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5년 1월 24일, 대마도
수직으로 깎아지른 검은 암벽 사이로 현해탄의 거친 파도가 들이치고 있었다.
본토에서 며칠 밤낮을 달려온 쾌속선 한 척이 삐걱대는 굉음과 함께 이곳 이즈하라(厳原)에 닻을 내렸다. 서양식 범포를 덧댄 검붉은 옻칠의 선체에는 험한 풍랑을 뚫고 온 소금기 어린 성에가 하얗게 엉겨 붙어 있었다.
선착장 나무 잔교 위로 뛰어내린 모리야마 시게루의 옷자락에서 비릿한 바다 냄새가 훅 끼쳤다. 장도(長刀)와 단도(短刀)를 허리에 비스듬히 차고 삿갓을 젖혀 올린 그의 눈빛은 맹수처럼 번뜩였다. 마중 나온 번의 하급 무사들이 무어라 말을 붙이기도 전에, 모리야마는 젖은 흙길을 성큼성큼 짓밟으며 이즈하라 성하(城下) 마을을 가로질렀다.
그에게 포구의 한적한 정취 따위를 눈에 담을 여유는 없는 듯했다. 그가 향한 곳은 대마도주 소 요시요리의 거처인 가네이시성(金石城) 본청이었다.
"멈추어라! 감히 뉘 앞이라고 예를 갖추지 않는가!"
어전으로 통하는 복도에서 경계를 서던 번의 중신들과 가신들이 낯빛을 굳히며 앞을 가로막았다. 다케미쓰(대나무 칼)도 아닌 시퍼런 진검 두 자루를 찬 채 영주의 거처로 직행하는 것은 당장 목이 달아나도 할 말 없는 대역죄였다.
"비켜라."
모리야마는 칼집 끝으로 가신의 어깨를 거칠게 밀쳐냈다.
"교토의 천하가 뒤집혔거늘, 변방 섬구석의 알량한 법도를 따질 겨를이 어디 있단 말인가!"
칼자루의 쇠붙이가 부딪히는 불길한 소리가 회랑을 울렸다. 제지하려 손을 뻗는 번사들을 차가운 눈빛 하나로 찍어 누른 모리야마는 신도 벗지 않은 채 마루로 올라섰다.
거친 손길에 미닫이문이 양옆으로 젖혀지며, 팽팽한 살기를 품은 바람과 함께 모리야마가 늙은 번주의 어전 한복판으로 성큼 걸어 들어갔다. 오만하고 서슬 퍼런 도발이었다.
"오랜만이옵니다, 번주 대감."
모리야마가 다다미 위에 거칠게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칼자루가 바닥에 부딪히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그는 지난가을, 교토 기온의 어둠 속에서 카츠라 코고로와 나누었던 정한(征韓)의 밀약과 다가올 유신(維新)의 판도를 거침없이 토해냈다. 메이지라는 새 시대의 불길이 바다를 건너 조선을 집어삼켜야 한다는 광기 어린 청사진이었다.
그러나 늙은 번주 소 요시요리(宗義和)의 낯빛은 납처럼 굳어 있었다.
"네놈이 교토와 왜관을 쏘다니며 헛꿈을 꾸는 동안, 천하의 판도가 뒤집혔다. 막부의 대대적인 정벌령 앞에 조슈의 존왕파 놈들은 세 가로(家老)의 목을 베어 바치며 무릎을 꿇었어. 지금 천황을 앞세워 막부에 칼을 겨누겠다는 것은 제 목을 작두에 밀어 넣는 짓인 줄을 아는가."
번주가 마른기침을 뱉으며 말을 이었다.
"조선과의 의(義)를 깨뜨리고 왜관의 쌀길마저 끊기면, 이 척박한 섬의 백성들은 무엇을 먹고 산단 말이냐!"
모리야마의 눈동자에 시퍼런 살기가 번뜩였다.
"그렇기에 더더욱 바다 너머의 불씨가 필요한 것입니다! 청국이 서양 오랑캐의 대포에 짓밟히고 열도가 내전의 피로 썩어가는 지금, 안에서 칼을 부러뜨릴 때가 아닙니다. 막부파든 근왕파든, 칼을 쥔 열도의 사내들을 하나로 묶어낼 명분은 오직 조선 정벌, 정한(征韓)뿐입니다."
그는 상체를 불쑥 앞으로 기울이며 뱀처럼 목소리를 낮췄다.
"제게 명분을 주십시오. 제가 당장 초량왜관으로 돌아가, 불만에 찬 왜인들을 사주하여 일제히 설바카라을 부수고 뛰쳐나가는 대규모 '난출(爛出)'을 꾸미겠습니다. 만약 그 밤에 우리 중 하나라도 조선 군졸의 손에 피를 흘리는 자가 나온다면, 에도(江戶, 현 도쿄)와 교토의 여론은 걷잡을 수 없이 들끓을 것입니다."
