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발음이 완벽한 줄 알았었는데
80년대생부터 90년대 초중반생들에게 섹스 앤 더 시티는 거의 바이블과 같은 미국 드라마였다. 사실 섹스 앤 더 시티는 뉴욕이라는 도시와 스타벅스라는 이미지를 소비하고 싶었던 그때 2-30대들에게 너무나 완벽한 드라마였다. 지금 보면 작가가 인류학자인가? 싶을 정도로 관계와 정체성에 대해 생각해 볼 만한 여지가 많은 드라마다.
밑도 끝도 없이 갑자기 해묵은 옛날 드라마를 끌올하는 이유는 영어를 배우는데 정말 이 드라마의 도움을 크게 받았기 때문이다. 사실 영어라는 게, 별거 없다. 얼마나 꾸준하게 반복하는지가 중요하고, 완벽주의 성향이 있다면, 긍정적으로 발휘했을 때 시너지를 낼 수도 있다. (에잇 XX, 내가 이건 꼭 잘하고 만다!라고, 누구나 하나쯤 곤조를 부리는 영역이 있지 않은가?) 사람마다 자기의 '워너비'가 있다. 나에게는 그것이 원어민 같은 '발음'이었다. 나는 좋은 발음으로, 악센트 없이 유창하게 원어민처럼 말하고 싶었다. 누가 "너는 원어민처럼 말해야 해"라는 메시지를 심어 준 것도 아니었다. 다만 처음 영어를 배울 때 원어민 선생님에게 배웠기 때문에, 동경하는 마음이 컸던 것 같다.
어떻게 발음이 그렇게 좋으세요?라고 물어본다면 별 비결이랄 게 없는 것 같다. 무조건 따라 하면서 연습했을 뿐이다. 듣는 즉시 반복하면서 연습했다. (언제 똑같은 말이나 문장을 또 들을지 모르기 때문에 듣는 즉시 연습하면 부채감도 없고 좋다.) 언제까지 연습했냐면 내가 굴리는 혀와 내가 내는 소리가 원어민의 말과 차이가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 똑같이 발음될 때까지 했다. 어떤 단어는 한 열대여섯 번 정도면 무난하게 습득된다. 한편 어려운 단어는 쉽사리 그게 안 되기도 한다. 30번 이상, 그리고 다른 때 수시로 계속 발음하며 소리 내는 방법을 익히는 수밖에 없다. 마치 야구에서 투수가 새로운 구종을 습득하는 과정과 비슷하지 않을까 한다. 투수가 새로운 구종을 습득하는 것은 생각보다 간단한 일이 아니다. 구종마다 공을 잡는 방식(그립)도 다 다르고, 투구 자세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결국 연습량이 쌓이고 쌓여서 어떤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고, 존 안에 의도하는 위치에 변화구를 자유롭게 넣을 수 있다면 성공이다.
반면, 열심히 단어도 외우고 독해 문제도 풀지만 악센트와 발음을 등한시하게 되면 어느 날 다음의 단어들을 발음하다 멘붕이 올 수도 있다.
위의 단어들은 동일한 의미지만 품사가 다른 단어들이다. 품사만 다른 게 아니라 발음도 다르다. 저 단어들은 달리 스펠링을 외울 필요도 없다. 명사 하나만 외우면 자연스럽게 나머지는 따라온다. 문제는 스펠링은 거의 같은데 강세가 다르다는 거다. 흔히 한국인이 많이 하는 발음 실수가 여기서 많이 나온다. 명사 strategy를 미국 영어식으로 발음할 때는, "te"의 발음이 거의 "de" 비슷할 정도로 약하게 발음된다. 그런데 strategic이나 strategically를 발음할 때는 "te"에 강세가 있다. 단어 전체에서 te에만 강조가 된다.
