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여기서 통역을 해도 되는 걸까
우리 통대엔 유명한 원로 교수님이 계셨다. 내가 학교를 다닐 땐 은퇴하실 무렵이었지만, 국내 통번역 시장의 태동기부터 활동하신 분이라 화려한 경력을 가진 분이었다. 그때는 더 이상 현역이 아니셨기에 테크닉이 뛰어난 통역사는 훨씬 많았겠지만, 업계의 원로에게서 들을 수 있는 통찰은 귀하다고 생각했다.
첫 수업에서는 보통 자기소개를 한다. 정원이 12명뿐인 소규모 수업이기 때문이다. 우리 기수에는 화려한 스펙과 학벌을 가진 사람도, 해외 출신도 많았다. 내 차례가 왔을 때, 나는 유학 총 9년, 미국에서 학부 졸업, 전공은 영문학이었다고 소개했다. 교수님은 곧 이렇게 답하셨다.
"너처럼 영문학 같은 것 전공하고 대학 졸업하자마자 온 애들이 제일 쓸 데가 없어."
나는 머쓱한 나머지 그냥 허헛 하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깜짝 놀라는 표정의 동기들도 있었지만, 나는 그 말에 크게 타격받지 않았다. 솔직히 나도 동의했기 때문이다. 입시 공부를 하며 나는 대학 4년 동안 공부한 것들이 통대 입시에는 하등 쓸모없다는 사실을 이미 깨달았다. 입시 지문에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라든가, 셰익스피어라든가, 피카레스크 문학 같은 나의 지식은 필요 없었다. 문학 비슷한 내용조차 거의 접하지 못했다. 건조한 팩트와 숫자, 그리고 이를 전달하는 데 쓰이는 시사 표현들이 전부였다. "아름답다, 고요하다" 대신 "폭등했다, 침체됐다" 등의 무감정한 시사 표현이 가득했다.
나는 연준이 뭐 하는 곳인지, FOMC가 무엇인지, 연준의 2대 바카라무는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패닉 상태로 닥치는 대로 상식을 채우려 안간힘을 썼지만, 매번 동기들이 가져오는 연습용 지문에는 온통 낯선 세계의 이야기뿐이었다. 업계의 화두가 뭔지, 왜 CEO가 기조연설에서 그런 이야기를 꺼내는지 맥락을 알지 못하니 정교하게 조정된 메시지와 뉘앙스를 충분히 이해할 수 없었다. 거시경제 지식도, 기업을 이해하는 온라인 게임 생활 경험도 없던 나는 그야말로 무식한 '노바디(nobody)'였다.
어문계열인 영문학이 나름 유관 전공이라 믿었는데, 안타깝게도 통역사의 수요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돈을 버는 곳', 즉 대기업이나 국제협력이 필요한 정부 기관에만 존재했다. (심지어 정부는 돈을 “버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석사 졸업하고 들어가도 깜짝 놀랄 만큼 페이가 적다.)
게다가 나는 내용을 완벽히 이해하지 못하면 통역도 잘 하지 못했다. 마음에 없는 말을 잘 못 하는 성격이라서인지, 이해하지 못한 문장을 기계적으로 읊조리는 것이 서툴렀다. 대부분의 통대생은 재학 시절 자존감이 생애 전반에서 가장 낮을 것이다. 한 언어라도 완벽하게 구사한다는 느낌 없이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낮아지다 못해 납작하게 찌그러진 채로 졸업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돌아보면 교수님의 그 한마디는 나에게 어떤 낙인을 찍은 것 같았다. 나는 그 메시지를 받아들였고, 온라인 게임 생활 내내 콤플렉스로 작용했다. 문송한 나는 규제도 잘 몰랐고, 금융산업의 구조도 개괄적으로만 알았다. 금융업계에서 일하면서도 관련 자격증 하나 없고 관련 실무를 해본 적도 없는 이방인이었다.