번주가 파리하게 질린 얼굴로 입술을 달싹이던 바로 그 찰나였다.
어전 뒤편의 장지문이 부서질 듯 거칠게 젖혀졌다. 차가운 쇠 냄새와 함께 삼엄한 살기를 품은 무리들이 다다미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대마도를 감시하기 위해 막부에서 파견한 에도의 특사들과 아이즈번의 낭인들이었다.
번주의 가신들과 막부의 무사들 사이에 일제히 시퍼런 칼날이 반쯤 뽑혀 나오며 서늘한 금속음이 회랑을 긁었다. 방 안의 공기가 단숨에 얼어붙었다. 누구라도 칼날을 마저 뽑아 올리는 순간, 둘 중 한편은 완전히 도륙될 형국이었다.
그 흉흉한 살기의 한복판에서, 아이즈번 출신의 이나가키 시노루(稲垣 篠)가 시커먼 하오리 자락을 펄럭이며 걸어 나왔다. 눈빛은 얼어붙은 우물물처럼 메말라 있었다.
"칼집에 도로 꽂아라. 지금은 막부와 쓰시마번이 서로 피를 흘릴 때가 아니다."
시노루가 서늘한 시선으로 모리야마를 내려다보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네놈 방금, 조선의 왜관에서 대규모 난출을 꾸미겠다 했나?"
모리야마가 허리춤의 칼자루를 틀어쥐며 이를 갈았다.
"막부의 개들이 참견할 일이 아니다."
"아니, 참견해야지."
시노루가 품속에서 날이 바짝 선 단도 하나를 꺼내 들었다. 엄지손가락으로 서늘한 칼날을 느릿하게 쓸어내리는 그의 태도는 상황에 맞지 않게 태연했다.
"우리 아이즈의 칼잡이들도 그 난출에 끼워 다오. 혼란을 틈타 설바카라이 무너지는 밤, 우리가 쥐도 새도 모르게 조선의 내륙으로 스며들게 해 준다면…… 네놈들의 그 불경한 자작극쯤이야 눈감아주지."
번주 소 요시요리가 황망한 기색으로 물었다.
"아이즈의 무사가, 대체 무슨 까닭으로 조선의 험한 내륙으로 숨어들려는 것인가?"
시노루의 손목이 번뜩이는가 싶더니, 칼끝이 번주의 코앞 다다미 바닥을 가차 없이 꿰뚫고 깊숙이 박혔다. 짚단을 찢고 들어간 칼날이 파르르 떨리며 메마른 쇳소리를 토해냈다. 그 서늘한 여운 너머로 시노루의 음성이 낮게 가라앉았다.
"반드시 머리통을 거두어 와야 할 계집이 하나 있어서 말이오."
이즈하라 포구의 외곽,
해풍에 바스러진 석벽 아래에는 낡은 선술집 하나가 위태롭게 바다를 등지고 서 있었다.
짚 처마 끝으로 부서지는 잿빛 포말 너머, 승려 가쿠잔은 낡은 죽립(竹笠)을 깊숙이 눌러쓴 채 식은 차를 목구멍으로 넘기고 있었다. 찻잔을 쥔 마른손 마디마다 묵주가 달그락거렸다. 맞은편 평상에는 겐지로가 미동도 없이 정좌해 있었다. 허리에 찬 긴 칼집이 바닷바람에 스치며 희미한 금속음을 냈다.
"도주(島主)를 알현한 관수왜 나으리의 표정이 썩 밝지 못하더군요."
겐지로가 바다를 응시한 채 건조하게 말을 이었다.
"번(藩)의 재정이 바닥을 드러냈는데, 본토의 칼바람까지 섬을 짓누르고 있으니…… 배가 채워지기도 전에 다시 부산 왜관으로 떠밀려갈 판이오."
가쿠잔은 대답 대신 찻잔을 내려놓았다. 노승의 눈길은 주막 앞을 지나 포구 잔교로 이어지는 비탈길에 멎어 있었다.
질척이는 흙길 위로 한 무리의 사내들이 거친 발소리를 내며 내려오고 있었다. 앞장선 자는 삿갓을 비스듬히 젖혀 쓴 모리야마 시게루였다. 그 뒤를 바짝 따르는 대여섯 명의 무사들은 쓰시마 번사가 아니었다. 검은 하오리를 걸치고 걸음걸이마다 묵직한 살기를 품은 본토의 낭인들. 그 한가운데에서 느릿하게 팔짱을 끼고 걸어오는 사내를 본 순간, 가쿠잔의 앙상한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저자……."
노승의 입술 사이로 서늘한 탄식이 새어 나왔다.
"이나가키 시노루."
겐지로의 시선이 비스듬히 노승을 향했다.
"아는 자입니까?"
