살짝 내다보듯 꽃잎이 반쯤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꽃을 환하게 전면에 드러내기보다, 나무의 결을 앞에 두고 꽃잎을 그 뒤에 두어 찍은 것은, 내 눈앞의 장면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려는 의도라기보다 그것을 ‘차단과 중첩’의 이미지로 만들고자 했기 때문이다. 사진은 보통 대상을 분명하게 보여주기 위해 초점을 모으지만, 이 사진에서 나는 오히려 분명히 보이지 않음으로써 더 오래 바라보게 된다는 것을 적용하고 싶었다.
이 사진에서 나에게 특별하게 다가온 다른 것은 색(色)이었다. 화면을 지배하는 색은 완전한 검정이 아니다. 검정이 스며든 짙은 고동빛, 혹은 검푸른 어둠에 가깝다. 검정은 흔히 단순한 부재의 색으로 읽히지만, 내게 검정은 오히려 수많은 색이 오래 응축되고 뒤섞인 끝에 가까스로 남는 농도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사진의 왼쪽 아래, 나무에 배어 있는 검은 고동빛은 단순한 어둠이 아니라 뿌리와 줄기의 견고함, 그리고 결코 비어 있지 않은 시간의 무게를 상징한다. 거의 썩어가는 듯 보이는 검은 뿌리와 줄기조차 내게는 소멸의 징후라기보다 오랜 세월이 농축된 흔적으로 읽혔다. 나는 이 사진에서 가볍고 투명한 세계가 아니라, 어둡고 둔탁하며 쉽게 열리지 않는 세계를 먼저 본 셈이다.
사진 아래쪽에 수평으로 길게 누운 나무줄기는 마치 하나의 경계선처럼 화면을 가로지른다. 그 선은 담벼락 같기도 하고, 문턱 같기도 하다. 그 하나의 줄기로 인해 사진 속 공간은 자연스럽게 나뉘고, 분할되고, 막히고, 구조화된다. 나는 뒤늦게 이 수평의 막힘이 단순한 구도가 아니라, 어떤 시선의 결을 말해주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꽃을 향해 곧장 다가가려는 내 시선을 한 번 멈춰 세우고, 우회하게 하며, 머뭇거리게 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이 나무줄기는 단순히 꽃의 배경이 아니라, 꽃을 정면으로 보는 것을 지연시키는 장치였다.
그에 비해 나무 뒤에 놓인 꽃은 하얗고 가볍게 보인다. 꽃송이는 하나뿐이라 쓸쓸해 보였다. 모양 또한 화면에 반쯤 걸쳐 있어 완전한 형상을 드러내지 않는다. 마치 어떤 안쪽에서 바깥을 빼꼼 내다보는 듯한 모습이다. 그 작고 반쯤 가려진 형상 때문에 꽃은 더욱 여리고 조심스러운 존재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여림 속에도 중심은 분명했다. 꽃의 한가운데에는 붉은 기운 위로 노란 꽃술이 가득 차 있다. 그 색감은 봄의 따뜻함을 물씬 풍긴다. 하지만, 가늘고 여린 꽃술은 따뜻함이 오래갈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꽃은 단단히 고정된 것이 아니라 미세하게 흔들렸다.
결국, 이 사진은 하얗고 여린 꽃잎을 중심에 두면서도, 그 아래 검고 거칠고 오래된 나뭇가지가 그 시선을 가로막으며 누워 있는 장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가 하나를 가리고 있고, 또 하나는 그 가리움 너머를 내다보려 애쓰는 것처럼 보인다. 이 두 존재가 서로를 완전히 지우지 않으면서도, 서로의 앞을 막고 기대는 방식으로 한 화면 안에 놓여 있다. 이 때문에 사진은 어느 하나를 완전히 드러내지 않는다. 사진 속에서 꽃은 부분만 보이고, 나무는 흐릿하게 물러서 있다. 어느 하나도 그 이미지가 전체를 선명하게 채우지 못했기에, 시선은 자꾸만 꽃과 나무 사이를 오간다. 분명히 본 듯하면서도, 선뜻 단정할 수 없는 상태만 남는다.