내가 어쭙잖게 발음 좋단 소리 들으며 미국에 갔지만 아무도 내가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했던 건 바로 품사마다 다르게 발음되는 악센트와 발음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미국에 가기 전까지 나는 각 "어절"별 발음은 잘했다. 하지만 자연스러운 대화 억양엔 생소했다. 생각해 보면 영어로 듣는 듣기 평가 음원이나 안내방송은 평상시 원어민들이 대화할 때의 억양과 톤이 아니다. 우리말도 마찬가지 아닌가? "안내말씀 드립니다. XXX 어린이, XXX 어린이는 지금 즉시 안내 데스크로 와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단조롭고 기계적인 톤으로 평상시 대화를 하진 않으니까 말이다.
어쨌든 정직하게 정해진 대로 발음하고 성조나 강세가 두드러지지 않는 한국어 표준어와 다르게 영어는 스펠링과는 전혀 상관없이 발음되는 단어가 있어 외국인의 입장에서는 매우 까다롭게 느껴진다. 이를 절실히 느끼는 경우는 글을 소리 내어 읽어 볼 때다. 같은 어원이라도 품사가 달라지면 발음이 달라지는 상기의 "strategic"이나 "strategically"처럼, 호흡도 조절해야 하고 강세도 생각해 가며 읽어야 한다. 이는 상당한 훈련이 필요하다. 기계적으로 문장을 암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실 더 추천하는 방법은 드라마 대사들을 다 이런 식으로 암기하는 거다. 흔히들 쉐도잉이라고 많이 알고 있는데, 쉐도잉은 약간 1-2초 뒤에서 쫓아가는 듯이 따라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쉐도잉보다는 문장 단위로 끊어서 반복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미란다: Get your coat, Anne Frank, we're going out. (외투 입어, 안네 프랑크야. 가자.)
캐리: I'm not really in the mood. (난 지금 나갈 기분이 아니야.)
그러니까, 문장 하나를 통째로 따라 하는 거다. 내가 저 배우를 성대모사한다고 생각하면 간단하다. 최대한 똑같이 따라 하면 된다. 말투도, 발음도. 배우랑 똑같이 될 때까지 반복해서 따라 한다. 어떤 사람은 이게 금방 될 거고, 어떤 사람은 금방 안 될 수도 있다. 이런 성대모사가 잘 되는 사람은 머리에 각인시키기 위해 최소 10번 이상은 따라 한다. 잘 안 되는 사람은, 최대한 노력해서 될 때까지 무한 반복한다.
영어에 Presentation is everything이라는 표현이 있다. 보이는 게 다라는 거다. 물론 보이는 게 "진짜로" 다는 아니지만, 보이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이다. 동기 중에 발음과 악센트가 한국적이라는 지적을 받은 동기가 있었다. 교수님은 "고객에게 더 신뢰감을 주려면 발음과 인토네이션의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을 하셨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영어 구사자들에게 가지고 있는 높은 기대치와 기준을 생각하면, 좋은 발음과 올바른 억양으로 영어를 구사하는 통역사를 당연히 선호할 법하다.
"어유, 아니에요~"라며 자연스러운 억양과 제스처로 손사래 치는 외국인 방송인들을 볼 때마다 그들의 자연스러운 톤에 놀라면서도, 저 억양에 익숙해질 때까지 그들이 방구석에서 얼마나 많은 한국 드라마를 보며 대사를 읊조렸을지 헤아려진다. 마치 20년 전 내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한다는 건 사실 대단한 지능의 영역은 아니다. 상대의 세계를 집요하게 관찰하고, 내 혀가 그들의 옥타브와 억양을 똑같이 구현해 낼 때까지 계속해서 들이받는 '성대모사'에 가깝다. 캘리포니아 사람의 굴러가는 멋진 발음을 태어나서부터 배우지 않았다고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건 원래 잘했느냐가 아니라 지금 잘하는 거다. 정교하게 연기하는 배우나 코미디언처럼 관찰하고, 흉내 내고, 기어이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 영어를 가장 빠르게 내 몸에 이식하는 방법이라고 나는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