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5년 1월 25일, 동래 본청
역관 별당의 등잔은 기름 타는 매캐한 냄새를 짙게 피워 올렸다. 창호지 문풍지가 겨울 삭풍에 잘게 울었으나, 방 안에는 닥종이 넘어가는 건조한 소리만 낮게 깔렸다. 이경(二更)을 훌쩍 넘긴 시각, 관아 주변의 인기척은 썰물처럼 빠져나가 사위가 고요했다.
동준은 만석이 구해온 필사본 관방 지도를 작은 소반 위에 펼쳐두고, 운문사가 있는 청도부터 영남대로를 지나 삼남의 갈래로 이어지는 산세를 훑어 내려갔다.
검문이 삼엄한 조령(鳥嶺)을 피해 추풍령 서편으로 소백산맥을 넘어, 영동과 옥천의 산간로를 눈으로 훑었다. 마침내 손가락 끝이 결성(結城), 홍주(洪州), 보령(保寧)으로 이어지는 서해안의 후미진 포구와 구릉 능선 위에 멎었다. 치즈루가 산속 암자를 떠난 지 어느덧 석 달. 관가의 서슬 퍼런 눈길을 피해 걷고 또 걸었다면, 바다를 낀 이 외딴 갯마을 언저리까지 흘러들었을 터였다.
동래 관아에 묶인 역관의 몸으로는 직접 말을 몰아 그녀의 뒤를 쫓을 수 없었다. 그녀의 정체가 관헌의 손에 드러나는 순간, 그녀는 양국의 약조에 따라 즉시 참형에 처해져 설바카라 문 앞에 목이 걸릴 것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관아의 눈을 피하면서도 그녀를 건져낼 유일한 방바카라. 그것이 과연 무엇인가.
"나으리, 요기는 하셔야지요. 이러다 몸 상하십니다."
만석이 식은 숭늉 사발을 조심스레 내려놓으며 방 안의 기색을 살폈다. 목소리는 낮았고, 쓸데없는 사족은 얹지 않았다. 동준이 지도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자네가 가져온 지도 말일세."
"그 여인의 자취가 좀 잡히십니까."
"도보로 넘을 만한 고갯길들을 짚어보는 중이네. 영남대로를 피해 호서 산간으로 가지 않았을까 하네."
"……험한 길을 택했군요. 어디 산골 주막이나 인심 좋은 약재상이라도 만나 눈비나 피하고 있으면 좋겠습니다."
만석이 짧게 숨을 들이쉬며 굳은 표정으로 섰다. 동준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만석을 똑바로 응시했다.
"만석이 자네, 왜인이 조선 땅에 발을 들이는 방도가 몇 가지나 되는지 아는가."
"왜관의 설바카라을 기어넘는 월경(越犯) 아니겠습니까. 발각되면 즉시 참형이니…… 그 처자 생각만 하면 저도 밤마다 잠이 쉬이 오지 않습니다."
"설바카라 말고. 조선 땅에 왜인이 합법적으로 들어오는 길이 하나 더 있네."
만석의 미간이 좁아졌다. 잠시 생각을 굴리던 그가 조용히 답을 올렸다.
"설바카라을 넘는 게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 있습니까? 소인은 잘……."
"표류민(漂流民)."
동준의 입술에서 건조한 단어 하나가 떨어졌다.
"해풍을 만나거나, 조난을 당해 바닷길로 넘어오는 경우가 있지."
"아......"
"만약 그 여인이 관군이나 포교의 손에 넘어가 본격적으로 취조를 받기 전, 사역원 왜학통사의 권한으로 내가 먼저 심문을 가로챌 수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지네. 그녀가 스스로 조선말로 자백하지 않는 한, 그 정체가 바다를 건너온 가련한 표류민인지 목바카라을 뚫고 도망친 무가의 딸인지 판단할 사람은, 오직 한 사람, 바로 현장으로 파견되어 그녀의 말을 심문할 왜학통사 뿐."
만석의 턱 끝이 팽팽하게 굳었다.
"설바카라을 뚫고 도망친 탈주자가 아니라, 바다에서 배를 잃고 뭍으로 기어 올라온 가련한 왜국 표류민으로 공문서를 꾸며 본국으로 압송하는 형식. 그것을 해낼 수만 있다면, 조선의 서슬 퍼런 법망 아래서 그 목숨을 온전히 건져낼 수 있네."
만석은 동준의 말을 묵묵히 들으며 사태의 무게를 찬찬히 짚었다. 허나 쉬이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듯 나직이 되물었다.