나는 바로 그 불완전한 가시성에서 나는 이 사진의 미학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그저 몸통꽃을 찍었다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다시 사진을 열어보았을 때 내가 의도하지 않았던 어떤 것이 이미 사진 안에 들어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가로막힌 실체가 ‘보지 못하는’ 상태이면서 동시에 그 시선이 불가항력으로 무엇인가에 의해 ‘가려짐’이었다. 그러나 그 가려짐이 결핍으로 끝나지 않았다. 차단과 불투명성 속에서도 여전히 당당하게 남아 있는 감각,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어떤 기대를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이 사진은 내게 낯설게 하기의 새로운 예가 되었다. 분명히 해마다 봄이 오면 만나는 그 벚꽃을 찍었지만, 사진에 담긴 그 꽃은 마치 처음 만나는 것 같이 낯설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뿌리에서 솟구쳐 몸통꽃을 둘러싼 색의 대조가 그렇다. 사진에는 화려하고 밝게 피었으나 실제로 그 밝음은 어둠에 묻혔고, 꽃의 시선도 나무에 막혔다. 하지만, 그런 중에서 이 작은 꽃은 자신을 가로막은 그 너머에서 무엇인가 자신을 보고 있을 수 있다는 희망의 시선을 버리지 않았다. 그래서 자기 몸을 담 너머로 끌어올려 바깥세상으로 몸을 기울이는 듯했다. 그래서 이 사진에는 막힌 세계에서도 무엇이 자신을 봐주고 있는지를 궁금해하며 자기 스스로를 바깥으로 드러내는 미세한 힘이 스며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사진에서 듣게 된 그 의미를 시어로 옮겼다. 사진의 오른쪽에 분홍빛 글자로 새겨 넣었다. 시어는 사진을 설명하기 위해 덧붙여진 것이 아니라, 사진이 미처 다 말하지 못한 감각의 안쪽을 따라가며 그 보이지 않는 운동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다. 다시 말해 이 디카시에서 사진은 시어를 만나 마치 몸통꽃처럼 나무의 피부를 뚫고 세계로 나오게 되었다.
시어
디카시에서 시어는 사진과 한 운명이다. 사진과 시어는 서로 조화되어야 하고, 서로를 비추어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시어는 단순한 설명의 문장이 아니라 철저히 문학적 장치로 의도되어야 한다. 형식으로서 사진과 시어는 서로의 의미를 치환하고, 확장하며, 심화한다. 사진이 먼저 어떤 감각의 장면을 열어 보인다면, 시어는 그 장면 안에 잠겨 있던 내면의 떨림과 사유를 밖으로 불러낸다. 이 디카시에서도 시어는 사진의 곁에 덧붙은 것이 아니라, 사진이 끝내 다 말하지 못한 감각의 안쪽을 받아 적는 방식으로 놓여 있다.
먼저 “나를 가린 / 저 무거운 벽”은 몸통꽃의 의인화다. 따라서 이 시는 꽃의 자기 인식이 전체 분위기를 이끌어간다. 매우 단순한 표현 같지만, 그만큼 압축적이기도 하다. 지금 꽃은 어떤 ‘벽’과 대면하고 있다. 그런데 이 관계는 평온하지 않다. 나는 그 긴장을 두 개의 언어로 표현하고자 했다. 하나는 ‘가린’이고, 다른 하나는 ‘무거운’이다. ‘가린’은 시선의 차단을, ‘무거운’은 감각의 압박을 드러낸다. 시선과 느낌이 동시에 막혀 있는 상태, 바로 그 단절의 감각이 이 첫 구절에 담겨 있다.
여기서 “벽”은 단순한 장애물이 아니다. 그것은 꽃 앞에 놓인 하나의 사물이면서도, 동시에 꽃의 존재를 은폐하고 차단하는 장치다. 꽃은 단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가려진 상태에 놓여 있다. 특히 ‘무거운’이라는 형용사는 꽃을 누르는 압력의 강도를 표현한다. 사진 속에서 나무줄기와 뿌리는 꽃 앞에 놓여 있다. 그런데 내 눈에 그 놓임은 단지 꽃의 바깥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꽃의 내면까지 파고드는 것처럼 보였다. 가벼운 꽃잎을 무겁게 누르고, 시선을 붙들어두는 외적 힘처럼 느껴졌다. 꽃은 내면의 혼란 때문에 멈춘 것이 아니라, 바깥에서 가해지는 억압 앞에서 시선이 가로막힌 것이다.
