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나는 어디 사람일까

Never enough for both: 정체성에 대한 고찰

by캐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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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생으로 미국에서 보낸 9년. 모든 것을 정리하고 완전히 귀국했을 때 나는 스물다섯 살이었다. 그 시점에는 내 삶에서의 가장 최근 1/3 이상을 미국에서 보낸 셈이었다. 이민을 가서 20년, 30년씩 살아온 사람들이 볼 때는 그리 긴 시간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타지 생활은 '얼마나 오래 살았는가' 만큼이나 '생애 주기의 어느 계절에 겪었는가'가 결정적인 요소 같다. 만약 대학교를 졸업하고 해외에 처음 나갔더라면 어땠을까? 혹은 서른이 넘어 해외 근무 기회로 처음 외국에 살게 되었다면, 성격이나 사고방식이 크게 바뀌었을까?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보곤 한다.


하지만 내 안의 경계인 기질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미국 이전에 경상북도 성주 출신인 우리 엄마의 삶을 먼저 마주하게 된다. 그 시절 교육열이 남달랐던 할아버지는 자식들을 서울에서 공부시키겠다고 결심했다. 5남매의 장녀였던 엄마와 두 살 터울의 이모를 먼저 서울로 급히 전학시켰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낯선 서울 땅에 중학생으로 덜컥 전학을 온 엄마에게 담임선생님은 교무실에서 진지하게 이렇게 당부했다고 한다.


"야야, 니 서울서 살라믄 사투리부터 빨리 고치래이."


선생님 본인 역시 사투리를 고치지 못해 서울살이에 설움(?)이 크셨던 걸까. 어쨌든 서울에서 만난 담임 선생님은 엄마에게 사투리로 사투리를 꼭 고치라고 신신당부하셨다.


그 덕분에 나는 태어날 때부터 일종의 이중언어 환경 속에서 정체성 혼란(?)을 겪으며 자랐다. 맞벌이 부모님 밑에서 나와 동생은 자연스럽게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외가에서 컸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계획대로 5남매를 모두 서울에서 대학까지 졸업시키셨지만 다시 대구로 돌아가지 않고 서울에 계속 터를 잡으셨다. 그리고 돌아가실 때까지 평생 이방인으로 서울에서 사시며 매일 삼성 라이온즈의 야구 경기를 챙겨 보셨다.


할아버지, 할머니 밑에서 투닥거리며 자란 어린 시절의 기억에는 따뜻함이나 상냥함 같은 건 딱히 없었다. 할머니는 주로 날카로운 호통과 면박을 담당하셨고, 할아버지는 과묵한 모니터링을 담당하셨다. 명절에 5남매와 그 가족들이 총집합하면 집안이 큰 소리로 왁자지껄했는데, 얼핏 들으면 꼭 어른들끼리 싸우는 것만 같았지만, 그들은 그저 평범하고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고 있었을 뿐이었다.(...)


서울에 살고 있지만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은 내가 '작은 대구'의 문을 여는 것이기도 했다. 완벽한 이중언어 구사자는 아니어도, 비유하자면 미국에서 태어난 한인 2세의 감각이 이렇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내 안에는 경상도 사람의 특성과 서울 사람의 특성이 기묘하게 공존하기 시작했다.




그 상태에서 미국으로 건너갔을 때, 내가 그곳에서 10년 가까이 머물게 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하루하루를 버티다 보니 대학에 진학했고, 졸업 후 한국에서 살지 미국에서 살지 뚜렷한 청사진을 그릴 겨를도 없이 시간이 흘렀다.


대학을 졸업할 무렵, 나는 인생의 40% 가까이를 미국에서 보낸 상태였다. 그때쯤 나는 내 정체성이 한국인일 수밖에 없으며, 결국 한국어가 편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정체성이 형성되는 10대 시절부터 해외에서 학교를 다니다 보면 필연적으로 스스로에게 묻는 순간이 온다.


'그래서 넌 누구지? 미국인? 교포? 아니면 미국인화되고 싶은 한국인?'


수줍음이 많았던 내게 자기 의견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미국 문화는 쉽지 않았다. 의견을 유창하게 표현할 만큼 영어가 완벽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다름을 존중하는 문화'만큼은 숨통이 트일 만큼 편안했다. 내가 학교에 후드티를 입고 가든 셔츠를 입고 가든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그 자유로움이 좋았다.


