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8년 3월, 평양 대동문 밖 도축막
무쇠칼이 소의 넓적다리뼈를 내리찍고 나무 도마에 박혔다.
탁, 두들기는 소리가 마당을 갈랐다.
피 묻은 가죽 앞치마를 두른 칠복이 뼈마디를 비틀어 쪼개더니, 핏덩이 튄 숫돌에 칼날을 벅벅 갈아댔다.
"학이. 삼베 석 필 포목전에 넘기구 오라우. 박 영감 그 능구렁이가 또 올이 성기다메 닷 푼 깎으려 들거든, 그냥 지고 도로 오라우."
칠복이 턱 끝으로 마루 구석을 가리켰다. 쉰 목소리에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예, 작은아버지. 다녀오겠습니다."
학이는 새끼줄로 동여맨 베 무더기를 옆구리에 끼고 일어섰다. 거친 무명 치마저고리 깃 사이로 드러난 목덜미는 거뭇하게 그을려 있었다. 뼈마디가 도드라진 손가락 끝은 베틀의 북을 놀리고 실을 잣느라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말씨는 군더더기 없이 덤덤했다.
평양 저잣거리 포목전 앞은 보부상들의 지게와 나귀 떼로 붐볐다.
학이가 베 세 필을 평상 모서리에 툭 내려놓자, 알 작은 안경을 코끝에 걸친 박 영감이 마른기침을 뱉으며 안쪽에서 기어 나왔다. 누렇게 뜬 손가락이 올을 거칠게 쓸어내리며 혀를 찼다.
"망건 짤 틈도 없이 바빴나 보구만 그래. 저번 장새보다 올이 영 성긴데? 대동문 밖 도축막 것들은 소 모가지 딸 줄만 알지, 베틀에 기름칠하는 법은 통 모른단 말이지."
박 영감이 능글맞게 턱짓을 하며 엽전 꿰미에서 세 닢을 쓱 빼놓으려 했다. 학이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베 모서리를 차분히 그러쥐며 당겼다.
"닷 푼이라도 깎으시면 도로 지고 오라셨습니다."
"아, 거 계집아이가 에누리도 없이 매정하기는. 칠복이 그 곰 같은 늙은이가 제 조카딸이라메 아주 셈본을 칼같이 가르쳤구먼."
"올이 성긴 게 아니라 바디를 촘촘히 쳐서 삼이 질깁니다. 만져보셨으니 영감님께서 더 잘 아시겠지요. 도포 짓는 양반 댁에 넘기시면 서 돈은 족히 남기실 텐데요."
학이의 어조는 낮고 잔잔했으나, 한 치의 물러섬도 없었다.
박 영감은 안경 너머로 학이의 굳은 손마디를 힐끗 훑더니, 혀를 끌끌 차며 빼두었던 엽전을 도로 꿰미에 꿰어 평상 위로 툭 던졌다.
"말씨는 개성 여염집 규수처럼 또박또박한 년이 손끝은 영락없는 장삿바닥 독종이란 말이야. 가져가라, 가져가. 칠복이 늙은이한테 내달 장엔 소 혓바닥이나 한 점 에누리해 달래라."
학이는 엽전 열두 닢을 꿰어 묵묵히 허리춤에 찼다.
몸을 돌려 차일 밑을 벗어나려는데, 모퉁이 주막 평상에 봇짐을 부려놓던 보부상 둘이 막걸리 사발을 들이켜며 혀를 차고 있었다.
"동래 쪽에 닿은 배들이 죄다 발이 묶였다더만. 왜놈들 나라에 큰 난리가 났답디다."
학이의 발걸음이 미세하게 느려졌다.
"대마도 상인 놈들 낯짝이 흙빛이여. 에도에 있던 왜왕인지 쇼군인지 하는 우두머리가 싸움에 져서 쫓겨났고, 교토 쪽에 새로 들어선 놈들이 칼을 쥐었다고 난리법석이오."
"그럼 왜관 놈들은 어찌 된대?"
"어찌 되긴. 새로 깃발 꽂은 놈들이 기세가 등등해서, 옛날 약조 따윈 알 바 아니라며 왜관 빗장을 걷어찰 태세라지. 장사치들 쌀길 끊기게 생겼어."
학이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허리춤에 찔러 넣은 손가락이 엽전을 쥐었다 놓았다.
놋쇠 동전들이 맞부딪치며 짤랑, 둔탁한 쇳소리를 냈다.