이러한 외부의 힘을 드러내기 위해 나는 ‘저’라는 지시어를 택했다. ‘이 벽’이 아니라 ‘저 벽’이라고 말할 때, 벽은 분명하게 인식되면서도 절대로 친근하지 않은 자리에 놓인다. 그 대상은 내 앞에 있되 쉽게 닿을 수 없고, 가까이 있으면서도 이미 멀어진 것처럼 느껴진다. 이 거리감은 꽃과 나무줄기, 뿌리가 한 몸에 붙어 있으면서도 서로 조화롭지 못한 관계를 이루고 있음을 더 선명하게 한다. 특히 나무는 벽처럼 꽃의 시선을 가리며 존재한다. 함께 있으나 완전히 화합하지 못하는 상태, 바로 그 불균형이 이 첫 시어의 정조를 만든다.
이어지는 “너머”는 짧지만, 결정적인 단어다. 이 표현에는 꽃잎의 시선이 가리키는 방향과 영역이 함께 담겨 있다. 꽃은 자신을 가로막은 나무 그 너머를 내다본다. 디카시에서 시어는 때로 극도로 함축적이어야 하는데, 특히 앞뒤 구절이 대립적인 상황을 이루고 있을 때 그렇다. 이 시에서 앞선 구절이 ‘막힘’을 묘사했다면, “너머”는 그 막힘 속에서도 끝내 지워지지 않는 꽃의 의지를 담는다. 벽이 있다는 것은 동시에 벽 너머도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너머”는 차단이 완전한 해제된 것이 아님을 말해준다.
하지만 이 “너머”는 단순히 구체적 장소를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시선이 향하고 있는 가능성의 공간이다. 아직 닿지 못했으나 이미 감각과 사유가 그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영역, 볼 수 있을 듯하지만, 완전히 소유할 수는 없는 장소다. 낯설 수도 있고 익숙할 수도 있으나, 적어도 지금, 이 순간에는 아직 도달하지 못한 세계다. 그래서 나는 이 “너머”에서 희망의 전조를 감지한다. 이 한 단어는 막힌 세계의 끝이 아니라, 아직 열리지 않은, 가능성의 입구다.
이 시의 핵심은 “무엇이 / 나를 보고 있을까”에 있다. 이 표현을 읽을 때 특히 중요하게 보아야 할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보고 있는 주체가 ‘무엇’이라는 사물이라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이 문장이 단순한 정보의 질문이 아니라는 점이다. 강조하려는 것은 ‘무엇’보다도 ‘있을까’이다. 이 물음은 모르는 것을 알고 싶어 던지는 의문형의 질문이라기보다, 이미 어떤 가능성을 감지한 채 그것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수사적 물음에 가깝다. 그리고 그 대답은 부정이 아니라 긍정에 가까워진다. 곧, 그 너머에 무엇인가가 있다는 예감이 이미 꽃의 내면에서 작동하고 있다.
이로써 꽃의 시선은 한 번 더 방향을 바꾼다. 처음에 “너머”는 벽 건너편의 세계를 가리키는 듯 보였지만, 이 질문에 이르면 그 너머는 단지 바깥이 아니라 내면의 깊이와도 연결된다. 또한, 꽃은 더는 단순히 보는 주체가 아니다. 오히려 어떤 알 수 없는 시선 앞에 놓인, ‘보여지는’ 존재가 된다. 이 순간 주체와 객체의 위치가 뒤집힌다. 꽃은 자신이 대상을 바라본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누군가 혹은 무엇인가의 응시 앞에 놓여 있는 존재였음을 깨닫기 시작한다.
