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포자가 선택한 진로

회사에서 제일 수학 못했던 사람 = 나

by캐롤

나는 수학을 싫어했다. 정확히는, 수학과 그 명확한 답의 세계가 부담스러웠다.


아무래도 어릴 때부터 숫자와 친하지 않아서 그랬던 것 같다. 아이를 키우면서 나의 어릴 때를 돌아봤는데, 내가 아라비아 숫자를 단순히 '외운' 것 말고, 세고, 더하고, 빼는 등의 수 개념을 제대로 접해 본 건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그 전까지는 항상 활자를 더 좋아했다. 이야기를 읽는 게 재미있었다. 바카라을 펴면 언제나 내가 모르는 새로운 세계가 펼쳐졌다. 반면에 수는 그렇지 않았다. 답은 명확하게 정해진 하나뿐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이 되어 처음 컴퓨터를 배울 때, 윈도우가 열리면 시작 버튼을 누르고, 프로그램에서 보조프로그램을 거쳐 그림판을 클릭해야만 원하는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것처럼, 수학도 정해진 규칙대로만 움직여야 하는 딱딱한 기계의 세계 같았다.


어쩌면 숫자와의 첫 만남부터 뭔가 잘못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냥 다른 아이들보다 수의 개념을 이해하는 속도가 느렸다. 엄마는 그런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왜 이게 이해가 안 되냐며 답답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그때마다 어린 내 마음에 수치심이 차올랐다. 수학바카라을 볼 때마다 내가 못 하는 것에 억지로 끌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문제집을 몇 페이지씩 풀어도 격려는 없었다. 잘하면 당연한 일, 못하면 게으른 아이가 되어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엄마는 내가 수학을 왜 싫어하는지, 어디를 어려워하는지, 문제집을 서너 페이지 푸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렸는지를 다정하게 물어본 적이 없었다.


노력하니까 되네? 라는 성공의 경험이 누적되는 것은 그래서 참 중요하다. 계속 나아갈 동력이 생기기 때문이다. 나에겐 불행히도 그런 게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중학교에 가니 수학 선생님까지 잘못 만났다. 칠판 앞으로 학생을 불러내 문제를 풀게 하고, 못 풀면 온갖 망신과 꼽을 주는 선생님이었다. 일부러 못 풀 것 같은 학생을 지목하기도 했다. (그 선생님은 아직도 교단에 계실까.)


결국 나는 수학을 포기했다. 수학을 버리고 다른 과목만 열심히 공부해서 평균을 끌어올리기로 마음먹었다. 보다 못한 아빠는 그러면 좋은 대학에 못 간다고 일침을 놨다. 나도 알았다. 이게 지속 가능한 길이 아니라는 것을.


그러다 반전이 일어났다. 학원가에서 외고 대비반을 대상으로 만든 모의고사를 보게 된 것이다. 시험이 만만치 않았지만, 며칠 후 학원 선생님의 전화를 받은 엄마의 통화가 생각보다 길어졌다. 나는 슬슬 불안했다. 통화를 끝낸 엄마가 물었다.


"너 학원에서 무슨 외고 모의시험 봤니?"

"응. 그거 학원 애들은 다 보는 시험이었어."

"너가 그 시험에서 1등 했다던데?"


내 생애 첫 1등이었다. 혹시나 학원 선생님이 나를 어떻게 험담할까 봐 불안해하던 나에게 날아온 뜻밖의 성적표였다. 두 달에 한 번 반이 바뀌는데, 내 이름은 무려 몇 계단을 건너뛰고 외고반에서 가장 높은 반으로 수직 상승했다. 나를 잘 아는 주변 친구들은 네가 어떻게 그 반에 가냐며 믿지 않고 비웃기도 했다. 나도 알았다. 내 수학 점수로는 말이 안 된다는 것을. 다른 아이들은 전교에서 노는 친구들이었으니까. 하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적어도 그 방에서 내가 영어를 가장 잘한다는 사실이었다. 귀가 많이 뚫려 있던 상태라 영어 점수가 내 수학 구멍을 완전히 메워준 덕분이었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나는 당시 유행하던 대로 미국 고등학교 교환학생으로 떠났다. 미국은 우리보다 수학 개념을 좀 천천히 배우기는 하지만, 결국 11학년, 12학년 때는 한국의 고2, 고3이 배우는 개념들을 배운다. 12학년 때 물리 시험을 볼 때였다. 맨 마지막 문제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아 계속 째려보며 앉아 있는데, 나를 제외한 모든 학생이 답지를 제출하고 교실을 나갔다. 혼자 남았다는 사실에 안달이 나기도 했고, 다른 애들은 쉽게 푸는 문제조차 풀지 못한다는 자괴감에 그만 눈물이 핑 돌았다.