장바닥의 소란을 등진 채, 그녀는 곧장 지물포 차일 밑으로 걸음을 옮겼다. 베를 팔고 손에 쥔 엽전에서 닷 푼을 헐었다. 먼지 쌓인 멍석 구석에 처박혀 있던 누런 파지(破紙) 한 뭉치, 그리고 손가락 반 토막만 한 마른 먹 하나를 샀다.
밤이 깊자 도축막 마당의 피비린내는 차갑게 굳어갔다.
칠복의 방에서 규칙적인 코골이 소리가 새어 나왔다. 학이의 단칸방에는 찌그러진 사기그릇의 기름 심지만이 가늘게 그을음을 뱉고 있었다.
벽장 안쪽의 낡은 궤짝 뚜껑을 열자, 삼베옷 밑으로 손때 묻은 서바카라들이 드러났다. 관방의 서식들을 조잡하게 베껴 쓴 파지와 서당 훈장이 내다 버린 사서(四書)의 잔편들이었다. 먹물이 번진 한자의 행간마다 좁쌀만 한 글씨로 가타카나 훈독이 빼곡하게 덧칠해져 있었다. 조선의 이두와 언문, 관청 문서의 말투, 그리고 왜국의 문법. 지난 삼 년 동안 그녀는 밤마다 조선의 글자를 소리 내어 씹어 삼키며, 머릿속에서 두 나라의 문장을 끝없이 잇대어 보고 있었다.
학이는 종이 뭉치 밑바닥에서 기름종이에 싸인 비단 보따리를 꺼냈다.
끈을 풀자, 어둠 속에서 짙은 진홍빛 비단 기모노가 묵직하게 펼쳐졌다.
옷자락 밑단과 넓은 소매 끝동에는 서릿발 속에 피어난 듯한 하얀 겨울 동백꽃(寒椿) 무늬가 은실과 흰 명주실로 촘촘하게 수놓아져 있었다. 꽃잎이 떨어진 자리마다 나카노 가문의 정갈한 문양이 서늘했다. 세월을 먹어 붉은 비단의 윤기는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으나, 칼칼하게 풀을 먹여 짠 능라의 결은 여전히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빳빳했다. 빛바랜 금사(金絲)로 테를 두른 흰 꽃잎의 자수가 어둑한 등잔 불빛을 받아 은은히 빛이 났다.
접힌 주름 사이로 아이즈 목랍 냄새가 희미하게 번졌다.
기모노 깃 안쪽에서 낡은 닥종이 한 장이 바스락거리며 무릎 위로 떨어졌다.
삼 년 전 보령 땅을 적시던 흙탕물 냄새가 말라붙은 종이 결 사이로 배어 나왔다.
[3년 전] 1865년 3월, 충청도 보령 월영각(月影閣) 뒷방.
피비린내가 묵은 분내를 덮고 있었다.
갈대밭의 진흙을 털어내지도 못한 채 학이는 월영각 뒷담을 다시 넘어 들어왔다. 밤안개 속으로 기녀들의 낮은 흐느낌이 툇마루 밑을 기어 다녔다.
방 안에는 미약한 등롱 불빛 아래 행수 애월이 누워 있었다. 칼날에 베인 어깨는 삼베로 동여매 두었으나 이미 검붉은 피가 배어나와 이불깃을 흠뻑 적시고 있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가슴에서 거친 풀무질 소리가 났다. 곁을 둘러싼 어린 기녀들은 저고리 소매로 입을 틀어막은 채 떨고 있었다.
학이가 문턱을 넘어서자, 애월의 흐린 눈동자가 천천히 돌아갔다.
"……왔구나." 메마른 입술 사이로 피거품 섞인 음성이 간신히 흘러나왔다.
학이는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애월의 식어가는 손을 그러쥐었다. 애월은 턱 끝으로 머리맡의 자개함을 가리켰다.
"울지 마라…… 궤를 열어."
기녀 하나가 떨리는 손으로 궤를 열자, 마른 종이에 싼 전표와 은화 몇 닢이 드러났다. 애월은 곁에 엎드린 계집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너희 몫이다. 날 밝거든 관아 놈들이 들이닥칠 터이니, 군소리 말고 챙겨서 각자 고향으로 흩어져라. 기생 년 목숨줄 여기서 끝내야지, 더 질질 끌어 뭣하겠느냐."
기녀들이 통곡하려는 것을 애월이 매섭게 눈짓으로 내리눌렀다. 그리고는 학이를 향해 굳은 손을 뻗었다. 닳고 닳은 비단 주머니, 그 안에는 엽전 몇 닢과 금비녀 한 짝, 옥가락지 두 개가 들어 있었다.