"허나 나으리, 애초에 그 여인은 본국에서 칼잡이들에게 쫓겨 이역만리 조선으로 숨어든 것 아닙니까. 왜국으로 도로 보낸다면 당장 그들의 손에 목숨을 잃을 텐데요."
"맞네. 열도 본토에는 그녀의 가문을 멸문시키고 여인의 숨통마저 끊으려는 자들이 도사리고 있겠지."
동준이 지도 위 바닷길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하지만 대마도의 노승, '가쿠잔'과 선이 닿는다면 이야기가 달라지네. 애초에 그녀를 숨겨준 장본인이기도 하고. 그녀를 이즈하라 포구에서 비밀리에 인계받아 에도나 교토의 사냥개들이 닿지 않는 외딴 암자로 숨겨줄 수 있다면……."
복잡하게 엉켜 있던 매듭이 비로소 풀려나가는 순간이었다. 법(法)의 테두리를 역이용해 국경의 칼날을 비껴가는 관료적 묘바카라.
"나으리, 허나 그 처자는 스스로 원해서 조선 땅 깊은 곳으로 떠났다 하지 않았습니까?"
"맞네."
"그러면 소리소문없이 어디선가 살아갈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요?"
"운이 좋다면 그렇겠지…… 하지만, 어제 정오 설바카라에서 난출을 저지른 한 왜인의 일죄형(一罪刑, *사형)을 집행하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네. 만약 치즈루가 설바카라 앞으로 끌려온다면…… 나는 그녀에게 일죄를 선고할 수 있을까?" 지도를 든 동준의 손이 묵묵히 떨렸다.
서늘한 자문(自問)이 차가운 공기를 가르고 흩어졌다.
동준은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만석을 돌아보았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제 그만 나가서 쉬게. 날이 밝는 대로 정 부사 대감께 올릴 공문 초안을 잡아야겠네."
"예, 나으리. 밤이 깊었으니 조금이라도 눈을 붙이십시오."
만석은 깊이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문을 닫고 물러났다. 바깥의 삭풍 소리만이 맴돌았다. 동준은 자리에 누웠으나 쉬이 눈을 감을 수 없었다. 머릿속은 이미 삼남의 얼어붙은 흙길 위를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이튿날 찾아간 동래부 본청은 서늘했다.
동준은 입구 곁의 행랑방으로 걸음을 옮겨 망설임 없이 관용 한지를 넓게 펼쳤다. 벼루에 먹을 듬뿍 먹인 붓이 거침없이 내달렸다.
삼남 각 역참의 찰방과 통사들에게 최근 관내에 들어온 왜인 표류민의 인적과 행적을 샅샅이 파악해 보고하라는 공문 초안이었다. 문안 끝에 동래부사의 직함과 붉은 인신(印信)이 찍힐 빈자리를 남겨둔 채 마지막 획을 뗐다. 평소 사역원의 기안 하나에도 몇 번씩 전례를 대조하던 신중함은 없었다. 먹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종이를 쥐고 동헌으로 직행한 동준은, 동래부사 정현덕의 서안(書案) 앞에 불쑥 초안을 내밀었다.
"갑자기 표류민 문건은 왜 그러는가?"
정현덕이 의아한 눈빛을 던졌다. 동준은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고개를 깊이 조아렸다.
"바다 건너 열도의 내전이 극에 달해 흉흉한 기운이 감돌고 있습니다. 난을 피해 바다로 뛰어드는 왜인들의 표류선이 올 봄부터 급증할 것이 분명하니, 변방의 역관들이 사전에 명단을 장악해 두어야 첩자를 가려내고 국경의 잡음을 막을 수 있을 줄 압니다."
정현덕은 대답 대신 붓을 멈추고 동준의 낯빛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이 젊고 영민한 왜학통사를 곁에 두고 지켜본 지 어느덧 삼 년째였다. 평소 같지 않게 서릿발이 선 눈빛 너머로, 관리가 감히 입 밖으로 내지 못할 무언가 위태로운 사연이 도사리고 있음을 노회한 부사가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그러나 정현덕은 끝내 이유를 캐묻지 않았다. 그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뜨며, 묵묵히 동래부사의 관인을 집어 들어 종이 끝에 붉은 낙인을 찍어 내주었다. 쾅,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관인이 찍힌 종이가 동준의 손으로 넘어왔다.
