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송한 통역사의 글쓰기

지식이 공짜가 된 시대에 문과가 살아남는 법이 있을까

by캐롤

사실 나는 어디서 전공에 대한 말을 거의 하지 않는다. 문사철 전공이라는 자격지심 같은 건 아니다. 전공을 말할 일도 없을뿐더러, 거의 아는 게 없다고 느껴져서다.


한 10년 전쯤부터 TV 교양프로그램으로 세계사나 인문학을 쉽고 재미있게 풀이해 주는 콘텐츠가 많아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때 나는 내가 대학에서 학비를 지불하며 "학문"으로 배웠던 것들이 TV프로그램으로 얄팍하게 가공되어 나오는 것을 보면서 어이가 없었다. 내가 며칠 동안 바카라과 논문을 읽고 수업에서 토론하면서 배웠던 것들을 누군가는 방송국에서 쉽게 콘텐츠로 만든 것으로 향유한다는 상대적 박탈감에 더해, 인문학을 대중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만들기 때문에 오히려 더 인문학 전공자들에 대한 인식이 가벼워질 거라는 우려가 뒤섞인 감정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여러 문학 작품을 읽었던 것이 대학생 때 세상을 보는 눈을 크게 열어준 것 같다. 교양 과목으로 문학과 정치학, 세계사를 들으면서 모르고 지냈던 다른 나라의 역사를 접하게 되었고, 그 덕분에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형성한 것 같다. 그렇다고 영문학을 전공했다는 것이 자랑스럽기만 한 건 또 아니었다. 솔직히 내가 미국 사람이었으면 문학을 전공하는 것이 행복했을 것 같기도 하지만(아마 그러면 Creative Writing에 도전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냥 눈에 안 띄는, 그저 겨우겨우 바카라 읽어서 겨우겨우 수업 따라가는 학생일 뿐이었다.


당시에는 인종차별이라고 생각한 일도 많이 겪었다. 디스커션 시간이 되었을 때, 옆 파트너가 나랑 짝이 되어서 썩 내키지 않는 듯한 표정을 지을 때, 정확히 가운데 나만 두고 양옆에 앉은 애들이 자기 옆자리에 이미 짝이 있는 그룹에 끼어 3인 토론을 하고 있을 때, 말하지 않아도 표정과 눈빛과 듣는 태도에서 '네가 알면 얼마나 알겠니'라는 말이 들리는 듯했다. 원래 미국 생활은 기세인데, 나는 걔들이 그렇게 생각하든지 말든지-라고 생각하는 기세가 부족해서 전공 수업에 갈 때마다 스트레스에 체할 것만 같았다.


어느 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일 내가 한국의 어느 대학에서 국문과 학생인데, 국문과 전공 수업에, 이를테면 네팔에서 온 유학생이 있다. 나는 토론 시간에 그 학생과 짝이 되면 기쁠까? 나는 과제로 읽은 바카라에 대해 토론할 때, 그 학생이 하는 말을 정말 진심으로 경청할 자신이 있는가?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만일 외국인 유학생과 파트너가 된다면 겉으로는 짐짓 진지하게 듣는 노력을 보여주겠지만 속으로는 '우리 근현대사를 알기는 하나? XXX은 그 대목을 쓸 때 그런 의미를 담은 것 같지는 않은데, 너무 피상적으로 해석한 것 같네. 역시 외국인은 어쩔 수 없지.'라고 생각할 것 같았다.


역설적으로 이 생각을 한 뒤로부터는 수업을 가는 것이 덜 힘들어졌다. 어차피 나는 편견을 받을 수밖에 없는 유학생인 게 사실이었다. 영어가 모국어도 아니었고, 서구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었기에 같은 과 친구들보다 작품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는 게 당연했다. 저들이 나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은 타당한 편견이라는 걸 인지하자 도리어 편해진 것이다. 대신 열심히 작품을 읽었다. 도저히 디스커션에서 개소리를 시전하며 파트너의 조롱 섞인 코멘트를 듣고도 심지어 이해를 못 하는(?!) 끔찍한 일은 당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blue boo.jpg서술형 시험 답안지로 쓰이는 "블루 북"


요즘처럼 AI가 손쉽게 배경 설명과 문학 작품 해설을 뱉어내는 상황에서, 요즘 미국에서는 과제 대신 현장 지필이나 구술 평가로 회귀하는 대학들이 많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 자연스럽게 대학 시절 내내 애증의 존재였던 '블루북(Blue book)'이 떠오른다.


문사철 전공이었던 나는 대학 시절 시험을 볼 때 블루북을 정말 수없이 많이 썼다. 블루북은 대학에서 쓰는 서술형 시험용 노트였다. 대충 스테이플러로 간이 제본이 된 얇은 노트다. 종이 품질도 썩 양호하지는 않아서 평범한 미국 볼펜으로 글씨를 써도 뒤에 글씨가 비치는 그런 형편없는 노트였다. 시험날 강의실에 입장을 하면 조교가 앞에서 출석부에 본인 서명을 받고, 블루북과 시험지를 건네줬다. 그럼 강의실 구석에 앉아서 시험지의 서술형 질문에 대한 답을 블루북에 써서 나오는 것이었다.


