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티로더와 로레알이 한국 제조사로 달려가는 이유
2026년 7월 28일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한·브라질 비즈니스 라운드테이블이 열렸다. 현대차와 포스코, 삼성과 LG 같은 중화학·IT 중심의 전통 재벌 대기업들이 메운 자리에 화장품 기업 경영진 네 명이 어깨를 나란히 했다. 아모레퍼시픽홀딩스 이상목 사장, 에이피알 김병훈 대표, 구다이글로벌 천주혁 대표, 실리콘투 김성운 대표가 그 주인공이다. 대통령의 국빈 방문 경제사절단에 뷰티 산업 최고경영진이 이처럼 대거 합류한 것은 업계에서도 매우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그로부터 보름 뒤, 서울에서 열린 디지털마케팅연구회 모임에 선 한국콜마 김진호 전무는 이 장면을 가장 먼저 언급했다. 뷰티 산업에 30년 넘게 몸담으며 단 한 번도 목격하지 못했던 생소하면서도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풍경이라는 회고와 함께였다.
그는 1994년 아모레퍼시픽에 입사한 이래 헤라, 아이오페, 라네즈 등 간판 브랜드의 마케팅을 두루 거친 베테랑이다. 특히 세계 화장품 시장에 존재하지 않던 쿠션 파운데이션 카테고리를 창조하며 전 세계 여성들의 메이크업 루틴을 바꾼 아이오페 에어쿠션의 개발과 론칭을 주도했다. 이후 신세계그룹 전략실 뷰티총괄 상무로서 뽀아레와 연작을 기획·개발해 시장에 안착시켰고, 현재는 글로벌 제조 생태계의 중심인 한국콜마 마케팅크리에이티브본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브랜드와 유통, 제조라는 뷰티 산업의 3대 축을 모두 경험한 시선에도 상파울루의 풍경은 산업의 패러다임이 완전히 이동했음을 알려주는 신호탄이었다.
지난해 한국 화장품이 넘어서지 못한 산은 프랑스 하나뿐이었다. 식품의약품안전처가 발표한 실적에 따르면 2025년 한국의 화장품 수출액은 114억 1,757만 달러를 기록했다. 2012년 10억 7,000만 달러 수준에 불과했던 시장 규모가 불과 13년 만에 10배 이상 폭증한 셈이다. 이로써 한국은 글로벌 화장품 수출국 순위에서 미국을 제치고 프랑스에 이어 세계 2위로 올라섰다. 상승세는 올해에도 이어져 상반기 잠정 수출액만 전년 동기 대비 27.3% 늘어난 70억 달러를 달성했다. 이 추세가 유지된다면 올해 연간 수출액은 130억 달러를 넘어 최대 145억 달러 안팎에 이를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단순한 수출 총액보다 더 눈여겨봐야 할 지점은 거대 소비국의 수입 통계다. 미국국제무역위원회 집계 기준 2025년 미국이 한국으로부터 수입한 화장품 규모는 18억 225만 달러로, 2위인 캐나다를 압도하며 2년 연속 1위를 차지했다. 일본 수입화장품협회 통계에서도 한국은 1,417억 7,000만 엔을 기록해 1,048억 6,000만 엔에 그친 프랑스를 4년 연속 제쳤다. 세계 최대 시장인 미국과 주요 시장인 일본에서 뷰티 종주국 프랑스를 밀어냈다는 선언이 객관적인 수치로 입증되고 있는 것이다.
이 성장의 이면에는 한국 뷰티 산업 특유의 거대한 생태계가 자리 잡고 있다. 대한화장품협회 자료 기준 2025년 말 국내 바카라임판매업자는 2만 8,412곳, 제조업자는 4,158곳에 달한다. 거대한 중국 시장 전체에 형성된 제조 인프라 규모에 비견될 만큼, 국내에는 이미 방대한 수준의 제조 인프라와 수많은 브랜드 사업자가 밀집해 있는 셈이다.
제품을 만드는 곳도, 브랜드를 내걸고 시장에 뛰어드는 곳도 유례없이 많은 고밀도 생태계다. 인프라의 저변과 시장 참여자가 함께 불어난 이 구조야말로 K뷰티의 동력이자, 뒤이어 등장할 비즈니스 셈법을 이해하기 위한 결정적 전제가 된다.
