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는 싼 제품을 내라고 했고, 그는 매번 비싸게 팔 이유를 찾았다
소비자가 제품을 사자마자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무엇일까? 놀랍게도 포장 상자를 찢어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이다. 모두가 제품의 '알맹이'를 어떻게 만들까 고민할 때, 남들이 무심코 버리는 껍데기와 당연하게 참아내는 작은 불편함에 주목한 마케터가 있다.
대원제약 최세진 바카라임의 이야기다. 그는 아무도 의구심을 품지 않던 일상의 익숙한 장면 속에서 남다른 단서를 포착해 냈다. 버려지는 상자, 콧속으로 들어가는 녹가루, 튜브 입구에 묻어나는 연고처럼 남들이 지나친 '한 끝'을 파고들어 정체된 시장의 판도를 완전히 바꿔놓은 다섯 번의 역전극을 소개한다.
동아제약의 혼합 유산균이 연매출 10억 원으로 저가 시장을 이끌던 시절, 팀장은 그에게 그보다 더 싼 제품을 내서 4억 원쯤 팔아보자고 지시했다. 하지만 그는 저가 시장의 한계를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아무리 제품을 잘 뽑아내도 기대 매출의 천장은 10억 원을 넘기 어려웠기에, 타사 카피 대신 선두 주자를 꺾을 수 있는 새로운 돌파구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가 집중한 것은 소비자가 제품을 구매하자마자 무심코 버리는 포장재였다. 유산균 박스는 집에 도착하는 순간 찌그러져 쓰레기통으로 들어가기 일쑤였다. 디자이너와 마케터가 헌신을 기울여 만든 800원짜리 지함 박스가 아무런 가치를 제공하지 못하고 버려지는 현실이 그에게는 결정적인 단서로 보였다.
그는 버려질 종이 박스 대신 실생활에서 재활용이 가능한 락앤락 밀폐용기를 패키지로 채택하는 역발상을 제시했다. 온라인 최저가를 확인한 뒤 락앤락 본사와 직거래를 추진했으나, 국내 물량 소진으로 인도네시아 공장의 전용 생산 물량을 1년 치 통째로 발주해야 하는 허들에 직면했다. 그는 자신의 예측을 믿고 임원진을 설득해 전량 수급 계약을 성사시켰다.
용기 구조에 맞춰 기존 60포 대신 70포를 담아 열흘 치를 더 얹었고, 수월하게 떨어지는 전용 라벨지까지 적용해 제품을 출시했다. 버려지던 패키지를 지속 가능한 가치로 전환하자, 10억 원이 한계라던 저가 시장의 틀을 깨고 첫해 12억 원, 이듬해 20억 원의 매출을 기록하며 프리미엄 시장으로 진입했다.
중외제약 근무 시절, 그는 공장 수율을 맞추기 위해 자사 공장에서 위탁 생산하던 현대약품 시노카의 카피 제품을 내라는 지시를 받았다. 시노카의 연매출은 2억 원 규모였다. 똑같은 성분과 용기로 제품을 출시하면 치열한 가격 하한선 경쟁에 휘말려 기대 매출이 2억 원을 넘지 못할 것이 뻔했다. 그는 개발팀에 한 달의 시간을 요청한 뒤 새로운 대안을 찾아 나섰다.
그가 발견한 해답은 프랑스 네메라(Nemera) 사의 클로징 팁 용기였다. 평소에는 입구를 막아 세균과 이물질 오염을 차단하고, 내부 스프링 구조를 개선해 기존 용기에서 발생하던 녹가루 분사 위험을 해결한 고기능성 디바이스였다. 그러나 이 용기는 기존 용기보다 단가가 1,000원이나 더 비쌌다.
소비자가가 약 5,000원 수준인 카테고리에서 1,000원의 원가 상승은 막대한 위험 부담을 의미했다. 하지만 그는 출혈 가격 경쟁 대신 확실한 가치를 전달하는 프리미엄 전략을 택했다. 아이의 콧속으로 들어갈 세균과 녹가루를 걱정하는 부모들을 명확한 타깃으로 설정해 임원진을 설득했다.
경쟁 제품 대비 2배 높은 가격으로 출시된 '베베클'은 시장에 강력한 인상을 남겼다.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명확한 안전성과 기능성을 인정받으며, 수입 제품이 독점하던 시장에서 빠르게 추격하여 단숨에 시장 2위 브랜드로 자리를 잡았다.
멍 치료제 시장에 후발주자로 진입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을 때, 선발 주자들은 여성의 다리 멍을 강조하는 마케팅으로 시장 점유율을 견고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동일한 메시지로 후발 진입을 시도한다면 가격 할인 외에는 선택지가 없는 불리한 구도였다.
그는 멍을 가장 빠르게 없애고 싶어 하는 진짜 니즈가 어디에 있는지 재검토했다. 그리고 성형수술이나 시술 후 얼굴 및 눈가에 남는 멍 케어 영역을 발견했다. 하지만 단순히 "얼굴 멍에 좋다"는 스피치만으로는 소비자를 설득하기에 부족함을 느꼈다.