이 전환은 몇 가지 중요한 효과를 낳는다. 먼저, 꽃의 존재가 낯설어진다. 꽃은 더는 스스로를 안정적으로 인식하는 주체가 아니라, 타자의 시선에 노출된 존재가 된다. 다시 말해, 꽃은 세계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조차 낯선 존재가 된다. 다음으로, 이 수사적 질문에는 불안이 스며 있다. ‘무엇’은 불특정한 대상이기 때문이다.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 존재가 나를 ‘본다’는 것은 때로 위협일 수도 있고, 때로는 구원의 징후일 수도 있다. 따라서 이 질문 안에는 두려움과 기대가 함께 놓여 있다. 그러나 이 시의 결은 분명 두려움보다는 기대 쪽으로 미세하게 기울어진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전환이 희망의 구조와 이어진다는 점이다. 여기서 희망은 내가 손에 쥐는 것이 아니라, 어떤 가능성이 이미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보지 못해도 이미 나를 보고 있고, 손에 잡히지 않아도 내 몸을 그것으로 기울어지게 하는 어떤 힘. 그것은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작용하는 ‘의식의 중력’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희망은 내가 전적으로 주도하는 결과가 아니라, 나와 나의 바깥이 만들어내는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가려진 / 나에게도”에 이르면 시선은 다시 한번 ‘나’에게로 되돌아온다. 여전히 ‘가려진’ 존재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에서 가려짐은 처음과는 결이 다르다. 처음의 “나를 가린”이 나무라는 외적 조건을 가리켰다면, 이제 이 가려짐은 꽃 자신에 대한 인식의 층위까지 깊어진다. 꽃은 자신이 가려져 있다는 사실을 다시는 외부의 탓으로만 돌리지 않는다. 저 너머의 ‘무엇’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감각 속에서, 꽃은 비로소 자기 자신 또한 가려진 존재임을 인정하게 된다. 이때 시의 어조는 낮고 조용하다. 꽃이 서 있는 세계는 닫혀 있는 듯 보이지만, 나무 너머의 세계는 오히려 무한히 열려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이 인정이 절망으로 흐르지 않게 배치했다는 점이다. 꽃은 가려졌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도, 억지로 극복하려 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수용한다. 자신은 나무라는 벽에 의해 가려진 존재이면서 동시에, 아직 충분히 열리지 못한 자기 자신에 의해 가려진 존재이기도 하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희망의 단서가 나타난다. 이어지는 조사 “-에게도”는 의도된 문법이다. 이 “도”에는 배제되었던 자리에도 여전히 어떤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뜻이 스며 있다. 그러므로 “가려진 나에게도”라는 표현에는 자기 연민이나 위로를 넘어, 비록 미약할지라도 자기 실존에 대한 근원적인 긍정이 담긴다. 다시 말해 희망은 완전한 내가 선언하는 확신이 아니라, 가려지고 상처 입고 불완전한 나에게조차 도달하는 피동적 긍정이다.
마지막의 “너, / 희망”은 이 시어의 결론이자 반전이다. 여기서 나는 ‘명명’을 시도했다. 먼저 “너”라고 부르고, 그다음에 “희망”이라고 불렀다. 이 순서는 중요하다. 만약 처음부터 ‘희망이여’라고 말했다면, 시어는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방향으로 기울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너”를 먼저 부름으로써, 희망은 개념이 아니라 관계 속의 존재로 등장하게 된 것 같다. 여기에는 분명한 호흡의 멈춤이 있다. 나는 그 멈춤 뒤에 천천히 이름을 부른다. 그 순간, 보이지 않던 것은 하나의 존재가 되고, 꽃은 그 존재와 마주 선다.
이때 “나-너”의 관계가 형성된다. 그것은 단지 문법적 구조가 아니라 존재론적 사건이다. 꽃은 누군가에게 불릴 때 비로소 더 또렷한 존재가 된다. 그리고 그 이름이 ‘희망’ 일 때, 그것은 단순히 시적인 명명이 아니라 시의 바깥으로 삐져나온 현실의 감각을 함께 품는다. “너, 희망”은 더는 추상명사가 아니다. 그것은 몸통꽃 자체를 가리키는 이름이 된다. 벽 너머의 세계에서 누군가를 마주 보듯 부른 다음, 그 존재를 “희망”이라 호명하는 순간, 꽃은 단순한 꽃이 아니라 희망의 형상을 띠게 된다.
따라서 이 시어에서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분명하다. 희망은 개념이 아니라 ‘나와 너’라는 관계 속에서 비로소 성립하는 타자의 얼굴이라는 점이다. 희망은 내가 소유하는 감정이 아니라, 나에게 말을 걸어오거나 나를 조심스럽게 불러주는 존재로 인해 비로소 감지되는 실체다. 그렇기에 희망은 언제나 완성된 답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여전히 낯설고, 완전히 이해되지 않지만, 그런데도 나를 그것으로 기울어지게 하는 힘으로 작동한다.
또한, 나는 이 마지막 구절에서 서술어를 생략했다. “너는 희망이다”라고 쓰지 않고, 단지 “너, 희망”이라고만 적었다. 이 생략은 의미를 열어두기 위한 것이다. 희망은 정의되기보다 호명될 때 살아난다. 실현 여부로 닫히지 않고, 열린 상태로 남는다. 그것은 빛의 세계에만 속한 것이 아니라, 검은 세계 안에서도 빛과 함께 걸어가게 하는 동력이다. 그러므로 이 시의 끝은 닫힐 수 없다. 희망을 품었는지, 이루었는지는 끝내 알 수 없다 해도 몸통꽃 자체가 이미 희망의 형상을 띠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희망은 결국 ‘너’라는 존재 자체다.