발표에서 가장 강한 감정이 실린 대목은 단연 시가총액 이야기였다. 한국거래소 집계 기준, 강연 닷새 전인 8월 7일 종가로 에이피알의 시가총액은 14조 3,950억 원을 기록하며 코스피 56위에 이름을 올렸다. 같은 날 아모레퍼시픽은 7조 원대, LG생활건강은 4조 원 안팎에 머물렀다. 60년 넘게 한국 화장품 시장을 양분해 온 전통의 두 거인을 합쳐도 에이피알 하나에 미치지 못한 셈이다. 격차가 가장 벌어졌던 지난 5월 12일에는 에이피알이 15조 5,556억 원을 기록할 때 두 회사의 합산 시가총액은 11조 2,461억 원에 그쳐, 그 차이가 4조 3,000억 원을 넘어서기도 했다.
창업한 지 10년 남짓 된 신생 기업이 업계의 판도를 흔들어 놓은 것이다. 김진호 전무는 오랜 세월 시장을 일궈온 기존 업계로서는 자존심이 상하고 충격적인 일이지만, 결론적으로 이들이 시장에서 잘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고 솔직한 심경을 밝혔다. 아모레퍼시픽 팀장 시절 받아들였던 신입사원들이 어느덧 40대가 되어 연이어 창업 소식을 전해 온다는 회고도 덧붙여졌다.
이러한 주역 교체는 단순히 주가나 기대감에 그치지 않고 실적으로 증명되고 있다. 에이피알은 올해 2분기에만 매출 7,675억 원, 영업이익 1,906억 원을 달성하며 상반기 누적 매출 1조 3,609억 원을 기록했다. 지난해 연간 매출인 1조 5,273억 원을 단 반년 만에 턱밑까지 따라붙은 수치다. 특히 2분기 해외 매출 비중은 92%에 달했다. 강연 당시 에이피알이 올해 연 매출 2조 원을 넘기고 해외 비중 90%를 유지할 것이라던 그의 전망조차 실제 성장 속도에 비하면 보수적이었던 셈이다. 증권가에서는 이미 연 매출 3조 원 돌파 가능성까지 거론하고 있다.
이 흐름은 개인의 인상을 넘어 국가 공식 수출 통계에도 선명하게 찍힌다.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집계한 2026년 상반기 화장품 수출 실적에서 중소기업 수출액은 전년 동기 대비 21.5% 늘어난 반면, 대기업 수출액은 18.8% 줄어들었다. 대기업의 수출은 2022년 이후 4년 연속 감소세다. 같은 기간 대한민국 전체 화장품 수출이 27.3% 성장했음을 고려하면, 시장의 새로운 성장 결실을 인디 브랜드를 비롯한 중소·신생 기업들이 사실상 독식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세대교체의 문 뒤편에는 또 다른 장면이 있다. 2024년 한 해 동안 문을 닫은 화장품 바카라임판매업체는 8,831곳으로, 2020년의 882곳과 비교해 4년 만에 10배로 늘었다. 진입 장벽이 낮아진 만큼 시장에서의 퇴출 속도 역시 가파르게 빨라진 것이다. 발표 도중 그가 청중을 향해 던진 질문은 이 구조를 정확히 겨냥하고 있었다. 시장에 수만 개의 브랜드가 있지만, 정작 소비자가 매장 안에서 직관적으로 기억하고 떠올리는 브랜드는 과연 몇 개나 되겠느냐는 물음이었다.
방한 외국인이 화장품을 구매하는 공간의 축이 완전히 이동했다. 전통의 백화점과 면세점이 있던 자리를 올리브영과 다이소, 무신사가 대체했으며, 김진호 전무는 이 신흥 유통 채널들을 '올·다·무'라는 약칭으로 묶어 설명했다. 이는 단순히 쇼핑 장소가 달라진 것에 그치지 않고 소비의 본질적 동기 자체가 변화했음을 의미한다. 10년 전 중국 보따리상이 면세점 매대를 휩쓸던 시절의 기준이 면세 혜택과 대량 물량 확보였다면, 오늘날 외국인 관광객들이 매대 앞에서 따지는 기준은 제품의 실용성과 최신 트렌드, 그리고 합리적인 가격대다.
