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역사를 환장하게 만드는 사람들
첫 온라인 게임이었던 로펌에 입사하고 몇 개월 만에 퇴사한다고 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처음 나를 면접하셨던 파트너가 갑자기 밥을 사주시겠다고 했다. 아무래도 4개월밖에 안 되어 퇴사한다는데 그냥 모른 척할 수는 없었던 것 같다.
함께 식당으로 향하는 길은 어색했다. 메뉴 주문을 하자마자 그분은 진짜 솔직한 퇴사 사유가 건강 맞냐고 물어보셨다. 나는 건강도 그렇고... 여러 이슈로... 라며 얼버무렸다. 갑자기 몸이 안 좋아 일주일 넘게 앓다가 입원하는 바람에 2주나 자리를 비우고 나서 용기 내어 내린 퇴사 결정이기는 했다.
이 분과 짧게 한 시간 정도 식사를 했었지만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말이 있다.
변호사님: 저는 의사분들이 좋아 보여요. 사람들이 몸이 아프면 두려워서 의사를 만나면 의사 말을 듣잖아요. 변호사는 그런 게 없어요.
나: 아...
변호사님: 고객한테도, 법원에서도 을이죠 뭐. 해달라는 대로 맞춰 주는.
나: ... 저도 제가 비록 법조인은 아니지만, 저희도 통역이나 번역을 전문성으로 여기시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어떤 말씀이신지는 조금 이해합니다.
변호사님: 왜요? 그래도 통역대학원 나와서 하는 전문 통번역인데.
나: 외국어를 하면 통번역도 저절로 된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대부분이거든요 ㅎㅎ
보통은 이 단계까지 대화가 도달하지는 않는다. 자칫 푸념으로 가장한 전문성 자랑으로 보일까 봐서도 있고, 공감을 얻지 못할까 봐 말을 아끼기 때문이다. 하여튼 이런 얘기를 캐주얼하게 꺼냈다가는 괜한 오해를 낳을 수 있다. 하지만 변호사님은 바로 말의 본질을 캐치했다.
"아, 그렇군요. 외국어를 할 줄만 안다면 이론적으로는 가능한 거니까요."
"네네, 바로 그렇죠."
"세상에 쉬운 게 없죠.ㅎㅎ"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전문성'이라는 영역을 존중하지 않는 것 같다. 처음에 나는 이게 통역사라는 내 직업에만 더욱 해당하는 줄 알았다. 그게 비단 우리 같은 사람들뿐일까. 가끔 내가 하는 일을 폄하당한다고 느낄 때마다 잠깐 그때의 변호사님과의 대화를 떠올리곤 한다. (나에게 변호사의 애환을 잠시나마 털어놓으셨던 그 파트너분은 얼마 안 되어 김앤장으로 이직하셨다.) 하물며 변호사도 그런 직업적 고충을 겪는데 나라고 없을 리가. 변호사님은 사람들이 의사 말은 잘 듣지 않냐며 한숨 쉬었지만, 사실 꽤 많은 사람들이 의사 말도 안 듣다가 더 병을 키우기도 한다. 아니면 의사를 만나서 ChatGPT는 XX 병 같다던데,라는 말도 스스럼없이 한다. 전문가를 시험하는 걸까, 무시하는 걸까? 이건 국민성일까, 전 세계적 보편 현상일까.
간혹 통역하러 들어간 회의에서 영어에 능통한 실무자를 만날 때가 있다. 그 직원은 보통 통역을 사용하지 않고 직접 소통한다. 나는 그렇게 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실무자가 내용을 가장 잘 알기에, 설명도 가장 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개 기업에서 통역을 쓰는 이유는 실무자가 내용은 잘 아는데 언어가 안 되는 경우다. 여기서 약간의 비극이 발생하기도 한다. 실무자는 업무의 전문가지만 외국어로 설명을 못 하고, 통역사는 외국어 전문가지만 업무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해서 커뮤니케이션 이슈가 생기기도 하니까. 통역에 관해서는 현업과 매우 적극적으로 소통해야 한다. 또한 회의나 업계에 대해 배경을 샅샅이 조사하고 자료를 파악하는 것은 아무리 철저해도 모자르다.
한편 회의에서 종종 이런 분들도 만난다.
1. 통역사가 못 미더운 사람
이전 경험을 통해 통역사가 영어를 잘 못한다고 생각하거나 언어가 한번 걸러져서 전달되는 것이 영 못마땅한 경우다.
2. 영어에 자신 있는 사람
통역사가 있든지 말든지 자신 있게 영어로(당당하지만 뉘앙스나 톤까지 정확하게 전달하지는 못함) 말하다가 말문이 막히거나 표현을 모르겠으면 갑자기 언제 영어를 썼냐는 듯, 한국어로 말하기 시작. 드물지만 이런 사람을 동시통역으로 만나면 대단히 피곤하다. 통역 중에 갑작스레 언어를 바꿔야 하거나, 대화를 잠시 중지하고 개입해서 의미를 전달해야 하기도 한다.