동준은 동래본청 담장을 뒤로하고 바닷길을 따라 한참을 홀로 걸었다. 짐을 실은 배들이 수평선 너머로 아득히 멀어질 무렵에야, 그는 발길을 돌려 공무를 보는 왜관 별당 안으로 돌아왔다.
창살 너머로 잿빛 겨울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차갑게 부서지는 파도 소리 위로, 이명처럼 서늘한 환청 하나가 겹쳐 들렸다.
바다 건너, 제 고향이 보입니다. (海の彼方に、故郷が見えてございます)
동준이 품속 깊이 손을 넣었다. 얼음장 같은 손끝에 낡고 주름진 종이 한 장이 닿았다. 지난가을, 첫 만남. 그녀의 소매에서 떨어졌던 세 잎 접시꽃(三つ葉葵) 문장의 서신.
동준은 종이가 바스러질 듯 주먹을 쥐었다. 소맷자락 틈으로 겨울 바닷바람이 칼날처럼 파고들었다. 손이야 녹이면 그만이지만, 흔적도 없이 사라진 여인이 남기고 간 추위는 아물 줄을 몰랐다.
이튿날 아침, 초량왜관 설바카라(設柵) 앞으로 여섯 명의 왜인이 접근했다.
거친 삭풍을 뚫고 설바카라문 앞으로 앞장서서 걸어 나온 자는 대마도의 통사 모리야마 시게루였다. 정식 통사 복식을 갖추었으나 허리춤에는 시퍼런 진검 두 자루를 비스듬히 차고 있었고, 그 뒤로 삿갓을 깊게 눌러쓴 다섯 명의 낭인이 그림자처럼 따르고 있었다.
"멈추시오."
남색 융복을 입은 별군관 박무혁이 제 키만 한 쌍수도를 비껴 쥔 채 목바카라문 한복판을 틀어막았다. 서늘한 눈매가 모리야마의 미간을 겨누었다.
"설바카라 밖으로는 단 한 발짝도 디딜 수 없소. 물러서시오."
모리야마가 입꼬리를 비틀며 품속에서 관수왜(館守倭)의 서찰을 내보였다. 통사답게 조선어가 유창했다.
"나는 대마도주의 명을 받든 조선어 통사이오. 최근 양국 간의 교역 전례에 중대한 변고가 있어 동래성읍으로 직접 가 정현덕 부사를 뵙고 담판을 지어야겠소. 길을 여시오."
"부사를 뵙고자 한다면 사역원의 왜학훈도를 통해 정식으로 접견 문기(文記)를 넣는 것이 이백 년 법례요."
무혁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목바카라문 곁에 박힌 돌비석, 범월자는 즉시 목을 벤다는 '약조제찰비(約條制札碑)'의 붉은 음각을 턱 끝으로 가리켰다.
"저 비석의 글자가 보이지 않소. 유감이나, 이 금표(禁標)를 넘어 발을 내딛는 순간 이 칼이 자네들의 목을 벨 것이오."
팽팽한 살기가 허공에서 부딪혔다. 낭인 하나의 손이 칼자루로 향하려는 찰나, 모리야마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모리야마는 칼을 뽑는 대신 표독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무혁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들은 돌아가지 않았다. 온종일 설바카라 바로 앞 공터에 버티고 서서, 조롱하듯 팔짱을 낀 채 무혁과 군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듯 노려보았다.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릴 때까지, 그 불길한 침묵의 대치는 이어졌다.
"자정이 가까워진 시각.
뼈를 때리는 대한(大寒)의 북풍 속에서 설바카라 외곽을 순찰하던 무혁의 눈에 이상한 기척이 잡혔다. 어둠 속에서 술병을 덜렁거리며 비틀비틀 목바카라으로 다가오는 왜인 사내 하나.
"거기 서라!"
무혁이 쌍수도를 반쯤 뽑아 올리며 차갑게 호통을 쳤다.
사내는 도망치지도, 놀라지도 않았다. 멈추어 선 왜인이 고개를 젖히더니, 기괴한 냉소를 흘리며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서늘한 예감이 무혁의 등줄기를 타고 내린 찰나였다.
왜관 중심부의 객사와 창고 지붕 위로 매캐한 유황 냄새와 함께 시뻘건 불기둥이 밤하늘을 찢으며 치솟았다.
"불이야! 왜관 안에 불이 났다!"
순식간에 밤하늘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모리야마의 사주를 받은 십여 명의 왜인들이 관사 곳곳에 기름을 붓고 방화를 저지른 것이었다.
