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라는 프롬프트

by임종민

이상한 이중생활이 관찰됩니다. 입력창 앞에서는 대상과 목적과 제약을 갖춰 정확하게 요청하던 사람이, 회의실에만 들어가면 이렇게 말합니다. "그, 왜, 그런 느낌 있잖아요." 십 분 전까지 '이십 대 후반 온라인 게임인이 삼 초 안에 알아볼 수 있도록'이라고 쓰던 손가락과, '좀 젊은 감성으로 가시죠'라고 말하는 입이 같은 사람의 것입니다. 자리로 돌아온 그는 다시 정확해집니다. 방금 회의에서 받은 흐린 말을 입력창에 옮기기 위해, 이번에는 자기가 그 말의 행간을 추측해가며 조건을 채웁니다. 회의에서 흐리게 말한 사람도, 그 말을 받아 명시화의 노동을 떠안은 사람도 같은 도구를 쓰는 같은 팀입니다. 도구에게 배운 명시화의 근육이 사람 앞에서 증발하는 것입니다. 기계에게는 정확하고 사람에게는 흐릿한 시대. 순서가 뒤바뀐 것 같은데, 이 역전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입력창 앞에는 비용이 없습니다. 정확하게 말해도 아무도 상처받지 않고, 지시가 노골적이어도 위계가 상하지 않고, 어제 한 말을 오늘 뒤집어도 서운해하는 존재가 없습니다. 회의실은 다릅니다. 너무 정확한 말은 상대의 안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일이 되고, 너무 구체적인 지시는 상대의 재량을 침범하는 일이 됩니다. 그래서 온라인 게임의 말에는 오래 벼려진 완곡의 방언이 있습니다. "나쁘지 않은데요"는 나쁘다는 뜻이고, "한번 검토해볼게요"는 하지 않겠다는 뜻이고, "방향은 좋아요"는 방향 말고는 좋지 않다는 뜻입니다. 이 방언은 무능해서 생긴 것이 아닙니다. 매일 얼굴을 봐야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진실의 모서리를 둥글리는, 나름의 정교한 기술입니다.


게다가 흐린 말에는 보험의 기능도 있습니다. "그런 느낌으로 가자"고 해두면 결과가 어긋났을 때 내 뜻은 그게 아니었다고 물러설 퇴로가 남습니다. 선명한 말은 바카라임의 주소를 남기지만, 흐린 말은 바카라임을 방 전체에 안개처럼 풀어놓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일부러 흐리게 말합니다. 회의실의 흐릿함은 무능만이 아니라 슬롯적 완충이자 바카라임의 분산이기도 한 것입니다. 앞에서 관계의 여백과 업무의 흐릿함을 구분했는데, 회의실에서는 그 둘이 한 문장 안에 섞여 있어서 걷어내기가 더 어렵습니다. 같은 "좋은 것 같아요" 안에 배려와 회피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회의는 집단의 프롬프트가 되었다

그런데 이 흐릿함의 값이 달라졌습니다. 회의의 산출물이 곧장 도구에 들어가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예전의 회의는 사람에게 전달됐고, 받은 사람이 행간을 메꿨습니다. 회의실에서 이십 년을 보낸 사람은 "그런 느낌"이 이 팀장의 입에서 나올 때와 저 팀장의 입에서 나올 때 다른 뜻이라는 것까지 알았습니다. 지금의 회의는 요약되어 브리프가 되고, 브리프는 프롬프트가 되고, 프롬프트는 백 장의 결과물이 됩니다. 기획서가 상류라면 회의는 그 상류의 상류입니다. 강의 발원지에서 흐려진 물은 하류의 어떤 정수 시설로도 원래의 물이 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어긋남은 예전처럼 사고로 터지지 않습니다. 회의에서 "그런 느낌"으로 합의됐다는 것은, 세 사람이 각자 다른 느낌을 상상한 채로 헤어졌다는 뜻입니다. 예전에는 그 세 개의 상상이 제작 과정 어딘가에서 충돌했습니다. 시안이 나오면 누군가 "이게 아닌데"라고 말했고, 언성이 높아졌고, 회의가 다시 소집됐습니다. 충돌은 시끄러웠지만 적어도 어긋남이 있다는 사실은 알려줬습니다. 지금은 도구가 그 자리를 평균의 느낌으로 조용히 봉합합니다. 돌아온 결과물은 세 사람 각자의 상상과 적당히 비슷해서, 각자 "뭐, 대충 이 방향이네" 하며 통과시킵니다. 아무도 이게 아니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정확히 이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균열은 터지지 않고, 드러나지도 않고, 결과물은 그럴듯한 채로 아무의 것도 아니게 됩니다.