내가 너무 분하고 창피해서 눈물을 뚝뚝 흘리자, 머리가 희끗한 물리 선생님이 조용히 다가오셨다. 그리고는 어깨를 다독이며 말씀하셨다. "문제를 다시 천천히 읽어보렴. 네가 아는 힌트가 숨어있단다." 선생님이 짚어준 문장을 차분히 다시 읽어 보자 내가 미처 보지 못하던 부분이 깨달아졌다. 마침내 답을 적어내자 선생님이 환하게 웃으며 말씀하셨다.


"See? You knew it!" (거 봐, 네가 이미 아는 거였어!)


미국에서 만난 친절한 어른들의 인내와 격려 덕분에, 나는 수학 울렁증을 겨우 극복하고 미적분(Calculus)까지 공부를 마칠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당연히 수학을 잘하게 된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숫자 앞에서 도망치지 않는 법은 배운 셈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에 돌아와 통대를 거친 뒤, 나는 전혀 예상치 못하게 금융권에서 커리어를 시작했다. 사실 첫 회사에 지원할 때 너무나 무서웠다. 뭐든지 숫자로 이야기하는 금융권에서 숫자 울렁증이 있는 내가 버틸 수 있을까. 그 회사의 면접에서 치른 통역 시험은 심각하게 망해서 집에 와서 펑펑 울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합격 이메일이 날아왔다. 그렇게 시작된 금융권에서의 이력이 연차가 쌓이면서 나만의 유의미한 전문성이 되었다. RBC니, DTI니... 처음 들어 보는 개념들이 쏟아질 때마다, 나는 고등학교 때 뭐든지 외워버렸던 무식함으로 '언젠가는 이해되겠지' 라는 희망으로 열심히 외웠다.


어느 날 문득 돌아보니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학을 못 했다고 해서 내 인생이 망하지도 않았고, 대학을 졸업해 번듯한 밥값 제때 하는 직업인이 되었다는 사실이 새삼 감사했다. "너 같은 애한테는 추천서를 써주기 어렵다"며 면전에서 거절했던 중학교 시절의 그 수학 선생님은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고 계실까. 반면에 "너는 뭔가 국제적인 일을 할 것 같으니 열심히 해보라"며 내 손을 잡아주던 마지막 담임선생님의 따뜻한 눈빛은 여전히 내 마음속에 남아있다.


좋은 선생님을 만난다는 것, 자라나는 유청소년기에 나의 사정을 이해해 주는 어른이 단 한 명이라도 있다는 것은 인생을 바꾸는 엄청난 복이다. 최근 유퀴즈에서 엔비디아의 젠슨 황이 말했듯, 앞으로의 시대에 인간의 진짜 경쟁력은 지능이나 속도가 아니라 타인을 향한 인간성이다. 사람을 인간답게 믿고 길러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부모와 교육자들의 도리일 것이다.


천천히 해도 된다고 말해주기, 뒤처져도 기다려 주기, 묵묵히 격려해 주기. 나 역시 학창 시절 나를 기다려 준 친절한 어른들 덕분에 낙오하지 않고 내 밥값 정도는 하는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에도 수학 문제집 앞에서, 혹은 자신만의 장벽 앞에서 처진 어깨로 고개 숙이고 있을 수많은 아이들이 부디 친절한 어른을 만나기를 바란다. 차근차근 배워서 언젠가 세상 몫을 씩씩하게 해내는 반듯한 어른이 되기를, 진심으로 응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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