그러므로 이 시의 제목은 「기도」일 수밖에 없었다. 이 시는 어떤 극적인 사건이나 분명한 구원을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려짐과 멈춤의 상태에 놓인 존재가, 그 상태 그대로 세계를 향해 자신을 열어 보이는 순간을 담고 있다. 기도란 모든 것이 환히 드러난 자리에서 완성된 확신을 선언하는 일이 아니라, 아직 가려져 있고 아직 다 알지 못하는 자리에서 그런데도 누군가를 향해 조용히 자신을 기울이는 희망의 의식(ritual)이지 않은가.
의도-검은 안식의 시학으로 읽는 「기도」: 어둠 속에서 여전한 희망
봄은 흔히 화사한 계절로 기억된다. 꽃은 만개하고, 사람들은 그 아래를 걷고, 한 계절의 절정은 잠깐이나마 세상을 환하게 덮는다. 그러나 내가 실제로 마주해 온 봄은 늘 피어남만의 계절이 아니었다. 꽃은 피는 순간부터 이미 스러질 준비를 하고 있었고, 그 환한 생의 표면 아래에는 사라짐의 시간이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만개한 풍경을 바라보면서도 언제나 그 이면에 먼저 마음이 머물렀다. 눈부시게 피어난 것보다, 끝내 지고 마는 것. 활짝 열린 것보다, 아직 다 드러나지 않은 것. 나는 늘 그런 장면들 앞에서 더 오래 멈추었다.
벚꽃길을 걸을 때도 그랬다. 사람들은 가지 끝에 가득한 꽃을 올려다보며 웃었고, 하늘을 향해 열린 꽃 무더기 안에서 봄의 찬란함을 기꺼이 누리고 있었다. 그 풍경은 분명 아름다웠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내 시선은 자꾸 그 환한 군락의 바깥으로, 혹은 그 아래로 미끄러져 갔다. 내가 오래 바라보게 되는 것은 가지 끝의 풍경이 아니라, 나무 몸통을 뚫고 나오거나 뿌리 가까운 자리에서 간신히 피어나는 이른바 ‘몸통꽃’이었다. 그것은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있지 않았고, 가장 풍성한 모습으로 피어나지도 않았다. 오히려 거칠고 낮은 자리에서, 잘 보이지 않는 틈 속에서 어렵게 자신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그 꽃을 보며 늘 어떤 생의 자세를 떠올렸다. 충분히 환하지 못한 자리, 아름다움의 중심에서 한 걸음 비켜난 자리, 거칠고 단단한 껍질 속에서 오래 웅크리고 있다가 끝내 자신을 밀어 올리는 힘. 몸통꽃은 내게 단순한 식물의 한 형태가 아니라, 오래 눌려 있던 존재가 자신의 조용한 방식으로 끝내 표면 위로 떠오르는 사건처럼 보였다. 그래서 그 꽃을 바라보고 있으면, 내 안에서 오래 숨죽이고 있던 감각 하나가 함께 깨어나는 듯했다. 나는 그 감각의 이름을 ‘희망’이라고 부르고 싶었다. 그러나 그 희망은 흔히 떠올리는 밝고 낙관적인 표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것은 환하게 앞을 비추는 빛이라기보다, 어둡고 낮은 자리에서 끝내 사라지지 않고 버티다가 미세하게 고개를 드는 힘에 가까웠다.
사진을 찍던 날, 나와 그 꽃 사이에는 굵은 나무뿌리가 놓여 있었다. 처음에는 그것이 분명 방해처럼 느껴졌다. 시야를 막고, 구도를 흐리고, 꽃을 온전히 보여주지 못하게 만드는 장애물 같았다. 조금만 자리를 옮기면 더 쉽게, 더 깨끗하게 꽃을 담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나는 그 앞에서 쉬이 움직이지 못했다. 그 뿌리가 꽃을 가리는 동시에, 내가 꽃을 너무 쉽게 보지 못하도록 붙들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내가 이 사진에서 마주하고 있는 것은 단순한 꽃이 아니라, 가려짐 속에서 비로소 드러나는 어떤 감각이라는 것을. 그래서 나는 그 뿌리를 제거하지 않았다. 피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 방해를 그대로 둔 채 꽃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내 시선은 익숙한 방식으로 대상을 파악하려는 태도에서 조금씩 멀어졌다. 꽃은 더는 곧바로 이해되는 사물이 아니었고, 나는 그것을 한눈에 소유하듯 보는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보이지 않음은 결핍이 아니라, 다른 감각을 열어주는 문이 될 수 있었다. 바로 그때, 내게는 시클롭스키가 말한 낯설게 하기가 단지 이론이 아니라 하나의 체험으로 다가왔다.