그렇게 편안하게 지내다 대학교에 들어갔을 때, 종종 인사하고 지내던 한 살 많은 한국인 선배가 어느 날 내게 불쑥 말했다. "너, 그렇게 위아래로 추리닝만 입고 다니면 남자들이 안 좋아해."


그 순간은 이후에도 내 기억 속에 이상한 말과 이상한 참견으로 남아 있지만, 한인 유학생이 많은 학교에서 한국인 집단에 들어갔을 때 처음으로 분명하게 느꼈던 것 같다. 나는 완전히 한국인도, 그렇다고 완전히 미국인도 아닌 혼종이 되어 있었다. 양쪽의 장단점을 어설프게 걸치고 있는 혼종. 마침 그때 인스타그램 피드에서 우연히 마주친 시 한 편이 내 시선을 그대로 묶어두었다.




Diaspora Blues


So

here you are,

too foreign for home,

too foreign for here.

Never enough for both.




서른이 넘어 한국으로 돌아와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는 지금도 가끔은 강한 공통분모로 뭉쳐 정보를 공유하는 한국의 집단주의를 마주할 때마다 숨이 막힐 때가 있다. 우리나라는 '정답의 나라'다. 정해진 시기에 정해진 퀘스트를 깨야 하고, 정답지에서 벗어난 삶은 곧 리스크로 간주된다. 정답지에 연연하지 않는 엄마는 소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생각이 없거나 유별난 마이웨이'로 치부되기도 한다.


미국에도, 한국에도 완벽히 들어맞지 않는 렌즈를 낀 채, 나는 끊임없이 같은 방향으로만 흘러가는 거대한 유수풀 안에서 혼자 멍하니 다른 곳을 바라보며 둥둥 떠다니는 기분을 느낀다.


여기에 미국 특유의 직설적인(straightforward) 사고방식과 어릴 적 외가에서 체득한 경상도식 화법이 결합하면서, 우리나라 특유의 완곡한 화법 앞에서 나는 종종 뚝딱거린다.


스크린샷 2026-08-14 오후 3.17.25.png출처: 스레드


얼마 전 인터넷에서 경상도 사람이 일할 때 "뭐 때문에 그러시는데요?"라고 묻는 건 시비를 거는 게 아니라 진짜 이유가 궁금해서 묻는 것이라는 글을 보고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서울에서 "아, 저는 이렇게 생각했었는데 혹시 아닐까요?"라고 부드러운 쿠션어를 깔 때, 내 안의 경상도와 미국은 일단 직구를 던진다. 내 딴에는 순수한 호기심이자 효율적인 소통인데, 상대는 종종 내 말투를 공격으로 받아들이곤 했다.


결국 내 정체성은 '혼종'이다. Too foreign for home, and yet too foreign for here. 완전히 미국인처럼 사고하지도, 그렇다고 완벽하게 한국인처럼 fit in 하지도 못하고 어딘가에 어색하게 서 있는 느낌.


어쩌면 나는 영원히 어느 쪽 세계에도 100% 온전히 안착하지 못하는 영원한 이방인일지도 모른다. 미국에서는 너무 한국인이었고, 한국에서는 지나치게 미국 물을 먹었으며, 서울에서는 너무 직구를 던지는 경상도인이었으니까.


양쪽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해 늘 한 발 떨어져 관찰해야 했던 그 결핍이 나를 두 언어와 정서를 연결하는 통역사의 길로 인도했는지도 모른다. 어디에도 완벽히 속하지 않는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양쪽 세계를 모두 한 발 물러서서 객관적으로 조명할 수 있는 특수한 시야를 가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니까.


여전히 집단주의의 미묘한 눈치 싸움은 피곤하고, 복잡한 완곡 화법 앞에서는 답답함을 느낀다. 그래도 이제는 더 이상 남들의 또래 문화나 표준 정답지에 억지로 'Fit in' 하려고 발버둥 칠 필요가 없는 어른이 되었다는 사실이 다행스럽다.


"Never enough for both."

그 어느 쪽도 100퍼센트가 아닌, 어쩌면 평생 혼종이자 통역사로서 내가 긍정하며 간직해야 할 가장 솔직한 '상태메시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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