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병원으로 향한 대기업 인사담당자

길 위에서 안부를 묻다: 어떤 성장의 기록

by조인후

세상에는 가끔 마음 한구석에 부채처럼 남겨진 사람들이 있다. 함께 치열하게 일했지만, 예상치 못한 풍파에 흩어져야 했던 동료들이다. 특히 갑작스러운 퇴사 후 이직한 곳에서도 심리적 부침을 겪으며 잠시 걸음을 멈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안부를 묻는 일을 미루지 않기로 했다. "잘 지내냐"는 한마디는 빠를수록 좋다는 생각에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수신음 끝에 들려온 그의 목소리에는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활기와 단단함이 서려 있었다.


그는 뜻밖에도 한 대형 동물병원에서 인사 전문가(HR Leader)로서 새로운 여정을 시작했다고 했다. 삼성전자라는 거대한 조직에서 잔뼈가 굵은 인사 전문가가, 100명이 넘는 직원이 북적이는 24시간 동물병원으로 자리를 옮긴 사연은 한 편의 드라마 같았다.


그가 이곳을 선택한 결정적인 계기는 원장과의 강렬했던 면접 경험이었다. 2시간 반 동안 이어진 면접에서 원장은 그에게 정형화된 질문을 던지는 대신, 지난 8년간 홀로 병원을 일궈온 철학과 본인이 느끼는 한계, 그리고 앞으로 만들고 싶은 미래를 담백하게 쏟아냈다.


"저는 HR을 잘 모릅니다. 그래서 제가 무엇을 묻고 판단하는 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요. 대신 제가 어떤 부분에서 답답함을 느끼고, 무엇을 함께 만들어가고 싶은지를 말씀드리는 게 더 중요했습니다."


리더의 투명한 고백은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 외부 투자 없이 자력으로 '제이커브' 성장을 그려온 원장은, 이제 단순한 '운영'을 넘어 사람과 문화가 중심이 되는 '경영'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정교한 제도 설계 이전에 병원의 정체성을 체계적으로 세워줄 적임자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급여에 대한 원장의 태도였다. 그는 병원 환경을 고려해 이전 온라인 게임 수준을 조심스럽게 제시했으나, 원장의 답변은 단호했다.


“이전보다 적은 보상을 받으면서 일하는 데 어떻게 동기부여가 되겠습니까? 최소한 전 온라인 게임 수준은 맞춰드려야 하고, 저는 그보다 더 챙겨드려야 당신이 신나서 일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처우에 대한 계산보다 ‘사람의 가치’와 ‘동기부여의 본질’을 먼저 생각하는 리더의 담백한 배려에서, 그는 이곳이 단순한 ‘자영업’을 넘어선 진정한 ‘경영’의 현장임을 직감했다.



출근한 지 이제 막 한 달 남짓, 그는 30여 명의 수의사와 50여 명의 테크니션(동물보건사)을 전수 인터뷰하며 병원의 속살을 들여다보았다. 놀랍게도 그곳엔 정교하게 명문화된 인사 시스템은 부재했지만, 구성원의 80% 이상이 동일한 가치관과 언어를 공유하고 있었다.


가장 경이로운 지점은 수의사와 테크니션 사이의 수평적 파트너십이었다. 일반적인 병원 구조에서는 의사가 독점적인 권한을 갖고 스태프는 보조적인 업무에 그치기 마련이지만, 이곳의 수의사들은 인터뷰 내내 테크니션들의 전문성을 치켜세우며 그들을 ‘함께 환자를 살리는 동료’로 대우하고 있었다.


심지어 테크니션들 스스로가 “우리가 이대로 머물러서는 안 된다”며 자발적으로 직급 체계를 설계하고 교육 커리큘럼을 만들어 온 기록은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비록 세련된 제도적 장치는 부족할지언정, 서로를 존중하며 성장을 갈구하는 이들의 기초 체력은 그가 여태껏 거쳐온 어떤 대기업보다 견고했다.


통화를 이어가는 내내 그는 "사람들이 너무 훌륭해서 연구 대상"이라며 들뜬 목소리를 감추지 못했다. 인터뷰 내용을 정리하고 분석하는 과정 자체가 너무 즐거워 가슴이 두근거린다는 그의 고백에서, 나는 한 사람이 자신의 전문성을 온전히 쏟아부을 수 있는 적기를 만났음을 느꼈다.


그의 목소리가 밝아질수록 내 마음에도 환한 불이 켜지는 듯했다. 그간의 염려가 무색할 만큼, 그는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가치를 온전히 알아봐 주는 훌륭한 터전을 찾아냈다. 이제 그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나 격려가 아니라, 그가 마주한 이 가슴 벅찬 시작을 함께 기뻐해 줄 동료의 진심 어린 박수일 것이다.


비록 우리가 서 있는 위치는 달라졌지만, '사람이 곧 전부'라는 믿음을 가진 이들이 결국 자신과 닮은 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내게도 큰 위안이자 기쁨이었다. 그의 새로운 여정이 전해주는 에너지가 나의 내일마저 응원하는 듯한, 참으로 따뜻한 안부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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