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 로 (路)

1865년 1월 26일, 초량왜관

by밤톨


사토 겐지로(佐藤源次郎),

평생 주인의 등 뒤 반 보 물러선 자리에 묶여 있던 사내의 이름이었다.


왜관 북쪽 후미진 별당의 문틈으로는 매캐한 냄새가 흘러넘치고 있었다. 숫돌에 시퍼렇게 칼날을 문지르는 날카로운 마찰음, 가죽 행전을 조여 매는 거친 손놀림, 말구유에 억지로 쑤셔 넣는 마른 꼴 냄새. 이나가키 시노루와 본토에서 건너온 아이즈의 칼잡이들은 폭풍 전야의 짐승들처럼 숨을 죽인 채 각자의 무기를 벼리고 있었다. 핏빛 난출을 예고하는 살기가 좁은 방 안에 팽팽히 고여 있었다.


겐지로는 그 살풍경의 틈바구니에 섞이지 않았다. 그는 홀로 어둠 속을 걸어 설바카라 밑으로 더 가까이 다가섰다.

수십 년 비바람에 삭아 옹이가 옹골차게 박힌 소나무 기둥. 조선과 왜국의 경계를 가르는 금단의 나무벽에 겐지로는 가만히 손바닥을 얹었다. 거칠고 메마른 나무껍질의 감촉이 손바닥의 굳은살을 파고들었다. 마치 오랫동안 다루어 성질을 훤히 아는 사나운 황소의 등판을 어루만지듯, 그의 손길은 차분했다.




넉 달 전 그 가을밤의 기억이 칼날처럼 되살아났다.

정확히 이 자리였다.


그믐밤 어둠 속에서 처음 마주했던 그 여인, 나카노 치즈루.

가쿠잔의 밀명을 받고 숨을 죽인 채 기다리다 마주했을 때, 겐지로는 숨을 들이켰었다. 생각보다 너무도 어리고 가냘팠다. 아이즈번의 상급 무사 나카노 유키노리의 딸이라 했다. 멸문지화. 그 네 글자가 심장에 박히는 순간, 잊으려 발버둥 쳤던 미토(水戸)에서의 유년이 뼛속까지 시리게 되살아났다.


그저 그런 검술에,
늘 출세에 목이 말라 번(藩)의 고관들 발치에서 맴돌았으나,
끝내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했던 흔한 칼잡이.

그는 이런 모습으로 아버지를 기억에서 소환했다.


아버지는 바깥세상에서 얻어맞고 돌아온 열등감을 어린 처자식에게 쏟아놓았다. 매서운 죽도가 어린 겐지로의 어깨를 내리칠 때마다 아버지는 악을 썼다.

"그렇게 쥐는 게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하느냐!"

"그런 굼뜬 칼질로는 평생 흙이나 파먹고 살 놈이다!"

"나는 니 나이 때 이미 검술 시합에서 이름을 날렸어!"

아버지는 아들을 깎아내림으로써 자신의 초라함을 겨우 지탱하는 비루한 사내였다.


그럼에도 어린 겐지로에게 아버지는 세상의 유일한 기준이자 전부였다. 인정받고 싶었다. 아버지를 사랑하고 존경했다. 그 메마른 입술에서 잘했다는 칭찬 한마디를 듣기 위해 손바닥이 터져 피가 엉겨 붙을 때까지 목검을 휘둘렀다. 아버지가 바라던 바로 그 반듯하고 차가운 무사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미토(水戸) 번주는 그런 아버지에게 애초에 살아 돌아올 수 없는 위험한 임무를 지시했다. 다른 누군가였다면 결과는 달랐을까. 실력이 미천했던 아버지의 운명은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 없었다. 이용당하기 위해 쥐어진 칼. 아버지는 변방의 진흙탕 속에서 개처럼 쉽게 베여 죽었다. 번의 그 누구도 그의 죽음을 기억해주지 않았다. 상여를 지킨 것은 가난에 찌든 어머니와 멍하니 앉아 있던 겐지로, 단둘뿐.


그리고 시간이 흘러, 이 곳 사람들은 겐지로를 신토무넨류의 일인자라 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칼끝이 아무리 신묘해진들, 저승으로 가버린 아버지는 더 이상 자신을 바카라망하러 돌아오지 않았다. 원망했으나 사랑받고 싶었던 대상의 부재. 젊은 시절 아버지가 그토록 원하던 형형한 칼을 쥐었으나, 소년 시절 가슴 한복판에 뚫린 시커먼 구멍은 메워지지 않았다. 세상을 용서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그저 개수작으로 보였다.



그런데, 그녀가 나타났다.


설바카라 앞에서 마주한 치즈루는 그에게 거울이었다. 이용당하고 버림받아 할복으로 찢겨나간 아버지. 남은 일족은 모두 참수를 당하고 홀로 도망자가 되어 바다를 건너온 계집.


너는 나의 유년시절을 상기시켰다.


악착같이 살아남아 본들, 가문의 복수를 한들, 한번 잃어버린 세상은 결코 돌아오지 않았다. 그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겐지로는 앞으로 치즈루가 겪어야 할 그 시린 구멍의 깊이가 자신마저 집어 삼키는 듯 느껴졌다.


그러나...
너는 목바카라을 넘기 직전, 내게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던졌다.
비록 세상이 아버지를 버렸을지라도, 너는 세상을 버리지 않겠노라고.


가문이 도륙 났음에도 아버지의 온기를 잃지 않았고, 세상을 등지며 증오를 품지도 않았다.


너의 아버지는 네 속에 여전히 살아 숨 쉬는 등불이었다.
내 속에는 그런 등불이 없었다.