우리는 보통 잘 본다는 것을 분명하게 본다는 뜻으로 이해한다. 밝을수록 더 잘 보이고, 가리지 않을수록 더 선명하게 파악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내가 이 작업을 통해 확인한 것은 전혀 다른 진실이었다. 때로는 가려짐이 시선을 열고, 방해가 감각을 깨우며, 어둠이 오히려 존재를 더 선명하게 드러낸다. 나와 꽃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뿌리는 단순한 장애물이 아니라, 내 시각의 습관을 늦추고 굴절시키는 장치였다. 그것은 대상을 즉각적으로 소비하지 못하게 만들었고, 내가 더 오래 바라보게 했으며, 익숙한 아름다움 너머의 낯선 생을 감지하도록 만들었다. 그렇게 이 사진은 꽃을 찍은 사진이면서도, 동시에 내가 꽃을 다시 보게 된 사건의 흔적이 되었다.
이 지점에서 나의 ‘기울어짐의 시학’은 자연스럽게 ‘검은 안식의 시학’과 맞닿는다. 내가 말하는 검은 안식은 단순히 어둠이나 절망의 정서가 아니다. 그것은 모든 것이 환히 드러나는 자리에서 벗어나, 존재가 오히려 자신을 더 깊이 느끼게 되는 침잠의 자리다. 밝은 곳에서 우리는 쉽게 사물을 보고 지나쳐 버린다. 그러나 가려진 자리, 어두운 자리, 막힌 자리에서는 시선이 곧바로 뻗어 나가지 못하는 대신 머무르게 된다. 그리고 바로 그 머무름 속에서, 존재는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이 디카시에서 “나를 가린 / 저 무거운 벽”은 그러한 안식의 역설적 시공간을 드러낸다. 벽은 흔히 타파해야 할 억압의 상징처럼 읽히지만, 내게 이 벽은 그 이상의 것이었다. 그것은 세속의 분주한 시력을 차단하고, 주체를 자기 자신의 심연으로 침잠하게 만드는 하나의 처소였다. 나는 이 벽을 단순히 부정하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그 벽이 있기에, 주체는 더는 바깥의 표면만을 좇지 않고 자기 안의 어둠과 마주할 수 있게 된다. 진정한 기도는 모든 것이 투명하게 열린 대낮의 광장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나를 가린 벽의 어둠 속에서, 내가 나의 불완전함과 피하지 않고 마주하는 자리에서 비로소 시작된다.
이때 어둠은 결핍이 아니라 감각의 다른 형식이 된다. 그것은 빛의 부재가 아니라, 빛으로는 다 볼 수 없었던 것을 비로소 느끼게 하는 농도다. 나는 이 디카시에서 희망을 바로 그 어둠 속에서 다시 생각하고 싶었다. 희망은 환하게 주어지는 답도 아니고, 누구에게나 동일한 모양으로 도래하는 축복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아직 이름 붙일 수 없는 채로, 어둠 속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어떤 시선처럼 다가온다. 분명히 느껴지지만, 아직 분명히 설명할 수 없는 것, 낯설지만 자꾸만 나를 그쪽으로 기울이게 하는 어떤 것. 나는 희망을 그렇게 느껴왔다.
그래서 이 시의 핵심 질문은 “무엇이 / 나를 보고 있을까”가 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 본다는 사실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보인다는 피동적 감각이다. 시선의 방향이 뒤집히는 이 순간, 주체는 세계를 장악하는 자가 아니라 어떤 알 수 없는 응시 앞에 놓인 존재가 된다. 이때 꽃은 단순한 꽃이 아니다. 가려져 있고, 흔들리고, 아직 충분히 열리지 못한 존재이면서도, 동시에 자신을 향해 오는 시선 앞에서 미세하게 방향을 바꾸기 시작하는 존재다. 나는 이 전환 속에서 희망의 본질을 보았다. 희망은 내가 손으로 붙들 때 생기는 것이 아니라,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이 나를 그쪽으로 가볍게 밀어주는 방식으로 먼저 시작된다. 그래서 시의 마지막에 나는 희망을 설명하지 않고 오히려 부르고 싶었다.