요약 도구의 등장은 이 봉합을 한 겹 더 두껍게 만듭니다. 이제 회의가 끝나면 AI가 회의록을 요약하고 액션 아이템을 정리해줍니다. 편리한 일이지만, 그 요약이 하는 일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약은 흐린 말들을 그럴듯한 문장으로 번역합니다. "그런 느낌으로 가보죠"는 "젊은 감성의 방향으로 진행하기로 합의"가 됩니다. 방 안에 합의가 없었다는 사실이, 합의가 있었다는 문서로 남는 것입니다. 흐림이 기록의 단계에서 한 번 더 평균으로 다려지는 셈이고, 그 매끈한 문서를 보면 누구도 그날의 안개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회의가 프롬프트보다 어려운 이유가 이것입니다. 프롬프트는 한 사람의 안개만 걷으면 되는데, 회의는 여러 사람의 안개를 한 문장으로 모아야 하고, 이제는 그 안개를 도구가 대신 걷어주는 척까지 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오 분

그래서 어떤 팀들은 회의의 끝을 다시 설계했습니다. 마지막 오 분, 오늘 정한 것을 전원이 보는 화면에 문장으로 적는 것입니다. 요약 도구에 맡기지 않고, 회의를 소집한 사람이 직접 칩니다. 처음 이것을 해보는 팀의 풍경은 대개 비슷합니다. 한 시간 동안 고개를 끄덕이던 방이, 첫 문장이 화면에 올라가는 순간 조용해집니다. 누군가 조심스럽게 말합니다. "그게 그 뜻이었어요?" 타깃이 이십 대라는 데 동의한 줄 알았는데 한 사람은 이십 대 초반의 대학생을, 한 사람은 이십 대 후반의 온라인 게임인을 그리고 있었다는 것이 그제야 드러납니다. 말로는 다 동의한 것 같던 방이, 문장 앞에서 갈라지는 것입니다.


이 균열의 값이 예전과 달라졌습니다. 예전의 균열은 어차피 하류 어딘가에서 터질 것이 앞당겨진 것뿐이었습니다. 지금의 균열은 여기서 드러나지 않으면 영영 드러나지 않습니다. 도구는 어긋남을 수면 위로 올려주지 않습니다. 평균으로 덮어줄 뿐입니다. 그러니 회의실은 이제 균열이 드러날 수 있는 마지막 장소입니다. 마지막 오 분의 어색함은 비용이 아니라, 다른 어디서도 살 수 없는 것을 사는 값입니다.


판정의 기준도 간단합니다. 그 문장을 그대로 입력창에 넣어도 되는가. 된다면 회의는 끝난 것이고, 안 된다면 회의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입니다. 자리에서는 다들 알겠다고 했는데 각자의 입력창 앞에서 저마다 다른 프롬프트를 쓰고 있다면, 그 회의는 사실 끝난 적이 없습니다. 각자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것은 합의가 아니라 합의의 착시입니다.


흐림의 자리와 선명함의 자리

여기서 반론이 나옵니다. 회의를 전부 문장으로 조이면 회의가 삭막해지지 않는가. 회의는 결정만 하는 자리가 아니라 서로의 온도를 확인하고 어설픈 생각을 안전하게 꺼내보는 자리이기도 하지 않은가. 중요한 지적이고, 그래서 답은 전면적 선명함이 아니라 배치입니다.