이러한 이동을 입증하는 통계 수치는 극적이다. 발표 자료에 따르면 서울 성수동을 방문한 외국인 수는 2020년 6만 3,683명에서 2024년 296만 6,472명으로 늘었다. 4년 만에 46배가 넘는다. 문화체육관광부 집계 기준 2025년 방한 외국인 관광객은 1,870만 명으로 역대 최다를 기록했는데, 이들 다수가 명동 대신 성수동으로 향해 팝업스토어와 체험형 공간을 적극적으로 소비하고 있다. 한 달에 한두 번은 직접 성수동을 찾는다는 그 역시 평일 낮에도 거리마다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현장을 직접 목격하고 있다고 전했다.
올리브영은 2026년 5월 29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패서디나에 현지 1호점을 오픈했으며, 개점 전날 밤부터 400미터가 넘는 대기 줄이 들어설 만큼 폭발적인 관심을 모았다. 그럼에도 그는 과거 올리브영이 중국 상하이 시장에서 철수했던 역사와 이마트가 걸었던 선례를 담담히 상기시켰다. 글로벌 시장 개척의 진짜 주역은 유통 플랫폼 그 자체가 아니라 결국 탄탄한 브랜드력이어야 한다는 점을 업계 베테랑으로서 강조한 것이다. 매장 내 콘텐츠 채움과 제품 공급망 유지에 관한 현실적 과제들이 제기되고 있음을 있는 그대로 전하면서도, 플랫폼의 도전을 응원하는 동시에 그 최종 결말을 신중하게 지켜보는 침착한 시선을 내비쳤다.
발표에서 가장 오랜 시간 비중 있게 다뤄진 대목은 인삼이나 쌀 같은 특이 성분이 아닌, 제조자 개발생산(ODM) 시스템이었다. ODM이란 제조사가 자체 연구진과 기술 처방을 바탕으로 기획부터 개발, 용기 수급, 완제품 생산까지 전 과정을 주도해 브랜드사에 공급하는 방식이다. 브랜드사는 마케팅과 유통·판매에만 역량을 집중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핵심이다. 브랜드가 제공한 처방대로 단순 생산만 대행하는 주문자 위탁생산(OEM)과는 명확히 구분된다. 화장품 하나가 시장에 출시되기까지는 기획, 연구개발, 디자인, 생산, 마케팅, 유통, 판매라는 일곱 단계를 거친다. 이 중 앞단의 핵심 네 단계를 ODM 제조사가 통째로 전담하는 셈이다. 결국 브랜드사에 남겨진 몫은 뒷단의 세 단계뿐이다. 현재 한국콜마는 연간 약 5억 8,000만 개의 제품을 생산하며 국내외를 넘어 중국 무석과 미국 등지에 거점 공장을 가동하고 있다.
이 제조 인프라가 만들어낸 진짜 무기는 다름 아닌 속도다. 김진호 전무는 최근 인디 브랜드들이 제품 기획부터 시장 출시까지 걸리는 시간이 보통 6개월, 빠른 곳은 3개월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과거 그가 아모레퍼시픽과 신세계에 재직하던 시절에는 부문장 보고와 대표이사 보고, 수정 검토를 거치며 기본 1년에서 1년 반이 소요됐다. 로레알 같은 글로벌 거대 기업들의 경우 제품 하나를 내놓는 데 여전히 1년 반에서 2년이라는 세월을 쏟아붓는다. 이러한 시간차는 베테랑의 실무 경험에 기반한 진단이자 실제 현장에서 증명되는 사실이다. 대표적 사례로 꼽히는 티르티르의 경우, 미국 유명 크리에이터의 리뷰 하나가 폭발적 반응을 일으키자 순식간에 쿠션 파운데이션 색상을 13호부터 55호까지 30개 라인업으로 늘려 대응했다. 과거 그가 헤라와 아이오페의 메이크업을 담당하던 시절 쿠션 색상이 고작 네 개에 불과했던 점을 고려하면 상상하기 힘든 민첩함이다.
결국 K뷰티를 설명할 때 흔히 쓰이는 성분 서사는 결과일 뿐, 본질적인 원인이 아니다. 인삼과 쌀, 시카 같은 성분은 브랜드가 들려주는 이야기의 재료일 뿐이며, 그 입소문을 불과 몇 개월 만에 완제품으로 바꿀 수 있게 만든 4,100곳이 넘는 제조업체의 인프라가 진짜 동인에 가깝다. 실제 한국콜마는 120개에 달하는 글로벌 컬러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 두고, 고객사가 진출하려는 국가의 피부 톤 특성에 맞춰 즉각적인 라인업을 제안한다. 브랜드사가 마케팅적 감각으로 콘셉트를 결정하기만 하면, 제조사가 단 반나절 만에 실제 견본을 만들어 내놓는 생태계다. 전 세계 어디에서도 찾기 힘든 이 기민한 구조야말로, 그가 정의한 K뷰티 트렌드 리더십의 본질이 새로운 성분의 발명이 아닌 반응 속도에 있음을 명확히 보여준다.