시험은 보통 강의 시간과 동일했다. 강의가 90분짜리면 90분, 75분짜리면 75분이었다. 90분이면 시간이 정말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나같이 비루한 유학생에게는 90분 안에 2-3개의 서술형 문항에 조리 있게 답하는 데에 빠듯한 시간이었다. 게다가 쓰다가 중간에 논리의 오류를 깨달으면 몇 문장을 통째로 들어내야 하는 일도 생긴다. 깊은 자괴감에 빠지면서 수정테이프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신경질적으로 볼펜으로 박박 줄을 그어 지운다. 가끔은 내가 방금 썼으나 취소하려는 개소리를 조교가 읽는 것이 너무나 두렵기 때문에 촘촘하게 격자무늬, 물결무늬, 가로선 등 다양한 선의 종류로 개소리를 박박 지우다 저질 블루북 종이에 구멍을 뚫기도 했다.


감사하게도 나의 답변의 진정성과 절실함(...)을 조교는 참작하였는지, 그토록 고통받던 블루북 시험들에서 나는 생각보다 괜찮은 성적을 받았다. 그때는 몰랐다. 통대 입시를 준비할 때, 대학생 때 손목의 힘의 한계를 느껴가며 휘갈겨 쓰던 블루북 시험의 덕을 톡톡히 볼 줄은.


통역대학원 1차 시험은 바로 블루북 시험 같았다. 다만 블루북 대신 흔히 받는 시험지 규격의 종이 앞뒤로 답을 적어낸다는 점이 달랐다. 학원을 다니기 전에는 몰랐다. 지원자의 약 80%가 이 1차 서술형 시험에서 탈락한다는 것을. 그리고 내가 생존을 위해 허덕허덕 준비했던 문학 수업들이 자양분이 되어 거기서 쓰였을 줄은. 빨리 쓰는 것도, 결론을 내는 방법도 나 같은 슬로우 스타터에게는 다행일 정도로 미리 준비가 된 셈이었다.


문송함이란 감정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진 것은 꽤 최근에 와서다.


세상은 문과를 두고 돈 못 버는 전공이라며 '문송'이라는 꼬리표를 붙였지만, 지식이 발에 치이도록 흔해진 지금에 와서야 그 시절의 빚을 갚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10년 전에는 인문학을 가볍게 소비하는 TV가 미웠지만 오늘날의 인류는 지식이 공짜가 된 시대에 살고 있다. 그동안 내가 그토록 배우려고 애썼던 것들, 내가 잘하기 위해 수없이 연습했던 것들을 이제는 AI가 너무나 손쉽게 해주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내가 블루북에다 정신없이 서술형 답안을 갈겨쓰던 그때가 지금에 와서는 소중한 기억이 된 것 같다. 힘들게 지식을 머리에 집어넣던 때, 졸업 페이퍼를 쓰기 위해 하루에 12시간 넘도록 도서관에 처박혀 하루에 2-3페이지를 겨우 겨우 썼던 경험이 이제는 너무나 값진 경험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최근 어떤 인도 출신의 개발자 면접을 통역할 일이 있었다. 본인이 코딩을 하면서 왜 그렇게 풀어나가는지 이유를 설명하는 실기 면접이었다. 지원자는 자꾸만 "여기엔 이런 명령어를 넣고, 이 자리에는 이렇게 하면 이 코드가 나온다"는 둥, 코드를 짜는 게 아니라 자꾸 알맹이 없는 동문서답을 하면서 시간을 끌었다. 면접관은 " 코딩 다 마치고 나서 설명하시면 된다"라고 했지만 지원자는 아무래도 주어진 과제를 AI의 도움 없이 어떻게 해결하는지 갈피를 못 잡는 것 같았다. AI로 코드를 짠 지 너무 오래된 나머지, 자기 능력이 퇴화되어 버린 것이었다. 면접관은 짜증스러움을 표현하며 예정보다 20분 일찍 면접을 종료해 버렸다. 언제까지 결과를 알려주겠다는 말도 없이.


앞으로의 세상은 AI에게만 기대는 사람과, AI 없이도 본질을 보는 통찰이 있고, 스스로 결과물을 만들어낼 줄 아는 사람의 차이가 더 커질 것 같다.


부끄러워하며 이미 쓴 두어 줄을 펜으로 직직 긋던 날도, 바카라을 완전히 잘못 해석한 것 같으니 다시 읽어오라는 교수님의 말에 깊은 수치심을 느끼며 도서관에서 밤을 새우던 날들도 다 부질없는 짓은 아니었을 거라 믿는다. 지금 여기서 쓰는 글 역시 완벽한 것도 아니고 대단한 인기를 끄는 것도 아니지만, 온전히 내 생각의 힘으로 버텨내며 쓰는 일의 의미를 믿는다. 더디더라도 꿋꿋하게 내 몫의 글을 계속 써나가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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