3. 소심하게 지적하는 경우
'통역사가 왔는데 안 쓸 이유는 없잖아?'라고 생각하는 경우. 통역을 듣다가 자기가 생각하는 단어로 통역하지 않았을 때 "이건 ~~ 로 말해야 하지 않나?"라고 중간에 끊는 경우. 물론, 고도의 전문영역일 경우, 업계 용어나 표현이 잘못 전달되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여기서는 "직역"으로 통역되지 않으면 통역이 잘 안 되었다고 생각하는 경우만 말한다.
처음에는 솔직히 불쾌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사용자의 입장에서는 저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고 스스로 다독이곤 한다. 개인적으로는 가장 문제시되는 경우가 2번이라고 생각한다. 2번의 경우, 일이 잘 되면 자기 공, 잘 안 되면 통역사 탓이 될 가능성이 높다. 특히 통역사가 실무를 상당히 잘 파악하고 있는 경우에는 실무자가 서툰 영어로 직접 소통하다가 오히려 상대방 측을 당혹스럽게 하는 경우도 꽤 있다. 표현이 거칠게 나온다든지, 문화에 안 맞는 말을 해서 상대방이 어이없어한다든지. 아니면 질문을 잘 이해 못하고 엉뚱한 대답을 한다든지. 재미있는 건 그럴 때 상당 경우, 직접 영어로 소통한 본인이 뭔가 실수해서 상대방에게 오해를 줬다고 생각하지 않고, 뭘 잘 모르는 통역사가 분명 잘못 전달했을 거라고 단정하곤 한다.
한편 이런 경우도 있다. 간단한 차담회 같은 자리에 가면, 종종 "통역사까지 굳이 대동해 왔네?"라는 눈초리를 받는 경우도 있고, 아니면 본인이 해외 유학 등을 통해 쌓은 영어실력에 자부심을 가지는 경우도 있다. 대개 이런 사람들은 '나는 알아듣는 것은 잘하지만 스피킹은 상대적으로 약하다'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영->한 통역을 하면 안 듣거나, 하지 말라고 하거나, 통역사를 보면서 혹시 트집 잡을 게 있나 유심히 보기도 한다. 나는 그런 느낌을 받을 때 종종 선빵을 날린 적도 있었다. "혹시, 영-한 통역이 필요하실까요?" 한국인의 체면 문화를 역이용하는 방법이다. 이때, 체면 때문에 필요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 회의 때 티키타카가 거의 안 되고 미소로만 호응하다가 회의가 끝나면 나중에 슬쩍 다가와 "저 사람, 아까 이렇게 저렇게 말한 거 맞지?"라고 확인하는 식이다. 또 영어를 잘못 알아듣고 동문서답을 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엔 사용자가 쪽팔리지 않게 배려하면서도 어떻게 내용을 정리해주어야 할지 고민이 된다.
얼마 전 오랫동안 미국 국무부 통번역국장으로 근무하시다가 은퇴하신 이연향 통역사님도 최근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비슷한 일을 회고했다. (출처 조선일보: https://www.chosun.com/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2026/03/27/Q7VD3JQYLVCY3BXCEK4OKT4NHQ/) 엄청난 성숙도와 관록을 느낀 부분은 '이것도 나의 역할의 일부'라고 승화시켰다는 부분이었다. 직업적 숙명이라고 생각하면 이 정도로 의연해질 수 있는걸까.
시간이 흐를수록 통역이란 단순히 언어를 바꾸는 기술에 더해 사람의 자존심과 비즈니스의 리스크에까지 관여하는 고도의 '심리 서비스직'이라고 느낀다. 통역사를 못 미더워하며 중간에 말을 끊는 사람도, 서툰 영어로 센 척을 하다가 사고를 치는 사람도, 결국은 그 중요한 비즈니스 무대에서 자기가 ‘무식해 보이고 싶지 않다’는 불안을 안고 아등바등하는 온라인 게임인일 뿐이니까.
다만, 통역 전에는 언제나 마음속으로 기도한다. 통역사가 소통하는 것이 썩 미덥지 않아 몸소 영어로 소통하고 싶으시다면, 제발 부탁이니 중간에 가서 불쑥 "한국어로 말할 테니 방금 말한 거 통역 좀 해주세요, "라고 멈추지 말고 끝까지 영어로만 말씀하시기를. 아니, 통역사를 부르지 말고 온전히 DIY로 진행해주시기를! 어설픈 소통을 수습하고 뒤처리하는 것 또한, 생각보다 꽤 고부가가치의 전문 영역이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