발표의 마지막 대목에서 김진호 전무는 글로벌 거대 기업에 매각된 K뷰티 브랜드들의 씁쓸한 현주소를 짚었다. 에스티로더에 넘어간 닥터자르트와 유니레버에 매각된 카버코리아의 AHC가 대표적이다. 그는 이들 글로벌 본사의 경영진과 마케팅 바카라임자들을 만날 때마다 K뷰티가 성공할 수 있었던 본질적 강점인 특유의 민첩성과 유연성을 제발 살려달라고 당부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복잡한 지휘 체계와 느린 의사결정 프로세스 때문에 현장에서 애를 먹고 있다는 토로는 수년째 반복되고 있다. 아무리 강조해도 거대 조직의 체질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한 가지 거대한 역설이 등장한다. 그가 앞서 공개한 한국콜마의 주요 고객사 명단에는 로레알, LVMH, 에스티로더, 시세이도, 에르메스, P&G 같은 글로벌 뷰티 공룡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심지어 이들이 발주하는 범위는 단순 하청 생산에 그치지 않는다. 현지 시장 트렌드에 맞춘 신제품 개발부터 마케팅 전략까지 한국 제조사와 머리를 맞대고 함께 기획한다. 브랜드사가 제조사에 위탁하는 영역이 기획, 연구개발, 디자인, 생산을 아우르는 핵심 4단계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 명단의 무게감은 완전히 달라진다. 로레알이나 LVMH 같은 거대 기업조차 특정 신제품에 한해서는 자신들의 느리고 경직된 내부 개발 체계를 건너뛰고, 한국 제조사가 완성해 놓은 속도감 있는 결과물을 직접 사서 쓰고 있다는 뜻이다.
이 역설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기업이 바로 에스티로더다. 에스티로더는 닥터자르트를 인수해 자사의 관료주의적 시스템 속에 가두어버린 당사자인 동시에, 한국 ODM 제조사에 신제품을 발주함으로써 스스로 그 답답한 체계를 우회하고 있는 주요 고객사이기도 하다. 강연자는 두 장면을 직접 연결 짓지 않았고 인수 브랜드의 부진을 어디까지나 글로벌 조직 운용의 한계로 설명했다. 하지만 인수한 브랜드 내부에서 잃어버린 속도를 외부 발주라는 돈을 주고 되사는 효율적인 경로가 열려 있다면, 우리에게는 한 가지 근본적인 질문이 남는다. K뷰티의 전매특허인 6개월짜리 제품 개발 주기는 과연 언제까지 한국 브랜드들만의 전유물로 남아있을 수 있겠는가.
국내 인디 브랜드들이 보여주는 압도적인 출시 속도는 창업자 개인의 감각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기획과 처방, 용기 수급, 완제품 생산을 대신해 주는 강력한 한국의 제조 인프라가 뒤를 받치고 있기에 가능하며, 이 인프라는 자본만 있다면 국적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오픈 서비스다. 글로벌 거대 기업들이 한국의 제조 인프라를 직접 활용해 속도의 격차를 무섭게 줄여나갈 때, 과연 한국 브랜드에 남는 궁극적인 차별화 요소는 무엇인가.
그가 정의한 K뷰티는 혁신을 선도하는 트렌드 리더였다. 그러나 55분간 펼쳐진 구체적 근거들을 따라가 보면, 보다 정확한 실체는 세계에서 가장 기민하게 반응하는 민첩한 추종자에 가깝다. 빠른 반응 속도는 분명 강력한 경쟁력이지만, 이는 개별 브랜드의 독점 자산이 아닌 사서 쓸 수 있는 인프라에서 기인한다. 그렇기에 그가 제시했던 3년에서 5년이라는 골든타임은 K뷰티 산업 전체의 수명이 아니라, 그 압도적인 제조 속도와 인프라를 한국 기업들이 독점적으로 누릴 수 있는 남은 유효기간에 대한 냉정한 예측으로 읽혀야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