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영어도, 완벽한 한국어도 못 한다고 생각했다

85:85의 애매한 유틸리티 플레이어

by캐롤

야구선수의 능력치를 말할 때 흔히 ‘툴(tool)’이라는 말을 쓴다. 빠르게 달리는 주루 능력, 타구를 멀리 보내는 장타력, 잡기 힘든 공을 낚아채 송구하는 수비력처럼 득점을 만들어내기 위해 필요한 세부 스탯들이다. 야구에서 ‘공, 수, 주에서 맹활약을 했다’고 하면 이 모든 툴을 고루 갖춘 선수라는 뜻이다.


육각형 인간.jpg육각형 인간(출처 하퍼스 바자)

요즘 표현으로 치면 사람의 능력치를 ‘육각형’으로 비유하는 것과 비슷하다. 통역사라는 직업에 이를 대입해보면 어떨까? 수많은 세부 능력치가 있겠지만, 가장 기본이 되는 두 언어의 수준만 놓고 계산해보기로 했다. 한영통역사인 나 스스로에게 내린 한국어와 영어 점수는 각각 85점, 85점이다.


솔직히 통대에 가기 전까지만 해도 나 같은 케이스가 아주 유리할 거라고 착각했다. 중학교까지 한국에서 다녔으니 모국어에 무리가 없고, 그 이후 미국에서 대학교까지 나왔으니 필요한 영어도 자연스럽게 습득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릴 때 해외로 이주해 자란 동기들이나 재외국민 출신 동기들을 지켜보며 그 착각은 한마디로 박살이 났다.


그들의 시작점은 대충 한국어 50점, 영어 100점에 가까웠다. 그런데 통대 2년을 거치는 동안 그들의 한국어 실력이 70점, 80점, 90점으로 가파르게 상승하는 게 눈에 보였다. 반면 나의 영어 실력은 한 달에 1점씩, 아주 더디게 오르는 것 같았다. 모국어인 한국어가 압도적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영어 실력이 완벽한 100점도 아닌 상태. ‘한국어도 애매하고 영어도 애매하면, 나는 대체 어디 서 있어야 하는 걸까?’ 어느 한 언어가 100%가 아닌 채로 두 세계 사이에 붕 뜬 느낌. 둘 다 100점이 아닌 애매한 통역사라는 생각에 현타도 세게 왔었다.


다시 야구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야구에서는 보통 선수마다 정해진 포지션이 있다. 하지만 종종 내야의 전 포지션을 무리 없이 소화해내는 선수가 있다. 바로 ‘유틸리티 플레이어’다. 상황에 따라 1루, 2루, 유격수, 3루수 자리를 모두 메울 수 있는 선수다. 물론 이런 선수들은 특정 한 포지션에서 압도적인 골든글러브급 능력치를 평가받지는 못한다. 하지만 팀 전체로 보면 없어서는 안 될 귀한 존재다.

스크린샷 2026-07-20 오후 12.43.00.png수비시 선수들의 위치 (출처: https://jstreambox.tistory.com)


굳이 따지자면 나는 ‘유틸리티 통역사’에 가까운 것 같다. 두 언어 모두 100점짜리 "바이링구얼"인 절대 강자는 아니지만, 상위권의 점수를 유지하며 필요할 때 제 몫을 해내는 타입이다. 원어민의 영어실력으로 압도할 수는 없어도, 미국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며 스포츠를 하고 프롬에 가봤던 경험, The Office 같은 코미디 드라마의 밈을 자연스럽게 즐겼던 문화적 감각이 있다. 교과서나 토익 등의 교재만으로는 알 수 없는 그 문화권의 정서를 이해하는 능력은, 실제 통역 현장에서 두 언어 간극을 자연스럽게 붙이는 실리콘 접착제같은 역할을 하는 것 같다.


한동안 나는 나를 ‘이도 저도 아닌 85점, 85점의 애매한 통역사’라고 스스로 깎아내리며 살았다. 영어가 100점인 사람의 가치가 훨씬 높을 거라 믿으며, 나에게는 없는 15점의 결핍만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팀을 승리로 이끄는 것이 단 한 명의 홈런왕뿐만이 아니듯, 완벽한 원툴이 없다고 해서 내 가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부족한 점이 있다면 매일의 루틴으로 1점씩 보완하면 되지 않을까? 더이상 내 능력치를 점수로 환산하려는 부질없는 노력은 이제 그만 하고, 어딘가에 찰떡처럼 붙어 현장을 메워주는 유용한 유틸리티 플레이어로 살아갈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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