"이놈들이 감히……!"
무혁이 군졸들을 이끌고 불길이 솟구치는 왜관 안쪽으로 뛰어들었다. 도끼와 칼을 들고 관아를 부수던 폭도들과 맞닥뜨렸다. 쇳소리와 함께 첫 번째 놈의 어깨뼈가 으스러졌다. 그러나 폭도들은 더욱 길길이 날뛰었다.
왜관 바깥 설바카라문 쪽에서 소나무 기둥이 우지끈 부러지는 굉음이 터져 나왔다. 서른 명이 넘는 왜인 무사들이 쇠도끼와 통나무로 설바카라을 무너뜨리며 밖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백주대낮에도 감히 꿈꾸지 못할 대규모 '난출(爛出)'이었다.
"설바카라을 지켜라! 밖으로 한 놈도 내보내지 마라!"
무혁이 피 묻은 칼을 쥐고 다시 설바카라 앞으로 달려들었다. 어둠 속에서 쌍수도가 번뜩였다. 처절한 육박전이 벌어졌다. 불길이 일자마자 달려온 동래부 군졸들이 가세하여 피비린내 나는 혈투는 겨우 진정되기 시작했다.
가까스로 폭도들을 설바카라 안으로 몰아넣고 목바카라문을 닫아걸었을 때, 헐떡이며 달려온 초관 하나가 사색이 되어 무혁의 귀에 속삭였다.
"군관님…… 서쪽 후미진 목바카라 담장이 뚫렸습니다!"
"뭐라?"
"이쪽에서 불길과 난출로 정신이 팔린 틈을 타, 검은 하오리를 걸친 낭인 대여섯 명이 어둠 속으로 빠져나가 북쪽 영남대로 쪽으로 말을 몰아 달아났다고 합니다!"
무혁의 손아귀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이런 제기랄, 난출과 방화는 미끼였나.”
아수라장 뒤편으로, 진짜 칼잡이들은 이미 조선 내륙으로 홀연히 빠져나가고 없었다.
"모리야마, 이 간교한 왜놈이……!"
무혁의 입술 사이로 탄식이 거칠게 터져 나왔다.
동이 터 오르자 왜관은 거의 폐허가 되어 있었다.
불탄 목재의 매캐한 잿내가 바닷바람에 실려 왔고, 부서진 소나무 목바카라 주변의 흙탕물은 피와 재로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급보를 받고 달려온 동준은 참상을 살피며 부서진 설바카라 잔해를 하나둘 수습하기 시작했다. 비교적 온전한 서쪽 설바카라을 살피던 중, 진흙 속에 반쯤 박혀 있던 쇠붙이 하나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흙탕물을 닦아내자 드러난 것은 검붉은 옻칠이 된 칼자루의 금속 장식(縁頭) 파편이었다. 정교하게 새겨진 문양. 동준이 눈을 크게 떴다.
‘아이즈(会津)…….’
조선과 공식적인 무역도, 사신 왕래도 튼 적이 없는 도쿠가와 가문의 최측근 웅번이 도대체 왜 이곳에 나타난 것인가.
현장에 도착한 정현덕 부사가 동준의 굳어버린 손끝을 보며 물었다.
"안 통사, 그것이 무엇인가? 대마도 놈들의 칼붙이인가?"
동준은 마른침을 삼키며 간신히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조선과 공식 통교를 하지 않는 열도 동북방 아이즈번 무사들의 칼장식입니다. 일찍이 강항 선생의 《간양록(看羊錄)》에도 도쿠가와 쇼군을 최측근에서 호위하는 맹장들의 가문으로 기록된 자들입니다. 결코 이런 변방 왜관에 발을 디딜 자들이 아니옵니다."
말을 마친 순간 동준의 머릿속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아이즈의 살수가 여기까지 와서 굳이 설바카라을 뚫었다면, 목표는 단 하나뿐. 가문의 핏줄을 완전히 끊어내기 위함이겠지. 모든 비밀을 지닌 채 바다를 건너온 바로…….’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오늘 아침까지의 모든 준비는 치즈루가 조선 관헌들에게 잡혔을 경우를 상정하고 있었다. 왜인 살수에게 잡히는 상황을 가정한 것이 아니었다.
"감히 오랑캐 놈들이 관사를 불태우고 국경을 뚫어 조선의 강토를 유린했단 말인가!"
