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각자의 '두문동'에 갇혀 산다

두문(杜門)을 열고 나온 거인, 황희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by조인후

고려의 충신들이 새 왕조 조선을 거부하며 경기도 개풍의 두문동으로 숨어들었을 때, 그 골짜기를 가득 채운 것은 서슬 퍼런 의리와 죽음보다 깊은 침묵이었다. 빗장을 걸어 잠그고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는 '두문불출(杜門不出)'의 유래가 된 그곳에서, 서른 살의 청년 황희 역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산을 내려왔다. 배신자가 되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권력의 단맛을 잊지 못해서였을까? 아니다. "왕조는 바뀌어도 백성은 바뀌지 않는다"는 동료 선비들의 절박한 권유, 즉 '백성을 위한 도구로서의 삶'을 선택한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각자의 '두문동'에 갇혀 산다. 개인의 이익과 신념이라는 좁은 방 안에 스스로를 가두고 타인과의 소통을 거부하는 이 시대에, 600년 전 빗장을 풀고 세상으로 걸어 나온 황희의 발자국을 다시 추적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차가운 이성 위에 핀 뜨거운 애민(愛民)


우리는 흔히 복지와 안전 시스템을 근대의 전유물로 생각한다. 하지만 황희는 이미 600년 전에 '금화도감'을 설치하여 화재 예방 시스템을 구축했고, '경수소'를 통해 마을의 치안을 돌봤다. 이는 국가가 존재해야 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 즉 '백성의 생명과 안전 보호'라는 명제를 정확히 꿰뚫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의 시선은 언제나 화려한 궁궐의 기와가 아니라, 화마(火魔)에 떨고 도둑을 걱정하는 여염집의 문턱에 머물러 있었다. 한성부 대화재 이후 슬퍼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일사불란한 대응 체계를 만들거나, 소 도축을 엄금하여 농업 생산력을 지키고 종자 개량을 통해 식량 안보를 챙긴 행보는 국가의 존재 가치를 묻는 재난의 시대인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위로보다 강렬한 울림을 준다.


이러한 황희의 행정은 지독할 정도로 실용적이었다. 그는 감상적인 눈물로 백성을 위로하는 정치가가 아니었다. 강원도 관찰사 시절, 기근이 덮치자 그는 가장 먼저 붓을 들어 숫자를 적어 내려갔다. 마을의 가구 수, 남은 식량, 그리고 백성들의 연령대를 전수 조사하여 노인과 아이, 장정에게 필요한 적정량을 계산하고 배급량을 조절했다. 이 치밀함은 현대의 데이터 기반 행정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그는 농사법을 개량하고 목화와 뽕나무 심기를 장려하며 백성들의 '입을 옷'과 '먹을 것'을 시스템적으로 해결하려 분투했다. 현대인들은 묻는다. "정의란 무엇인가?" 황희는 몸소 답한다. 정의란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굶주리는 이의 밥그릇에 쌀알이 담기게 하는 구체적인 실행력이라고 말이다. 이상주의에 매몰되어 현실을 외면하는 오늘날의 우리에게, 그의 차가운 이성과 뜨거운 애민은 진정한 실용주의가 무엇인지 웅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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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으로는 따뜻한 인(仁)을, 밖으로는 서슬 퍼런 의(義)를


황희를 가장 특별하게 만드는 지점은 그의 유연하면서도 강직한 인격이다. 그는 조선 최고의 권력자인 영의정이었으나, 동시에 신분을 초월한 휴머니스트였다. 노비와 죄수들의 인권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고, 관비가 출산하면 남편에게도 휴가를 주어야 한다는 파격적인 복지 정바카라을 관철시켰다. 집안의 어린 종들이 수염을 잡아당기고 뺨을 때려도 그저 웃어넘겼던 인자함은 단순한 성인군자의 면모가 아니다. 그것은 '사람은 누구나 하늘이 낸 존재'라는 확고한 철학에서 기인한 인격적 여유였다.


그러나 이토록 온화했던 그도 공적인 일 앞에서는 서슬 퍼런 단호함을 보였다. 태종이 큰아들 양녕대군을 폐하고 셋째 충녕대군(훗날 세종)을 세우려 했을 때, 그는 왕의 노여움을 살 것을 알면서도 장자 상속의 원칙을 내세워 강하게 반대했다. 이로 인해 남원에서 오랜 귀양살이를 해야 했지만, 그의 소신은 굽혀지지 않았다.


