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4년 11월 19일, 추풍령 서편
나카노 치즈루,
숨 너머로 꾹 참은 그녀의 이름이었다.
운문사에서 영남대로를 비껴 소백산맥 줄기를 타고 넘는 초겨울 삭풍은 매서웠다. 잿빛 들녘을 훑고 온 메마른 바람이 살얼음 낀 개울물을 칠 때마다, 감나무 가지 끝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던 검붉은 잎사귀들이 비 오듯 수면 위로 곤두박질쳤다.
때 절은 남색 장옷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그녀는 진흙 묻은 짚신을 끌며 개울가 버드나무 밑을 지났다. 소맷자락 안에는 길가에서 주워 쥔 조약돌 몇 개와, 먹물이 마른 한지 조각만이 바스락거렸다.
"어이쿠, 저건 어디서 온 미물이고? 장옷 꼴을 보이 며칠은 시궁창을 구른 거 같은데!"
바위에 쪼그려 앉아 방망이질을 하던 아낙이 눈을 흘겼다. 얼음장 같은 물에 손이 벌겋게 짓물러 가면서도, 방망이질 소리는 팡, 팡, 얼어붙은 골짜기를 울렸다.
"냅둬라, 여편네야. 집 잃고 길바닥에 나앉은 불쌍한 가시나구만, 소리는 와 질러대노."
옆에서 삶은 빨래를 건져 올리던 늙은 아낙이 방망이를 멈추고 그녀를 건너다보았다.
그녀의 목덜미가 굳었다. 입을 열어 이국의 억양을 흘리는 순간, 관아의 포교들에게 끌려가 목이 달아날 터였다. 그녀는 두 손을 모아 제 목을 가리키며 가느다란 헛숨만을 뱉었다.
"아…… 아, 으……."
"아이고 야야, 벙어리가? 어린것이 어디서 목소리를 뺏기고 이 거친 들판을 헤맨다냐."
늙은 아낙은 혀를 차더니, 품속에서 짚풀로 대충 감싼 감자 한 덩이를 불쑥 내밀었다. 김이 가시지 않은 껍질에 흙먼지가 묻어 있었으나, 굶주림으로 뒤틀리던 창자에는 생명의 온기였다.
"아가, 이거라도 묵어라. 묵어야 살제."
감자를 받아 든 그녀의 손끝이 잘게 떨렸다. 비단 방석 위에서 자라며 한 번도 맡아본 적 없는 냄새였다. 흙비린내와 땀, 그리고 이국 땅의 억척스러운 아낙이 무심히 던진 거친 정이 뒤섞인 냄새.
그녀가 흙바닥에 무릎을 꿇고 이마를 찧듯 절을 올리자, 젊은 아낙이 퉁명스레 쏘아붙였다.
"절은 무슨 놈의 절! 배 채웠으믄 퍼뜩 가라! 관아 포교들 마주치면 시비 걸릴라!"
악다구니 뒤에 숨은 온기를 등 뒤로 받으며, 그녀는 감자를 입에 베어 물었다.
해가 능선 너머로 가라앉자 주막거리에 장작 연기가 매캐하게 깔렸다. 타작을 마친 사내들이 들이켜는 시큼한 탁주 냄새와 구운 도루묵 냄새가 길바닥으로 흘러넘쳤다.
그녀는 주막 담벼락 그늘에 몸을 바짝 붙였다. 보이느니 글도 제대로 못배운 무지렁이들이었으나, 탁주 한 사발과 젓가락 장단 하나에 어깨를 들썩이는 신명을 품은 자들이었다.
"어이, 거기 장옷 뒤집어쓴 각시! 혼자 서서 뭐 하노? 이리 와서 술이나 한 잔 따르지 않고!"
취기에 비틀거리던 건달 하나가 다가와 그녀의 장옷 깃을 거칠게 낚아챘다.
순간 그녀의 호흡이 멎었다. 소맷자락 안의 조약돌을 쥔 주먹에 서늘한 힘이 들어가는 찰나였다.
"이놈이 미쳤나! 어디서 사지 멀쩡한 놈이 길 가던 처자를 건드려!"
평상에서 국밥을 넘기던 큼직한 체구의 장정이 뚝배기를 탁 내려놓으며 일어섰다.
"눈에 뵈는 게 없나? 딱 봐도 말 한마디 못 하는 불쌍한 처자한테 뭔 행패고! 낯짝에 똥칠하고 싶나!"
"뭐라? 네놈이 뭔 상관인데! 저놈의 가시나가 수상해서 그런다! 얼굴이나 좀 보자!"
건달이 악을 쓰며 손을 뻗자, 옆에 섰던 젊은 농부가 건달의 팔통을 으스러지도록 비틀어 꺾었다. 비명이 튀었다.
"그만해라, 문디 자슥아. 동네 망신 그만 시키고 퍼뜩 꺼져라. 멍석말이 당하기 싫으믄."
건달이 욕설을 뱉으며 어둠 속으로 달아나자, 장정이 그녀를 흘깃 보며 툭 던졌다.
"아가, 여긴 술 취한 놈들 천지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산길 넘어 절로 가거라. 어중이떠중이들한테 걸리면 뼈도 못 추린다."
그녀는 조용히 허리를 굽혔다.
칼을 차고 천하를 논한다며 피바람을 일으키던 교토의 번사들보다, 흙먼지를 뒤집어쓴 이 무지한 농부들이 외려 더 반듯하다 생각했다. 눈앞의 약자가 짓밟히는 꼴을 차마 두고 보지 못하는 마음. 그들은 거창하게 무사도를 들먹이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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