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_각출(各出)과 갹출(醵出)

각각의 몫을 내는가, 마음을 모으는가

by인사이트뱅크
우리말 속에 섞여있는 한자어는 단순한 어휘가 아니라 오랫동안 쌓이고 다듬어진 생각의 구조이자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단어의 뿌리를 이해하는 순간, 사고는 정제되고 말은 가벼워지지 않는다.


식사 모임이 끝날 무렵, 계산서를 앞에 두고 자연스럽게 이런 말이 오갑니다. “오늘은 ‘각출’합시다.” 또 어떤 자리에서는 “이번 일은 ‘갹출’해서 돕는 게 좋겠습니다.” 우리는 두 표현을 거의 구분 없이 사용하지만, 한자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분명히 다른 단어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각출(各出)을 글자 그대로 풀면 ‘각자가 제 몫을 낸다’는 뜻입니다. 부담의 단위가 특정한 기준으로 나뉘어 각자[各]에게서 나와야[出] 하는 구조입니다. 회사 부서 회식에서 1인당 얼마씩 나누어 계산하는 경우, 동호회에서 연회비를 정액으로 걷는 경우, 아파트 주민들이 관리비를 세대별로 분담하는 일은 모두 각출입니다.

반면 갹출(醵出)은 ‘모일 갹(醵)’과 ‘날 출(出)’, ‘여러 사람이 뜻을 모아 함께 내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강조점은 ‘각자’가 아니라 ‘모으는 것’에 있습니다. 동네에서 갑작스러운 화재를 당한 이웃을 돕기 위해 성금을 모으는 일, 동기가 큰 수술을 앞두고 있어 십시일반 보태는 경우, 선배의 퇴임을 기념하기 위해 후배들이 정성을 모으는 장면은 갹출입니다. 물론 정해진 금액을 ‘각출’할 수도 있습니다. 갹출에서 중요한 것은 함께 마음을 보탰다는 사실입니다.

아직도 구분이 어렵다면 실제 상황을 조금 더 살펴보지요. 회사 워크숍 뒤풀이 비용을 인원수대로 나누어 계산한다면 그것은 각출입니다. 그러나 같은 팀원이 사고로 입원했을 때 치료비를 돕기 위해 돈을 모은다면 갹출에 가깝습니다. 동창회에서 연간 회비를 정해 걷는 것은 각출이고, 친구의 장례를 돕기 위해 마음을 모아 부의금을 마련하는 것은 갹출입니다. 다만 갹출하기로 결의하고, 그 방법으로 일정액을 정해 각출을 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저녁 모임의 식사비는 과연 누가 낼 것인가?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다면 회비를 걷기 마련인데, 이때 모으는 돈은 각출일까요, 갹출일까요?

흥미로운 점은 ‘각출하자’는 말에는 어딘가 의무의 기운이 서려 있고, ‘갹출하자’는 말에는 뜻을 모으자는 제안의 온기가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식사비를 나누어 내는 것은 ‘각출’이 맞지만, 가령 “오늘은 내가 쏜다!”라고 호기롭게 말한 부장님의 주머니 사정을 고려해 팀원들이 회식비를 모아 내기로 마음을 모았다면 이는 ‘갹출’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두 단어를 엄밀히 구분하지 않고 혼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갹출’은 다소 격식적이고 문어적인 느낌이 있어 일상에서는 ‘각출’을 더 흔하게 쓰는 편입니다. 그럼에도 간혹 쓰임을 정확히 알지 못한 채, 각출이 분명한 상황에서도 ‘갹출’을 고집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앞에서 짚은 대로 갹출의 방법론이 결국 각출인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갹출을 써야 할 자리에 각출을 쓴다고 해서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각출을 써야 할 자리, 이를테면 아파트 관리비나 회비 납부 혹은 시쳇말로 ‘N빵’의 자리에 갹출을 쓰면 의미가 어색해질 수도 있다는 점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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