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이 하던 일

by임종민

만드는 일에는 오랫동안 기다리는 구간이 있었습니다. 렌더링이 도는 두 시간, 필름을 맡기고 결과를 받기까지의 사흘, 인쇄 감리를 앞둔 하룻밤. 지금은 대부분 삼십 초 안쪽으로 줄었습니다.


그 공백이 사실은 판단이 식는 시간이었다는 진단은 이제 흔합니다. 그래서 따라붙는 처방도 흔합니다. 결정하기 전에 하룻밤 묵혀보라는 것. 그런데 실제로 해본 사람은 압니다. 대체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 다시 열어봐도 판단은 어제와 거의 같고 하루가 통째로 지연되었다는 사실만 남습니다. 같은 처방이 옛날에는 듣고 지금은 듣지 않는다면 우리가 기다림의 성분을 잘못 짚은 것입니다.


유효성분은 시간이 아니었다

필름을 맡긴 사흘과 오늘 밤의 하룻밤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있습니다. 사흘 동안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것. 현상소에 넘긴 순간 결정은 손을 떠났습니다. 다시 찍을 수도, 조정할 수도, 취소할 수도 없었습니다. 남은 일은 결과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것뿐이었고, 그 무력함이 사람을 만드는 자리에서 밀어내 보는 자리에 앉혔습니다.


오늘 밤의 하룻밤은 다릅니다. 언제든 다시 뽑을 수 있는 상태에서의 하룻밤은 기다림이 아니라 유예입니다. 마음 한구석에 다시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켜져 있는 한, 사람은 여전히 만드는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그래서 다음 날 아침에도 그는 관객이 아니라 저자입니다. 하루가 지났지만 자리는 옮겨지지 않았습니다. 기다림의 유효성분은 흘러간 시간이 아니라 되돌릴 수 없음이었습니다. 되돌릴 수 있는 시간은 아무것도 굳히지 못합니다.


의도를 아는 사람은 화면을 볼 수 없다

여기서 한 층 더 들어가면 되돌릴 수 없음이 실제로 하던 일이 보입니다. 잊게 만드는 것. 사흘 뒤에 돌아온 필름은 분명히 내가 찍은 것인데 낯섭니다. 왜 그 각도로 찍었는지, 무엇을 노렸는지가 흐릿해져 있습니다. 그 흐릿함이 결정적입니다. 만드는 동안의 사람은 자기가 넣은 의도를 알고 있고 의도를 아는 사람은 화면을 보지 못합니다. 화면에서 자기 의도를 읽어내기 때문입니다. 여백이 넓다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여백을 넓히려 했던 자기 결심을 봅니다. 거기 없는 것까지 보입니다.


처음 보는 사람은 그 의도를 모르니 화면만 봅니다. 그리고 세상에 나간 결과물은 예외 없이 그 눈 앞에 놓입니다. 그러니 판정이란 자기 의도를 잊고 처음 보는 사람의 자리로 건너가는 일이고 기다림은 그 건너감을 강제하는 장치였습니다. 이틀이면 잊혔고 잊혔기 때문에 보였습니다.


지금은 만든 즉시 봅니다. 의도가 가장 뜨거울 때 봅니다. 그래서 대개 좋아 보입니다. 어젯밤에 확신을 갖고 고른 한 장이 아침에 시들해지는 흔한 경험은 안목이 밤에만 흐려져서가 아니라, 밤의 그 사람이 아직 관객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은 조금 불편한 함의를 갖습니다. 이 바카라은 손의 값이 폭락한 자리에서 눈의 값을 이야기해왔습니다. 그런데 눈이 작동하려면 거리가 필요하고 거리를 공급하던 물리적 장치가 방금 사라졌습니다. 안목이 마지막 영토라는 말이 안심의 근거가 되려면 그 영토의 토대부터 다시 놓아야 합니다.


기다림은 미덕이 아니라 특권이었다

그렇다고 옛 기다림을 그리워하는 것은 정직하지 않습니다. 사흘을 기다리려면 사흘을 버틸 수 있어야 했습니다. 다시 찍을 예산, 일정을 미룰 권한, 결과가 나쁘면 한 번 더 갈 수 있는 여유. 느리게 익히는 것의 가치를 말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대체로 그 여유의 안쪽에 있던 사람들입니다.