목바카라 너머가 즉시 참형에 처해지는 사지(死地)임을 뻔히 알면서도, 치즈루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설바카라을 기어넘었다. 세상이 목숨과 가문은 빼앗아 갔을지언정, 경계를 넘는 그녀에게는 믿음이 있었다.


그 믿음을...
아직도 그 험한 길 위에서 붙들고 있는가. 치즈루.


겐지로는 비로소 거친 소나무 기둥에서 손을 뗐다. 거친 옹이의 자국이 손바닥에 붉게 남아 있었다.





그 순간, 지축을 울리는 둔탁한 폭음과 함께 관사 지붕이 내려앉았다.

매캐한 유황 냄새와 함께 왜관 관사 지붕 위로 시뻘건 불기둥이 밤하늘 위로 솟았다.

화염이 솟구치자마자 시노루와 아이즈 낭인들이 묵묵히 짚신 끈을 조여 맸다. 모리야마 시게루는 핏발 선 눈으로 왜관의 낭인들을 선동하며 설바카라 정문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보아라! 저 썩어빠진 조선 놈들의 빗장을 부수어라! 대일본국의 무사들이 언제까지 이 좁아터진 목바카라 안에 갇혀 쥐새끼처럼 살 텐가!"


평소 에도 놈이니 사쓰마 촌놈이니 이를 갈며 으르렁대던 사내들이, '대일본국'이라는 기만적인 외침 하나에 홀린 듯 도끼를 치켜들고 목바카라을 부수며 쏟아져 나갔다.


그러나 겐지로의 눈에 비친 것은 다른 광경이었다.

어둠 속에서 조선 군관 박무혁의 거대한 쌍수도가 번뜩일 때마다, 낭인들의 뼈와 살이 무참히 으깨지며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정작 그 불길을 지핀 모리야마는 피를 흘리며 도륙 나는 번사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아버지도…… 저렇게 쓰이고 버려졌던가.'

눈앞의 아수라장을 차갑게 응시하던 겐지로의 턱 끝이 팽팽하게 굳었다.


혼란을 틈타 서쪽 후미진 목바카라 담장으로 소리 없이 빠져나가는 이나가키 시노루의 검은 하오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 뒤를 따르는 살수들의 발걸음은 정확히 북쪽 영남대로를 향하고 있었다.

치즈루를 사냥하러 가는 길이었다.


'지금이다.'


겐지로는 직감했다. 무사로서, 아니 한 인간으로서 제 삶의 궤적을 스스로 선택해야 할 단 한 번의 순간임을.

그는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려 관수왜의 처소로 뛰어들었다. 불길의 공포에 질려 다다미 위에서 벌벌 떨고 있던 관수왜의 앞에 겐지로는 단정히 무릎을 꿇었다. 평생 주인의 명령에 고개만 끄덕이던 칼잡이가, 처음으로 스스로 머리를 조아리며 입을 열었다.


"나으리."

"게, 겐지로! 불이다! 밖이 아수라장이야! 날 호위해야지, 어디를 가려는 게냐!"

"아이즈의 살수들이 난출을 틈타 조선 내륙으로 잠입했습니다. 저들이 조선 땅에서 무슨 음모를 꾸미는지 우리 쓰시마가 알아내지 못하면, 훗날 조정과 막부 양쪽에서 모든 죄를 뒤집어쓰게 됩니다. 소인이 저들의 무리에 섞여 내막을 캐오겠습니다."


관수왜는 제안이란 걸 할 줄 아는 놈이었냐는 듯 넋이 나간 표정으로 겐지로를 쳐다보았다. 밖에서는 목재가 부러지는 굉음과 비명 소리가 빗발치고 있었다.

"가, 가서 죽지만 말게! 내 목숨 줄은 자네 칼에 달렸네!"

"명, 받들겠습니다."


겐지로는 주저 없이 몸을 일으켰다. 평소 품에 두었던 진검 두 자루를 허리에 비껴 차자, 서늘한 쇳소리가 어둠을 갈랐다.

그는 바람처럼 내달려 이미 목바카라의 빗장이 풀려나간 서쪽 설바카라으로 몸을 날렸다.


어둠 속에서 말을 몰 준비를 하던 시노루의 눈매가 가늘게 찢어졌다. 불쑥 나타난 겐지로를 향해 시노루의 손이 허리춤의 단도로 향하려는 찰나, 옆에서 말고삐를 넘기던 모리야마가 낮게 낄낄거렸다.


"칼 거두시오, 시노루 공. 대마번 최고의 검객이오. 저 험한 조선 산천을 뚫고 가려면 길을 아는 날카로운 칼 하나쯤 곁에 두는 게 요긴하지 않겠소."

모리야마의 눈빛은 겐지로의 속내를 꿰뚫어 보고 있는지, 아니면 그저 이용할 패로 여기는지 알 수 없을 만큼 기묘했다.

겐지로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묵묵히 시노루의 등 뒤 반 보 물러선 자리에 섰다.


설바카라을 넘었다.

말발굽이 서리 내린 땅을 박차며 설바카라 반대편 흙바닥으로 뛰어내렸다.

얼어붙은 조선의 땅을 딛는 순간, 넉 달 전 바로 이 자리에서 진흙 묻은 짚신을 질질 끌며 목바카라을 넘던 치즈루의 나지막한 음성이 삭풍을 타고 귓가를 때렸다.


사토상, 다음에 뵐 때까지 부디…….


겐지로는 고삐를 쥔 손아귀에 으스러지도록 힘을 주었다.

말발굽 아래로 차가운 흙먼지가 솟구치며, 아이즈의 살수들과 함께 대마번 최고의 검객은 어둠 속의 영남대로를 향해 맹렬히 빨려 들어갔다.



Photo by Shraddha Agrawal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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