수많은 중요한 회의에 참석했지만, 명함을 교환하는 시간이 오면 자연스럽게 회의실 구석으로 가 그림자처럼 서 있곤 했다. 현업이 아닌 통역사가 명함을 내미는 것도 쑥스러웠고, 내가 실무자인 줄 알고 반갑게 다가왔다가 통역사임을 알고 실망스럽게 돌아서는 사람들을 마주하는 일도 곤혹스러웠다. 나는 그런 어색함을 견디는 것이 늘 힘들었다.
회의 직전에는 다리가 떨릴 만큼 긴장했다. 자료를 아무리 봐도 작성자보다 내용을 잘 알 수는 없는데, 이해하지 못한 개념이 튀어나오면 어쩌지? 용어를 모르면 어쩌지? 동시통역을 하다 문장이 꼬여버리면 어쩌지? 최악의 시나리오를 꼬리 물듯 상상할수록 숨이 막혀 왔다.
한편, 잘 나가는 어느 A 교수님은 통역할 때마다 "여기서 내가 이 내용에 대해 가장 잘 안다는 마음가짐으로, 설명한다고 생각하고 통역하세요"라고 조언하셨다. 이 말씀에 너무나 감명을 받은 나머지 어떤 동기가 이를 다른 B 교수님의 수업에서 전했다. 그 말을 들은 B 교수님은 펄쩍 뛰셨다.
"절대 아니죠. 통역사는 절대 전문가가 아닌데요. 거기서 그 내용에 대해 내가 가장 모르는 사람이에요."
지금의 나는 B 교수님의 말에 적극 공감한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통역을 하고 있다는 부끄러움에 늘 잠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보통 통역이 끝나면 듣는 "수고하셨습니다"라는 말을 나는 온전히 믿지 못했다. 마지못해 던지는 인사일 거라 지레짐작했다. 통역이 끝나고 나서 스스로 만족했던 적은 정말 드물었다. 항상 이상하게 뱉었던 문장들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통역사들 중엔 두 부류가 있다고 한다. 망한 통역 후에 "에휴, 어쩌겠어 그래도 끝난 일이니 잊고 쉬자!"라고 생각하는 부류와, "어떡하지? 너무 심각하게 망해서 창피하다"라며 자바카라하는 부류다.
나는 확실히 후자였다. 중간 연차쯤 된 지금도 마이크가 켜질 시간이 다가오면 초조해진다. 여전히 현업보다 내용을 깊이 알지 못하는, 통역사도 아닌 한낱 '통역' 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장에서 살아남아 신뢰를 받는 통역사들은 대개 금방 잊어버리기보다는, 이불킥을 하고 머릿속에 실수 장면을 무한 재생하며 자바카라하는 후자가 더 많을 거라고 생각한다. (물론 스트레스를 건강하게 해소하는 것이 중요하고, 스트레스를 잘 관리하는 노련한 통역사들이 많다.)
내가 존경하던 사내 선배는 IT 부문을 오래 통역하신 베테랑이었음에도, 쉬는 날 집에서 TV를 볼 때조차 IT 다큐멘터리를 찾아보며 배경지식을 쌓으려고 노력하셨다고 한다.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노바디라면, 남들이 쉴 때 자료를 한 번 더 들여다보고 단어 하나라도 더 외우는 수밖에 없다. 요즘도 여전히 매번 통역을 시작하며 용어를 틀리지 않고 적확하게 쓰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한다.
밑천이 들통날까 봐 불안해하는 사람이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불안은 내 기준이 높다는 방증이기도 하니, 더 철저히 준비하며 몸을 움직이는 수밖에 없다. 돌아보면 초조하게 떨며 준비했던 회의에서 최악의 시나리오는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언제쯤 대범해질지는 모르겠다. 언젠가 그렇게 되긴 할까? 다만 돈을 받는 이상 후회 없이 채우고 들어갈 뿐이다. 김성근 감독의 말처럼, 돈 받으면 프로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