그는 사용 과정의 세세한 불편함에 주목했다. 연고를 손으로 바를 때 발생하는 끈적임, 튜브 입구로 흘러나오는 제형, 그리고 손에 존재하는 세균이 민감한 얼굴 피부에 옮겨갈 수 있다는 찜찜함이 주요 원인이었다. 그는 화장품 업계의 고급 아이크림용 '핑거팁(Finger-tip)' 용기를 제약업계 최초로 적용했다.
손을 대지 않고 눈가에 직접 바를 수 있는 '노블루겔'은 경쟁품 대비 1.5배 높은 가격에도 불구하고 단숨에 시장을 사로잡았다. 성형외과와 피부과 인근 약국을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되며 '성형 후 프리미엄 케어'라는 독자적인 카테고리를 구축했다.
"팔아봐야 손해다." 연매출 17억 원에 반품률이 12%에 달하던 다회용 인공눈물 브랜드 '아이드롭'에 대한 내부 평가는 절망적이었다. 담당 전임자조차 다회용 시장의 종말과 일회용 시장의 도래를 예견했다. 당시 이 시장은 세 브랜드가 나눠 갖고 있었는데, 로토가 독보적 1위였고 자사 제품은 후발 아이미루와 2위를 다투는 처지였다.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사실상 꼴찌라고 불렀다.
그는 제품을 담당하자마자 독하게 목표를 세웠다. 거대한 자본과 유통망을 가진 1위 브랜드를 이기기 위해 제품의 아주 미세한 요소까지 비교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남들이 전혀 신경 쓰지 않던 보존제 성분의 결정적 차이를 발견했다.
경쟁사 제품에 쓰인 '염화벤잘코늄'은 입자가 작아 소프트렌즈에 흡착되므로 렌즈 착용자의 사용이 불가능했다. 반면 자사 제품의 '클로르헥시딘'은 분자 구조가 크기 때문에 렌즈를 착용한 상태에서도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그는 이 단 하나의 차이에 사운을 걸고 10~20대 여성 렌즈 착용자층에 모든 마케팅 역량을 집결했다.
결과는 파격적이었다. 담당 4년 만에 연매출 100억 원을 돌파하며 회사의 일반의약품 첫 블록버스터 브랜드로 성장했다. 60억 원 규모에 불과했던 전체 시장 파이를 150억 원까지 확대시켰고, 더 이상 성장할 수 없다던 브랜드의 한계를 깨부수며 다회용 시장 1위로 올라섰다.
대원제약으로 자리를 옮긴 그에게 부여된 과제는 상위 5개 브랜드가 점유율 85%를 차지하고 있던 습윤 밴드 시장이었다. 후발주자가 들어갈 자리가 전혀 없어 보이던 그 시장에서, 그는 선두 주자들이 당연하게 여기던 제품 전제에 질문을 던졌다.
선발 브랜드들은 하나같이 가성비를 내세우며 "상처 크기에 맞게 가위로 잘라 쓰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가 피를 흘리며 울고 있는 긴박한 상황에서 가위를 찾고, 크기를 재고, 모서리를 다듬는 과정은 소비자에게 엄청난 번거로움과 스트레스를 유발했다.
그는 새로운 기능을 추가하는 대신 고객의 번거로운 행동을 하나 지워버리는 방식을 택했다. 제품을 미리 잘라둔 규격으로 제공하는 '프리컷(Pre-cut)' 방식을 제안하고, 제조사를 설득해 진입 장벽이 될 독점권까지 확보했다.
"가위 찾기 귀찮은 사람 일부만 잡겠다"는 직관적인 접근으로 탄생한 '큐어반 H 커팅'은 출시 이후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고객의 행동 절차를 단순화해 준 이 제품은 현재 브랜드 내 최고 매출을 기록하는 대표 제품으로 완전히 안착했다.
최세진 바카라임이 거둔 다섯 번의 성과는 거창한 신기술이나 막대한 예산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것은 모두가 당연하게 버리던 포장재, 모두가 참아내던 미세한 불편함, 그리고 제품 설명서 구석에 묵혀 있던 성분 한 줄을 재해석한 결과였다.
시장에서 후발주자가 선두를 뒤엎는 동력은 기존 제품과의 단순한 스펙 싸움이 아니다. 남들이 관성적으로 지나치는 소비자 행동의 빈틈을 포착하고, 그 한 끗에 모든 자원을 집중하는 실행력이 판도를 바꾼다.
절대 깨지지 않는 시장이나 해결 불가능한 제품은 존재하지 않는다. 제품과 서비스, 그리고 플랫폼 안에 잠들어 있는 고유한 단서를 어떻게 발굴하느냐에 따라 꽉 막힌 시장을 뚫어내는 100억 원짜리 반전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