회의에는 두 구간이 있습니다. 벌리는 구간과 모으는 구간. 벌리는 구간의 흐릿함은 자산입니다. 설익은 말, 절반의 직감,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뒤에 나오는 것들이 거기서 태어납니다. 아직 이름이 없는 것은 흐린 말로만 세상에 나올 수 있습니다. 그 구간을 문장으로 조이면 아무도 입을 열지 않습니다.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것만 말해지는 회의에서는 이미 아는 것만 오가고, 이미 아는 것만 오가는 회의는 하지 않아도 되는 회의입니다. 선명함이 필요한 곳은 모으는 구간, 그중에서도 마지막 문장입니다. 흐리게 벌리고 선명하게 닫는 것. 회의의 기술은 결국 그 전환의 순간을 아는 것입니다. 너무 일찍 조이면 아무것도 태어나지 않고, 끝내 조이지 않으면 태어난 것이 평균에 삼켜집니다.


많은 회의가 실패하는 지점도 여기입니다. 대부분의 회의는 벌리기와 모으기를 구분하지 않고 두 구간을 뒤섞습니다. 누군가 설익은 직감을 꺼내는 순간 다른 누군가 실행 일정을 묻고,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에 누군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벌립니다. 벌어지는 중인지 모이는 중인지 아무도 모르는 채로 한 시간이 흐르고, 회의는 흐리게 벌어진 채로 끝납니다. 그 흐림이 예전에는 다음 회의를 부르는 데서 그쳤다면, 지금은 그대로 프롬프트가 되어 평균의 결과물을 부릅니다.


덧붙이면, 벌리는 구간의 가장 좋은 도구는 뜻밖에도 침묵입니다. 백지가 개인에게 하던 일을 침묵이 회의에서 합니다. 질문을 던지고 삼 분을 아무도 말하지 않기로 하는 것. 첫 발언은 방의 중력이 되어 이후의 모든 생각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는데, 침묵은 그 중력이 생기기 전에 각자의 생각이 자랄 시간을 법니다. 삼 분의 침묵 뒤에 나오는 첫 발언들은 서로 닮지 않았습니다. 어색함을 견디는 값으로, 첫 발언에 끌려가지 않은 서로 다른 생각들을 얻는 것입니다. 벌리는 구간의 가치는 결국 방 안에 얼마나 다른 상상이 존재하는가이고, 모으는 구간의 가치는 그 다른 상상들이 한 문장으로 수렴했는가입니다. 다르게 벌리지 못한 회의는 모을 것이 없고, 모으지 못한 회의는 벌린 것을 잃습니다.


도구에게 배운 것을 사람에게 되가져오는 일은 그래서 단순한 이식이 아닙니다. 비용 없는 세계에서 익힌 정확함을, 비용이 있는 세계의 어디에 놓을지 아는 일입니다. 입력창의 문법을 회의실에 그대로 가져오는 사람은 유능한 것이 아니라 무례한 것이 되고, 회의실의 문법을 입력창에 가져가는 사람은 평균을 받아 듭니다. 두 세계의 환율을 아는 사람, 그 배치를 아는 사람이 회의실에서 귀해지고 있습니다. 잘 말하는 사람도 잘 듣는 사람도 아닌, 방 안의 안개가 걷혀야 할 순간을 아는 사람. 그 사람이 마지막 오 분에 화면 앞으로 걸어 나가 오늘의 문장을 적기 시작합니다.


회의(會議) 말을 나누는 자리가 아니라 함께 한 문장에 도달하는 일. 그 문장이 그대로 입력창에 들어가는 시대에, 회의실은 어긋남이 드러날 수 있는 마지막 장소가 된다.


mirae_ai_A_monumental_conceptual_artwork_about_collective_thi_8451a364-dec2-4449-acb2-c3a461d905f7_2.png회의 (Meeting) AI Artwork by Lim Jongmin (임종민)


회의의 목적이 말을 많이 나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나의 문장에 도달하는 과정임을 시각화한다.

흩어진 말들은 서로 다른 생각을 품고 있지만, 마지막에는 하나의 문장으로 모여야 한다. 그 문장은 더 이상 회의록이 아니라, 그대로 실행되는 프롬프트가 된다. 흐린 합의는 평균적인 결과를 만들고, 선명한 문장은 하나의 방향을 만든다.


생성의 시대에 회의는 의견을 나누는 자리가 아니라, 모두가 같은 장면을 떠올릴 수 있는 한 문장을 함께 완성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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