"은괴 따위 쥐고 다니다간 눈먼 포교 놈들에게 단번에 멱살 잡힌다. 이건 내 패물이다. 장안 어디에 내놓아도 의심받지 않고 쌀을 바꿀 수 있을 게다."
애월의 숨이 턱 끝까지 가쁘게 차올랐다.
"남쪽은 이미 관군과 왜놈들로 그물이 쳐졌다. 평양으로 가거라…… 서문 밖 도축막에 내 작은아버지가 산다. 백정 소리를 들으며 소나 잡는 천것이나, 세상 율령 따위엔 눈 하나 깜짝 않는 질긴 늙은이다. 내 패물을 보여주면 입을 닫고 너를 숨겨 줄 게다."
애월의 시선이 머리맡 구석, 기름종이에 꽁꽁 싸인 묵직한 보따리로 향했다.
"풀어보아라."
학이가 끈을 풀자 청아한 아이즈 목랍 향기가 번졌다. 어둠 속에서 드러난 것은 눈이 시리도록 붉은 진홍빛 비단 기모노였다. 밑단과 소매 끝동에 흰 겨울 동백꽃이 손으로 그린 듯 정교하게 수놓아져 있었다.
"왜관 장사치 놈들이 밀수로 들여온 것을…… 네 머리칼에 바르던 목랍을 구할 때 함께 사두었다."
애월의 핏기 없는 입술 끝이 비스듬히 올라갔다. 늘 차갑고 표독스럽게 사내들을 흘겨보던 그 기녀의 마지막 실소였다.
"고향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조선 땅에서 썩어 문드러지더라도, 무가의 딸년이라면 관 속에 들어갈 때 입을 제 옷 한 벌쯤은 쥐고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이제 살수 놈들도 다 심판을 받았으니...... 가지고 있다고 해가 될 것은 없을 테니......"
학이는 아무 말도 뱉지 못했다. 애월의 흐려지는 눈이 학이를 똑바로 꿰뚫어 보았다.
"밤낮을 피투성이가 되어 쫓기면서도…… 죽어가는 행수년 하나 보자고 기어코 여길 다시 기어들어 온 미친년……."
애월의 거친 숨 사이로 낮게 물음이 떨어졌다.
"대체 무엇이…… 너를 이 흉흉한 땅에서 버티게 하더냐."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학이는 품속에서 마른 종이 한 조각을 꺼내고, 머리맡에 놓인 붓끝에 먹을 듬뿍 찍었다. 등롱 불빛 아래, 거친 종이 위로 붓끝이 망설임 없이 흘러갔다.
溫氣
먹물이 종이의 마른 결을 타고 검게 번져 나갔다. 애월은 힘겹게 턱을 숙여 그 두 글자를 내려다보았다.
"온기…… 그래, 온기라…… 미련한 년……."
고개가 천천히 옆으로 꺾였다.
학이의 손을 쥐고 있던 손가락은 맥없이 힘이 풀리며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문풍지가 밤바람에 파열하듯 울었다.
평양 도축막의 어두운 단칸방.
무릎 위에 놓인 '溫氣' 두 글자 위로 희미한 기름등잔 불빛이 흔들렸다. 먹선은 이미 삼 년의 세월을 먹고 차갑게 굳어 있었다.
도바·후시미의 패배, 쇼군의 도주, 칼을 쥔 조슈와 사쓰마의 신정부. 바다 건너의 소식이 머릿속에서 맞물려 돌아갔다. 도쿠가와가 무너졌다면, 교토를 피로 물들이며 막부를 지키던 고향 아이즈(会津)의 가문 역시 무사할 리 없었다. 역적의 낙인이 찍혀 도륙당할 운명이었다.
이제 돌아갈 바다 건너의 고향 따위는 영영 사라졌다.
권력을 쥔 낭인들이 조선을 향해 들이밀 것은 이전처럼 쌀을 구걸하던 온순한 서계(書契)가 아닐 터였다. 서양의 함포를 등에 업고 들이칠 오만한 문자와 칼날. 그 칼날을 정면으로 받아내야 할 곳, 바다 끝 초량왜관.
그리고 그곳에서 문자를 방패삼아 국경의 명줄을 붙들고 있을 한 사내가 떠올랐다.
'안동준......'
학이는 종이를 천천히 접었다.
그리고 진홍빛 기모노의 옷깃을 거칠어진 손바닥으로 가만히 쓸어내렸다.
Photo by JIEUN KWON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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