“너, 희망”
이 호명은 어떤 대상을 획득했다는 선언이 아니다. 그것은 여전히 낯설고 완전히 이해되지 않은 타자를 향해 조심스럽게 자신을 기울이는 행위다. 나는 여기서 “희망이여”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부르면 희망은 다시 하나의 추상명사, 하나의 관념으로 돌아가 버리기 때문이다. 대신 “너”를 먼저 부름으로써, 희망이 먼저 관계 속의 존재로 나타나기를 바랐다. 희망은 개념이기 이전에, 나에게 다가와 나를 불러주는 어떤 존재여야 했다. 그 부름 앞에서 비로소 나 또한 조금씩 기울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 작업을 통해 내가 붙잡고자 한 것은 희망의 완성된 형상이 아니라, 희망이 생겨나는 방식이었다. 나는 그것을 아주 미세한 운동으로 느낀다. 아직 분명하지 않지만 이미 시작된 방향의 변화, 확실히 붙잡을 수는 없지만, 분명히 내 몸을 움직이게 하는 조용한 힘. 그래서 나는 끝내 다시 한번 이렇게 말한다.
“희망은 나를 그것으로 미세하게 기울어지도록 가볍게 밀어주는 어떤 것이다.
그 보이지 않는 밀어줌은 내 몸 안에서 몸통꽃 같은 흔적으로 드러난다.”
이 문장은 단지 정의가 아니라 하나의 체험에 가깝다. 몸통꽃은 사진 속 대상이면서 동시에, 내 안에서 오랫동안 숨어 있다가 겨우 모습을 드러내는 감각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가려진 자리에서 비로소 보이기 시작하는 것, 어둠 속에서 어둠과 함께 자신을 밀어 올리는 것, 그리고 끝내 하나의 작고 연약한 꽃으로 세계 앞에 서게 되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희망이라 부른다.
한편, 「기도」는 어떤 극적인 구원이나 완결된 해답을 말하는 시가 아니다. 오히려 가려짐과 멈춤, 어둠과 낯섦의 한복판에서, 그런데도 세계를 향해 자신을 아주 미세하게 기울여보는 존재의 자세를 담고 있다. 이 시에서 기도는 무엇을 쟁취하는 행위가 아니라, 아직 다 알지 못하는 너머를 향해 조용히 자신을 열어두는 일이다. 그리고 나는 믿는다. 희망은 밝게 드러나는 방식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낯설게 다가오며, 우리를 다시 보게 만들고, 다시 머물게 하며, 마침내 아주 조금 다른 방향으로 살아가게 하는 방식으로 시작된다는 것을 나는 믿으려 한다.
정리
이 디카시 「기도」에서 의도한 문학적 성취가 얼마나 이루어졌는지는 아직 단정하기 이르지만, 적어도 몇 가지 지점에서 그 방향으로 스스로를 기울여보고자 했다. 무엇보다 이 디카시 「기도」가 이룬 문학적 성취를 AI는 이렇게 한 문장으로 정리해 준다.
*“희망을 결과가 아니라, 보이지 않게 나를 기울어지게 하는 운동으로 형상화한 시학”
이 문장에서 중요한 것은 희망을 결과가 아니라 발생의 형식으로 사유했다는 점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희망을 이미 도달한 상태나 완성된 구원의 이름으로 제시하지 않고, 가려짐과 멈춤, 불투명성 속에서 조용히 시작되는 미세한 기울어짐으로 포착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러한 생각을 배경, 사진, 시어, 의도의 전개 전반을 통해 일관되게 유지하려 했다.
먼저 배경에서 제시되는 봄은 단순한 만개의 계절이 아니다. 꽃은 피어나는 순간부터 이미 스러질 준비를 하고 있으며, 화사한 표면 아래에는 소멸의 시간이 동시에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는 안식은 만개한 풍경보다 그 이면에 놓인 장면들, 즉 쉽게 드러나지 않는 존재의 상태에 시선을 머물게 한다. 특히 몸통꽃이라는 대상은 이러한 시선의 방향을 집약한다. 그것은 화려한 자리에서 피어나는 꽃이 아니라, 낮고 거친 자리에서 간신히 모습을 드러내는 존재다. 이로써 이 디카시는 아름다움의 절정보다는, 존재가 자신을 드러내기까지 견뎌야 했던 시간과 압력, 그리고 그 속에서 발생하는 미세한 생의 운동에 주목했다.
