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 테이블에 시안 두 개가 올라왔습니다. 하나는 사흘을 붙잡은 것이고, 하나는 회의 직전에 십 분 만에 뽑은 것입니다. 만든 사람은 당연히 사흘짜리를 밀었습니다. 구조가 탄탄하고 디테일이 살아 있고 무엇보다 고민의 흔적이 있다고 생각해서.
돌아보면 십 분짜리가 나았습니다. 그 자리에서도 대부분 그렇게 느꼈을 것입니다. 다만 아무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사흘이 테이블 위에 같이 올라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들인 공과 좋음을 같은 범주 안에서 다뤄왔습니다. 그 둘이 얼마나 다른지 알게 된 것은 공이 거의 들지 않는 결과물이 흔해진 뒤였습니다.
직접 조립한 가구를 남이 조립한 같은 가구보다 더 높게 평가한다는 실험이 있습니다. 설명서를 보며 나사를 조인 수고가 물건의 값으로 옮겨 붙는 것입니다. 조립이 서툴러 조금 삐뚤어졌어도 평가는 크게 떨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삐뚤어짐까지 애틋해집니다.
만드는 일도 다르지 않습니다. 오래 붙잡은 것일수록 버리기 어렵고, 버리기 어려운 것은 좋아 보입니다. 시간이 판단 안으로 스며드는 것입니다. 자기 작업을 객관적으로 보기 어렵다는 말은 흔히 애정 때문이라고 설명되지만 정확히는 애정보다 투입량 때문입니다. 들인 것이 많을수록 눈이 그쪽으로 굽습니다.
값을 매기는 쪽에서도 비슷한 장면을 찾을 수 있습니다. 십구세기 런던에서 화가 제임스 휘슬러는 자신의 작품을 혹평한 평론가 존 러스킨을 상대로 소송을 벌였습니다. 재판 과정에서 작품을 만드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렸는지를 두고 질문이 오갔고 휘슬러는 짧은 제작 시간만으로 작품의 가치를 판단할 수 없다는 취지로 답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림에 매겨진 값은 며칠간의 노동만이 아니라 그때까지 쌓아온 경험과 역량의 값이라는 이야기였습니다.
이 일화는 흔히 화가의 재치 있는 답변으로 기억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질문의 방향입니다. 작품의 가치를 따지는 자리에서 제작에 얼마나 시간이 들었는지가 하나의 기준으로 등장했다는 것. 좋은지 나쁜지를 판단할 때 우리는 생각보다 쉽게 그 뒤에 들어간 시간을 함께 셉니다. 들인 시간은 오래전부터 좋음을 가늠하는 가장 손쉬운 자 중 하나였는지도 모릅니다.
생성형 AI로 작업하기 시작하면서 그 시간을 재던 것들이 치워졌습니다. 지금 테이블에 올라오는 것들은 대부분 비슷한 시간에 나옵니다. 사흘짜리와 십 분짜리의 구분도 점점 흐려집니다. 들인 시간이 거의 같으니, 처음으로 결과물이 결과물끼리 나란히 놓입니다. 누구의 수고도 편을 들지 않는 상태에서.
이것은 분명히 좋은 일입니다. 공이 판단을 굽히던 시절에는 좋은 아이디어가 늦게 나왔다는 이유로 밀렸고, 오래 붙잡은 아이디어가 오래 붙잡았다는 이유로 살아남았습니다. 이제 그런 일은 줄어듭니다. 공이 사라진 자리에서 눈은 조금 더 정직해졌습니다.
아무도 편들지 않는다
그런데 공과 함께 사라진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사흘을 붙잡은 사람은 회의실에서 그 시안을 위해 싸웠습니다. 반대가 나오면 한 번 더 설명하고 수정 요청이 오면 핵심만은 지켜내려 했고 한 번 떨어져도 다음 회의에 조금 바꿔 다시 들고 왔습니다. 착각에서 나온 고집이었지만 그 고집이 아이디어를 끝까지 데려갔습니다.
십 분 만에 뽑은 것에는 그런 사람이 없습니다. 반대가 나오면 그냥 다른 것을 뽑으면 되니까. 그래서 좋은 것도 조용히 죽습니다. 한 번의 미지근한 반응과 또 어떤 한 사람의 고개 갸웃거림에. 아무도 그것을 위해 한 번 더 말해주지 않습니다.
돌아보면 회의실에서 이긴 것은 늘 가장 좋은 안이 아니었습니다. 누군가 끝까지 편을 든 안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편드는 힘이 어디서 왔는지 따져본 적이 없는데 상당 부분이 들인 공에서 왔습니다. 공은 판단을 흐리게 했지만 동시에 옹호할 이유를 만들어주었습니다. 착시와 연료가 같은 곳에서 나왔던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필요한 것은 공을 다시 들이는 일이 아닙니다. 사흘을 붙잡는다고 결과가 좋아지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알게 되었습니다. 필요한 것은 공 없이 편드는 법입니다.
노동이 애착을 만들어주지 않는다면 애착은 다른 데서 만들어져야 합니다. 이것이 왜 좋은지 말할 수 있는 문장, 이것이 무엇을 해낼 수 있는지에 대한 확신. 수고가 아니라 이유가 사람을 그 시안 편에 세워야 합니다. 이유로 선 편은 착시가 없습니다. 반박당하면 이유가 틀린 것이고 틀린 이유는 고치면 됩니다. 수고로 선 편은 반박당하면 억울할 뿐이었습니다.
실무로 옮기면 작은 장치 하나로도 충분합니다. 회의 전에 올라온 안마다 편들 사람을 하나씩 정해두는 것. 그 사람이 만들었든 아니든. 그 안이 한 번의 갸웃거림에 사라지지 않도록 끝까지 말해줄 사람. 예전에는 들인 시간이 그 역할을 저절로 배정해줬지만, 이제는 배정해야 생깁니다.
공들인 것이 좋아 보이던 시절은 지나가고 있습니다. 대신 편든 것이 살아남는 시절은 그대로입니다. 들이는 공은 사라져도 서는 공은 여전히 필요합니다.
공(功) 들인 시간이 아니라 그것 편에 선 기록. 오래 들인 공은 판단을 굽히면서도 옹호의 힘을 주었으나, 공이 들지 않는 시대에 옹호는 수고가 아니라 이유에서 나와야 한다.
회의가 끝난 테이블에는 수많은 시안이 남아 있지만 단 하나의 시안 곁에만 사람이 서 있다. 그것이 가장 오래 만든 결과물인지 가장 많은 수고가 들어간 결과물인지는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누군가 그것을 선택했고 왜 이것이어야 하는지를 말하기 위해 그 곁에 남았다는 사실이다.
생성형 AI는 만드는 데 필요한 공을 빠르게 줄이고 있다. 그와 함께 오래 만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자기 결과물을 더 좋게 보는 착시도 약해진다. 그러나 수고가 사라졌다고 해서 아이디어를 지켜내는 힘까지 사라져도 되는 것은 아니다. 공은 이제 얼마나 오래 들였는가가 아니라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무엇의 편에 끝까지 섰는가에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