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의 스타일이 또 하나 태어났습니다. 피드가 온통 같은 질감입니다. 그리고 익숙한 갈등이 시작됩니다. 따라 만들자니 백 번째 복제가 될 것 같고, 안 만들자니 혼자 뒤처지는 것 같고. 예전에도 유행은 있었지만 이 갈등이 매주 반복되지는 않았습니다. 유행의 수명이 계절 단위였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주 단위입니다. 무엇이 달라진 걸까요.
유행의 수명은 복제의 속도에 반비례합니다. 흉내 내기 어려운 것은 오래 새롭고, 흉내 내기 쉬운 것은 금방 흔해집니다. 생성 도구는 복제의 비용을 영으로 만들었습니다. 어떤 스타일이 눈에 띄는 순간 수만 명이 그날로 같은 것을 만들 수 있게 되었고, 그래서 유행은 태어나는 순간 소진되기 시작합니다. 월요일의 신선함이 금요일의 진부함이 되는 속도. 이 속도가 유행을 따르는 전략의 손익을 근본적으로 바꿨습니다. 올라타려고 달려가면, 도착했을 때 물결은 이미 지나가 있습니다.
물결이 아니라 수면을 읽는 일
그렇다고 유행을 무시하는 것이 답은 아닙니다. 유행에는 물결 말고 다른 것이 하나 더 있기 때문입니다. 왜 하필 지금 이것이 번지는가라는 신호입니다. 어떤 질감이 갑자기 사랑받는다면, 그것은 사람들이 지금 무엇에 허기졌는지에 대한 집단의 고백입니다. 손그림 질감의 유행 뒤에는 매끈한 것들에 대한 피로가 있고, 낡은 캠코더 화질의 유행 뒤에는 너무 선명한 시대에 대한 향수가 있습니다. 물결은 며칠이면 지나가지만 그 밑의 허기는 오래갑니다. 유행을 소비하는 사람은 물결을 타고, 유행을 읽는 사람은 허기를 겨냥합니다. 전자의 결과물은 유행과 함께 낡고, 후자의 결과물은 유행이 식은 뒤에 오히려 도착합니다.
패션의 세계에 오래 도는 경구가 있습니다. 유행은 사서 입을 수 있지만 스타일은 살 수 없다는 것. 이 경구의 논리가 이제 모든 만드는 일에 적용됩니다. 살 수 있는 것, 즉 복제할 수 있는 것의 값은 복제의 속도만큼 빨리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경구가 백 년을 버틴 이유를 생성의 시대가 증명해주고 있는 셈입니다.
여기에 현실적인 반론이 있습니다. 알고리즘의 시대에 유행하는 형식을 무시하면 노출 자체가 되지 않는다는 것. 아무리 좋은 내용도 피드에 오르지 못하면 없는 것과 같지 않은가. 맞는 말이라서, 구분이 하나 필요합니다. 형식의 유행과 내용의 유행입니다. 형식은 빌려도 됩니다. 지금 통하는 길이, 지금 통하는 화면 비율, 지금 통하는 도입부의 속도. 그것은 언어의 문법 같은 것이라 따르는 것이 소통에 유리합니다. 잃지 말아야 할 것은 내용 쪽입니다. 그 형식에 무엇을 담는가. 익숙함 아흔아홉에 낯섦 하나라는 문법이 여기서 다시 작동합니다. 형식은 아흔아홉의 익숙함으로 빌리고, 내용에 자기 것 하나를 심는 것.
자기 템포라는 자산
이렇게 정리하고 나면 유행 앞의 초조함이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매주 갈아타는 사람은 늘 바쁘지만 축적이 없습니다. 지난주의 작업이 이번 주의 자산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면 자기 템포로 가는 사람의 작업은 서로를 쌓아 올립니다. 유행이 몇 바퀴 도는 동안 한 방향을 판 사람에게는 어느 날 유행이 그를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도착하는 순간이 옵니다. 세상의 허기가 마침 그가 파던 우물 위를 지나는 순간. 그때 그는 유행을 따라간 사람이 아니라 유행이 찾아온 사람이 됩니다. 유행을 따라야 하는가. 물결은 흘려보내고, 수면 아래 적힌 것을 읽으면 됩니다.
유행(流行) 올라탈 물결이 아니라 읽어야 할 수면. 사람들이 지금 무엇에 허기졌는지가 거기 적혀 있고, 물결은 지나가도 허기는 남는다.
수면 위를 스쳐 지나가는 물결과 그 아래 오래 이어지는 흐름을 통해 유행의 본질을 표현했다. 물결은 빠르게 생겨나고 사라지지만, 그 아래의 흐름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생성형 AI는 유행을 누구보다 빠르게 복제한다. 그러나 복제되는 것은 물결일 뿐, 사람들이 왜 그것을 원하게 되었는지는 복제되지 않는다. 유행은 따라 탈 대상이 아니라, 그 아래 숨어 있는 시대의 허기를 읽기 위한 신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