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련이란 처음 보는 낯섦을 꾸준히 견디는 일

숙련에 대한 지극히 사적인 생각

by캐롤

어릴 때 나는 롤러블레이드를 즐겨 탔다. 지금 생각하면 참 민망한 모습이었겠지만 마트에 엄마가 장을 보러 가실 때 롤러블레이드를 타고 같이 동행했다. 그 해괴한 짓에는 나름 근거가 있었다. 오래전에 까르푸라는 마트가 있었는데, 거기 가면 직원들이 요리조리 롤러를 타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오? 마트에서 롤러를 타고 다닐 수 있단 걸 그때 알았다. 하여튼 나는 동네에서도 롤러블레이드 타고 다니는 걸로 유명했다. 처음에는 친구에게 배우면서 시작했는데, 나중에는 너무 많이 타게 되어서 묘기를 부리면서 타기도 했다. 과외 때문에 친구 집에 갈 때도 롤러블레이드를 타고 갔는데, 친구네는 5층짜리 저층 아파트라서 엘리베이터가 없었는데도 굳이 굳이 롤러를 타고 가서 계단으로 탕탕탕탕 올라갔으니까. 계단을 내려갈 때도 타당 타당 소리를 내며 내려가서 우연히 만나는 어른들은 위험해 보이는데 잘 탄다며 신기해하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통역은 여러 가지로 예체능과 비슷한 점이 많다. 일단 페이스 유지가 중요해서, 꾸준히 연습을 하고 감을 유지해야 한다.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무지막지하게 연습량을 늘려서 어떤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 연습도 내가 편한 컴포트 존 안에서만 하면 별 의미가 없다. 실전을 경험해봐야 한다. 예를 들면, 통역을 할 때는 아무리 내가 영어 공부를 열심히 했어도 말하는 사람 특유의 화법이나 논리를 전개하는 방식, 문장을 만드는 방식에 따라 변화무쌍하게 대처해 가며 통역할 수밖에 없다. 도처에 빌런이 깔린 복잡한 시내 이면도로를 운전하는 느낌과도 비슷하다. 즉, 어떤 틀대로 연습을 해봤자 결국 어떤 상대를 만나느냐에 따라 난이도가 극과 극을 오갈 수 있다는 거다.


야구도 그렇지 않던가. 타격감이 안 좋다고 밤새 T볼을 천 개씩 치며 맹연습을 한들, 당장 다음 날 안타가 터진다는 보장은 없다. 매일 낯선 투수와 새로운 구종을 상대해야 하는 타자처럼, 통역사 역시 연습실 밖으로 나오는 순간 저마다 다른 화법을 가진 수많은 '연사'라는 투수를 만나야 하니까.


요즘 통역을 하다 보면 5~6개월 전에는 진짜 눈앞이 캄캄해질 정도로 못 알아듣던 이야기들을 좀 알아듣고, 심지어는 어떤 말을 하려고 하는지 예측이 될 때도 있다. 종종 들어가는 한 회의는 유난히 말이 두서없고 좀 정리가 안 되는 분들이 있는 회의였다. 이 회의에 들어갈 때마다 들으면서 동시에 입으로 다른 언어를 말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너무 짜증 나는 순간이 많았다. 한마디로 의식의 흐름대로 말하다 보니까 이 말했다가, 저 말했다가 하는 거다. 듣는 입장에서는 이게 얼마나 정신이 없는지 모른다. 게다가 들으면서 다른 언어로 바꿔줘야 하는 상황이라면? 근데 그게 중요한 말이라 나의 외국어 통역에 의존해야만 회의를 따라갈 수 있는 사람이라면...? 갑자기 부담이 막 생기면서 땀이 나기 시작한다. 가장 좋은 건 연사가 하는 비즈니스에 내가 동기화되는 거다. 그 사람의 입장에서 뭐가 문제인지, 무슨 상황이 어려운지... Pain point를 연사의 입장에서 공감하려고 하다 보면, 이 사람이 다소 두서없이 하는 말도 잘 알아듣고 이른바 예측 통역을 어느 정도 할 수 있게 된다.


매일매일 조금 익숙해졌다, 오늘은 좀 잘 된다 싶으면 새로운 상황을 마주친다. 무지무지 악센트가 심한 사람이 에어팟을 끼고 회의에 들어왔다든가...(에어팟으로 듣는 건 잘 들리지만, 에어팟을 끼고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는 분명하게 수음되지 않기 때문에 안 들려서, 정밀하게 듣고 옮겨야 하는 통역사에게는 악조건이다) 갑자기 랩보다 빠르게 말을 하는 사람이 한 명 이상이라든가, 오디오가 물려버리면 양쪽 말을 다 못 듣는 경우도 있는 등... 여러 어려움이 있다. 마치 저마다 다른 폼과 구종을 장착한 낯선 투수를 매번 타석에서 마주하는 심정이 이럴까.


아직 내가 정복하지 못한 영어라는 영역, 내가 비원어민이기 때문에 느끼는 한계를 조금이라도 더 위로 밀어내기 위해 다양한 영어를 듣고, 다양한 방법으로 말해본다. 계속해서 듣고 또 듣고, 따라 말하면 어느 날 좀 잘 되는 날이 있다. 내가 이런 말도 알았었나? 싶은 말을 통역에서 하게 되기도 한다. 그게 내 머리 안에 있는 깊은 영어라는 우물 어딘가에서 길어져 나오는 새로운 샘물인가 싶기도 하다. 글 쓰는 사람들도 다 비슷하잖은가. 어딘가에서 봤던 표현들이, 언젠가 내가 쓰는 글에 배어 나온다면 발전하고 있는 거니까. 오늘도 비루한 비원어민은 잡다한 영어 팟캐스트와 뉴스를 들으며 하루를 보낸다. 이제 애 데리러 갈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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