바깥에서는 사정이 달랐습니다. 하청의 자리에서는 냉각기가 존재한 적이 없습니다. 받은 날 넘겼고, 뜨거운 채로 넘겼고, 식힐 사흘이 있었다면 그것은 대금 지급이 늦어졌을 때뿐이었습니다. 기다림 예찬의 문헌들은 대체로 기다릴 수 있었던 자리에서 쓰였고 기다리지 못한 사람들의 기록은 남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옛 기다림으로 돌아가자는 처방은 처음부터 소수를 위한 처방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 소수마저 기다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도구가 삼십 초를 증명해버린 뒤로는 이틀을 요구할 언어 자체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잃은 것을 정확히 말하면 이렇습니다. 기다림을 잃은 것이 아니라 기다림이 공짜로 딸려오던 소수의 자리마저 없어진 것입니다.


시간 없이 거리를 사는 법

그렇다면 남는 질문은 하나입니다. 시간을 쓰지 않고 어떻게 거리를 만드는가. 사실 방법은 오래전부터 있었습니다. 시안을 좌우로 뒤집어 보는 것, 눈을 가늘게 뜨고 형태만 남기는 것, 화면을 인쇄해서 보는 것, 썸네일 크기로 줄여 보는 것, 색을 빼고 보는 것. 만드는 사람들의 이 사소한 관습들은 취향이 아니라 기술이었습니다. 자기가 넣은 의도가 걸려 있는 좌표를 흔들어 화면을 처음 보는 것으로 만드는 기술. 시간이 하던 일을 매체의 변경으로 대신하는 것입니다. 기다림이 공짜로 주어지던 시절에는 부차적인 요령으로 취급되었지만, 지금은 이쪽이 본체입니다.


그리고 더 강한 방법은 되돌릴 수 없음을 복원하는 것입니다. 오늘 뽑은 것을 폴더째 닫고 프롬프트 창을 지우는 것, 마감을 실제보다 앞당겨 스스로 걸어두는 것 결정을 남에게 넘겨 회수할 수 없게 만드는 것. 다시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꺼져야 사람은 비로소 관객이 됩니다. 앞에서 결핍과 여백이 이제는 설계의 대상이 되었다고 적었는데, 불가역성도 같은 목록에 들어갑니다.


반론: 즉시성은 나쁜 것인가

여기에 정당한 반박이 있습니다. 빠른 왕복이 만드는 발견도 분명히 있다는 것. 뽑고 보고 고치는 짧은 순환 속에서 처음에는 몰랐던 방향이 잡히는 경험은 실재하고, 기다림이 길었던 시절에는 그런 발견의 횟수가 절대적으로 적었습니다. 다만 두 가지는 다른 국면의 기술입니다. 짧은 왕복은 만드는 국면의 기술이고, 거리는 판정하는 국면의 기술입니다. 회의를 벌리는 구간과 모으는 구간으로 나눠야 하듯 작업도 그렇습니다. 문제는 이 두 국면이 지금 하나의 화면 안에서 뒤섞여버렸다는 데 있습니다. 만들던 손이 그대로 판정하고, 판정하자마자 다시 만듭니다. 그 매끄러움이 편리의 정체이고, 동시에 안목이 개입할 틈이 사라진 자리입니다.


기다림이 하던 일은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을 자기 작업에서 떼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 일을 시간이 대신해주던 시대가 끝났으니, 이제는 떼어내는 일을 직접 해야 합니다. 다행인 것은 시간이 그 일을 하는 유일한 방법도, 가장 좋은 방법도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다만 가장 비싼 방법이었을 뿐입니다.


거리(距離) 판정이 성립하기 위한 조건. 자기가 넣은 의도를 잊고 처음 보는 사람의 자리로 건너가는 일이며, 오랫동안 기다림이라는 가장 비싼 방법으로만 확보되어 왔다. 잊게 만들 수 있다면 시간은 없어도 된다.


mirae_ai_A_monumental_minimalist_white_marble_hall_a_single_t_9a7d5847-5640-4277-9ff5-c9a0600d3a2c_3.png거리 (Distance) AI Artwork by Lim Jongmin (임종민)

창작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더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의도에서 한 걸음 물러나 처음 보는 사람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일임을 표현했다.


거대한 프레임과 작품 사이에는 의도적으로 비워진 거리가 존재한다. 그 간격은 작품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만드는 사람을 관객으로 바꾸는 공간이다. 가까이에서는 자신의 의도만 보이지만, 한 걸음 뒤로 물러나는 순간 비로소 화면 자체가 드러난다.


생성형 AI는 결과를 즉시 만들어낸다. 그러나 즉시성은 거리를 만들어주지 않는다. 안목은 시간이 아니라 관점이 바뀌는 순간 시작된다. 거리는 기다림의 다른 이름이 아니라, 자기 의도를 잠시 잊고 처음 보는 사람의 자리로 건너가는 기술이다. 그 한 걸음이 창작을 완성시키는 마지막 판단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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