백성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웠으나 명분과 원칙 앞에서는 임금에게도 바른말을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나이와 지위로 타인을 억누르는 '꼰대'의 문화가 만연한 지금, 황희의 엄격함과 부드러움이 조화된 리더십은 우리가 도달해야 할 인격의 지향점이다.


스스로에게는 엄격하게, 후학에게는 엄밀하게


황희는 자신을 절제하고 다스리는 데에도 엄격했다. 남원 유배 시절, 비가 새는 오두막집에서 멍석을 깔고 지냈지만 개의치 않았다. 정승의 자리에 있을 때도 그의 검소함은 계속되었다. 한 번은 맏아들이 새 집을 짓고 호화로운 잔치를 벌이자, 그는 노발대발했다. "선비가 청렴하여 비가 새는 집도 마다하지 않아야 하는데, 이처럼 거처가 호화로우니 어찌 바른 일을 기대할 수 있겠느냐?"라며 자식을 호되게 꾸짖었다. 편안함과 욕심을 좇다가는 본분을 잊고 인생을 망칠 수 있음을 깊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엄격함은 인재를 키우는 안목으로 이어졌다. 의정부 회의 중, 용맹한 '호랑이 장수'로 이름을 떨치던 김종서 장군이 의자에 삐딱하게 앉아 있었다. 황희 정승은 즉시 "여봐라! 김 대감의 의자가 한쪽이 짧아 자세가 삐딱해지는 모양이다. 얼른 똑바른 의자를 대령하라!"며 큰소리로 꾸짖어 그의 부끄러움을 샀다. 사람들이 왜 유독 김종서에게 엄격한지 묻자, "김종서는 앞으로 나라를 위해 크게 쓰일 인물이기에 더욱 엄격하게 기강을 세워야 한다"라고 답했다. 그의 호통 속에는 조선의 미래를 짊어질 후배를 향한 정교한 애정과 기대가 담겨 있었다.


황희 정승의 또 다른 일화는 즉흥적인 반응을 넘어선 깊은 사고력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한 번은 여러 관리와 식사를 하다가 밥그릇 뚜껑을 열었는데, 그 안에 커다란 벌레가 들어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즉각 화를 내거나 요리한 사람을 불러 죄를 물었을 것이다.


하지만 황희 정승은 조용히 벌레를 빼내 숨긴 뒤 식사를 계속했다. 벌레 때문에 화를 내면 모처럼 모인 식사 자리가 엉망이 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이는 표면적인 현상에 곧장 대응하는 단선적 사고를 절제하고, 인과관계를 겹겹이 따져 최선의 수를 찾아내는 다층적 사고를 택한 것이었다. 이처럼 상황을 한 번 더 깊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태도는 현명하게 일을 처리하는 데 필수적이다. 생각을 거듭하고 깊이 할수록 우리는 즉흥적 감정의 오류에서 벗어나 더욱 바람직한 결론을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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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왜 다시 황희인가?


황희는 90세라는 기록적인 나이로 생을 마칠 때까지 18년 동안 정승의 자리를 지켰다. 세종이라는 위대한 군주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세종에게 황희라는 거울이 없었다면 과연 태평성대가 가능했을까?


우리는 지금 극심한 양극화와 불통, 그리고 가치의 혼란 속에 서 있다. 실력은 있으나 덕이 없고, 덕은 있으나 실행력이 부족한 리더들이 넘쳐난다. 황희는 이 두 가지가 결코 분리될 수 없음을 몸소 증명했다. 그는 비가 새는 초가집에서 살면서도 마음속에는 천하를 담았던 청백리였다. 자신의 안위보다는 공동체의 지속 가능성을 고민했고, 당장의 성과보다는 백 년 뒤에도 작동할 시스템을 설계했다.


황희라는 거울 앞에 선 우리 자신을 보라. 우리는 비본질적인 격식보다 '사람'을 먼저 보는 혜안을 가졌는가? 혹은 막연한 동정을 넘어 세상의 문제를 시스템으로 고쳐낼 집요함을 품고 있는가? 이 물음에 답하는 과정이야말로 황희 정승이 이 시대에 던지는 진정한 메시지다. 600년 전 두문동의 빗장을 열고 나왔던 그 결단이 오늘날 우리 삶의 현장에서 재현될 때, 우리는 비로소 제2의 태평성대를 꿈꿀 자격을 얻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