사진은 이러한 인식을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핵심 장치로 작동한다. 이 작품의 사진은 재현보다 차단과 중첩의 방식에 가깝다. 꽃은 전면에 또렷하게 드러나지 않고, 나무줄기와 뿌리의 검고 거친 질감 뒤에 부분적으로 가려져 있다. 화면은 대상의 전체를 명료하게 보여주기보다 불완전한 가시성을 유지한다. 이로써 사진은 단순히 사물을 보여주는 기능을 넘어서, 인식이 즉각적으로 도달하지 못하는 상태를 드러낸다. 가려짐은 결핍이 아니라, 시선을 지연시키고 감각을 다시 조직하는 조건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이 사진은 꽃을 설명하는 이미지가 아니라, 가려짐과 불투명성 속에서 발생하는 인식의 상태를 시각적으로 재구성한 하나의 시적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시어는 이 시각적 장면 위에서 매우 절제된 방식으로 의미를 확장한다. “나를 가린 / 저 무거운 벽”에서 ‘벽’은 단순한 장애물이 아니라 존재를 둘러싼 불투명성의 구조로 기능한다. 그것은 외부 세계와의 단절을 의미하는 동시에, 주체가 자기 자신에게도 온전히 도달하지 못하는 상태를 드러낸다. 이어지는 “너머”는 이러한 단절의 반대편에 놓인 가능성의 방향을 암시한다. 벽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동시에 벽 너머의 공간을 전제하며, 이로써 차단은 완전한 종결이 아니라 잠정적인 상태로 전환한다.
이 시의 핵심은 “무엇이 / 나를 보고 있을까”라는 구절에 들어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선의 방향이 전복된다는 점이다. 주체는 세계를 바라보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어떤 알 수 없는 타자의 시선 앞에 놓인 존재로 전환된다. 이 전환은 익숙한 인식 구조를 해체하며, 주체를 낯선 위치로 이동시킨다. 이러한 낯설어짐은 시클롭스키가 말한 낯설게 하기의 효과와 맞닿는다. 이 디카시는 과장된 표현이나 수사 없이, 시선의 방향을 뒤집는 방식만으로 자동화된 인식을 중단시키고, 사유의 공간을 새롭게 연다.
동시에 이 질문은 불안과 기대를 함께 내포한다. ‘무엇’이라는 불특정 대상은 위협과 가능성을 동시에 지니며, 그 불확실성 자체가 시의 긴장을 형성한다. 이때 희망은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직 도달하지 않았지만 이미 작동하고 있는 가능성으로 나타난다. 이는 블로흐가 말한 ‘아직-아님’의 의식과도 연결된다. 희망은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 주체를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기울어지게 하는 운동의 형식으로 존재한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기도」는 희망을 보여주는 시가 아니라, 희망이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드러내는 시로 자리한다. 벽은 여전히 존재하고, 주체는 여전히 가려져 있다. 상황은 극적으로 변화하지 않는다. 그러나 시의 끝에 이르면 주체는 처음의 위치에 머물러 있지 않다. 그는 아주 미세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어떤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다.
이 점에서 이 작품의 가장 깊은 문학적 성취가 드러난다. 이 디카시는 거대한 서사나 극적인 전환을 통해 의미를 구성하지 않는다. 대신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미세한 변화, 절망과 확신 사이에서 발생하는 방향의 움직임을 정밀하게 포착한다. 희망은 도달한 상태가 아니라, 도달하기 이전에 이미 시작된 기울어짐이다.
형식적으로도 이 작품은 디카시의 특성을 효과적으로 구현한다. 사진과 시어는 분리되지 않고 서로를 증폭시키며, 시각적 가려짐과 언어적 절제가 결합하여 하나의 통합된 의미장을 형성한다. 이로써 디카시는 짧은 형식 안에서도 깊은 사유를 담아낼 수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이 디카시 「기도」는 가려짐 속에서도 관계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의지가 담긴 시다. 희망은 밝은 결과로 제시되지 않는다. 아직 오지 않았지만 이미 존재를 기울어지게 하는 힘으로 드러난다. 이 시는 그런 불완성의 희망을 해결하기보다 해결 이전에 발생하는 미세한 떨림에 그대로 두려는 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벽은 여전히 존재하고, 주체는 여전히 가려져 있다. 그러나 “너, 희망”이라는 호명이 나에게 닿는 순간, 내 안에서 세계는 더는 두렵고 불안한 대상이 아니다. 그 미세한 차이, 그 방향의 전환이 이 디카시의 가장 중요한 문학적 성취라고 나는 생각한다. “희망, 가려짐과 어둠 너머 몸을 기울이려는 용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