격노한 동래부사 정현덕의 호령이 온 왜관을 울렸다. 얼굴은 이전에 본 적 없이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그는 지체 없이 옷에 아직 핏자국이 마르지 않은 채 우두커니 서 있던 박무혁을 소리쳐 불렀다.
"박 군관! 내 네게 동래부의 날랜 군관 서른 명과 추포 전권을 내릴 것이다. 즉시 삼남대로를 훑어 도주한 왜인 살수 놈들의 목을 베어 오라. 단 한 놈도 살려 바다를 건너게 해선 안 된다!"
"명, 받듭니다."
무혁이 절도 있게 군례를 올리고 마방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무혁이 출정을 위해 말안장을 얹고 쌍수도를 단단히 결속하던 찰나, 숨을 헐떡이며 달려온 동준이 앞을 가로막았다. 사역원의 의관조차 흐트러진 채였다.
"박 군관."
동준의 낮게 가라앉은 음성이 차가운 새벽 공기를 갈랐다.
"도주한 왜놈들 중에 아이즈 출신의 살수가 섞여 있네. 그자의 목적은 탈출이 아니라……. 내륙으로 숨어든 한 왜국 여인을 찾아 목을 베는 것이야."
"왜국 여인? 왜관을 빠져나간 계집이 있단 말입니까?"
"……석 달 전, 내가 몰래 운문사로 빼돌렸던 아이즈 무가의 딸일세."
얼음장 같은 정적이 마방을 삼켰다. 무혁의 눈빛이 차갑게 굳어 들어갔다.
"안 찰방, 방금 내가 뭘 들은 거요? 사역원 관원이 왜인을 빼돌려 숨겨줬단 말이오? 지금 제정신이오? 내 손에 목이 달아나고 싶어 환장을 했소!?"
무혁의 머릿속에 며칠 전 주막에서의 기억이 비수처럼 스쳐 지나갔다.
“아니 설마……. 그날 밤 이야기한 게 진정 사실이었단 말이요?”
동준은 무혁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차분히 말했다.
“보게. 자네더러 국법을 어기고 그 여인을 감싸 달라는 게 아니네. 단지 그 살수 놈이 그녀를 찾아 도륙내기 전에, 먼저 그놈을 베어 넘겨 달라는 걸세. 왜놈 살수가 조선 땅 한복판에서 피를 뿌리고 다니는 꼴을, 자네 같은 무관이 두고 볼 텐가.”
"……."
"그리고…… 혹여 그 여인이 살아있다면, 그저 말없이 지나쳐 주게. 이 부탁을 하려고 왔네. 이 썩어빠진 세상에서, 가문도 나라도 다 잃고 도망친 목숨 하나…… 그냥 산속에서 숨죽여 살다 죽게 내버려 두자는 말이네."
동준의 간절한 음성이 새벽바람 속으로 흩어졌다.
무혁은 말고삐를 쥔 채, 차가운 눈으로 동준을 한참이나 내려다보았다. 말의 거친 콧김이 하얗게 뿜어져 나와 두 사람 사이를 가렸다.
"안 통사."
무혁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조선의 산천을 제집 안마당처럼 짓밟고 다닐 그 왜놈 살수의 목은, 내가 지옥 끝까지 쫓아가서라도 따올 것이오. 그건 동래부 군관으로서 내 목숨을 걸고 집행할 공무요."
무혁은 안장에 묶인 쌍수도의 자루를 투박한 손으로 한 번 툭 쳤다. 둔탁한 쇳소리가 울렸다.
"허나…… 그 왜국 계집을 살려둘지 말지는, 지금 답하지 못하겠소. 내 눈으로 그 계집을 마주했을 때, 조선의 안위를 위협하는 적인지 그저 살아남으려는 가련한 목숨인지는…… 내 칼이 직접 판단할 일이오."
"……박 군관."
"출발한다!"
무혁은 동준의 말을 자르며 거칠게 고삐를 낚아챘다. 뒤를 따르는 부하들의 채찍 소리와 함께 말발굽이 얼어붙은 땅을 박차고 튀어 나갔다.
무혁은 끝내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흙먼지 자욱한 새벽길 너머로 군관의 남색 융복 자락이 칼날처럼 멀어져 갔다.
— 1부, 바카라(柵) 끝.
*이후 회차는 저작권 보호 차원에서 멤버십으로 전환해 발행합니다. 다만 댓글을 남겨주시면, 온라인카지노에 연동된 메일로 2부와 3부 원고를 직접 보내드리겠습니다. (멤버십은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가림막일 뿐입니다.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