"내 일찍이 고잔(五山)을 떠나 아이즈번(会津藩)의 가신들을 가르치고 병법을 논할 때…… 저자의 얼굴을 본 적이 있네. 무가(武家)의 법도 따위는 안중에도 없고, 어둠 속에서 피비린내 나는 살육만을 도맡던 아이즈의 사냥개일세."
가쿠잔의 목소리가 낮고 무겁게 가라앉았다. 죽립 차양 아래로 드러난 노승의 미간이 깊게 패었다.
"치즈루의 아버지가 억울하게 모함을 받아 할복할 때, 그 칼을 건네고 목을 벤 집행인이 바로 저자였어."
겐지로의 눈빛이 칼날처럼 번뜩였다. 그는 흙길을 가로지르는 무리를 다시 응시했다. 남들의 눈에는 그저 흔한 낭인패로 보일지 몰라도, 분명 지독하게 뒤틀린 광경이었다.
"모리야마는 쓰시마의 조선어 통사이자, 최근에는 조슈(長州)의 존왕파들과 어울리며 교토를 쏘다니던 자요. 그런데 지금 금문의 변에서 서로 목을 베어대던 아이즈의 칼잡이들과 나란히 길을 걷고 있소. 칼끝을 겨누던 자들이 어찌 저리 한패가 되어 어깨를 나란히 한단 말입니까."
"물과 기름이 섞였다는 것은……." 가쿠잔이 거칠어진 숨을 내리누르며 겐지로의 소맷자락을 꽉 틀어쥐었다. "그 둘의 원한보다 더 거대한 먹잇감이 바다 너머에 던져졌다는 뜻일세."
"게다가 에도의 직속 관원도 아닌 아이즈 번사들이 이 척박한 섬까지 건너왔다는 건……."
겐지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겐지로의 소매를 쥐고 있던 가쿠잔의 손마디가 하얗게 질려 들어갔다. 노승의 눈동자가 갈피를 잃고 흔들렸다.
"……치즈루."
마른 입술 사이로 바스러지듯 탄식이 새어 나왔다.
"설마 그 아이를 쫓아 여기까지 온 것인가! 저 사냥개는 기어코 바다를 건너 핏자국을 물어뜯으려는 게로군."
겐지로가 말없이 입을 다문 채, 웅성거리며 잔교로 내려가는 무리를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포구 저편에서 닻을 올리는 둔탁한 도르래 소리와 함께 뱃사공들의 거친 고함이 터져 나왔다. 관수왜의 인장이 찍힌 쾌속선 한 척에 모여들었다. 출항을 서두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모리야마와 시노루의 일행이 거침없이 잔교를 밟으며 그 배로 향했다.
겐지로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리춤의 칼집을 비껴 메자 남색 하오리 자락이 팽팽하게 펄펄 날렸다.
"겐지로."
가쿠잔이 젖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저 아수라장에 들어가면…… 자네의 칼 또한 무사치 못할 걸세."
"소인은 관수왜를 지키는 호위무사입니다."
겐지로의 음성은 바다 밑바닥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주인이 다시 왜관으로 건너가는데, 칼이 섬에 남아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그는 노승을 향해 가슴 깊이 허리를 굽혀 단 한 번의 예를 올렸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포구를 향해 긴 보폭으로 성큼성큼 걸어 내려갔다.
나무로 거칠게 얽은 부둣가 잔교 위, 짐을 싣던 모리야마가 발소리를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키만 한 칼을 옆구리에 낀 겐지로가 다가오자, 모리야마의 날카로운 눈매가 가늘어졌다.
"……사토 군 아닌가."
"오랜만이오, 모리야마 공."
겐지로가 차갑게 목례를 건넸다. 번주 밑에서, 그리고 왜관의 관수왜 밑에서 수없이 얼굴을 마주했던 구면이었다.
겐지로의 시선이 모리야마의 등 뒤, 팔짱을 낀 채 이쪽을 죽은 눈으로 응시하는 시노루의 낯바닥을 무심하게 스쳐 지나갔다. 시노루는 비웃는듯한 입꼬리로 응대했다.
"관수왜 나으리께서 도주 전하의 밀명을 받들어 당장 왜관으로 복귀하라 명하셨소. 호위의 직분을 다하기 위해 이 배에 오르겠소."
겐지로의 통보에 모리야마가 헛웃음을 뱉었다.
"번의 제일가는 검객이 함께 가준다니 든든하군. 타게나. 단, 이번 부산 바다는…… 자네가 알던 평화로운 물길이 아닐 터이니."
겐지로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묵묵히 흔들리는 뱃전에 발을 올렸다. 삐걱대는 널빤지 아래로 검푸른 현해탄의 물결이 사납게 부딪혀 깨졌다.
배가 포구를 벗어나 거친 외해(外海)로 접어들자, 살을 에는 북서풍이 돛대를 부러뜨릴 듯 휘감아 돌았다.
선실 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난로 하나 없는 차가운 선창 바닥에서, 사내들은 서로 마주 앉은 채 단 한마디의 말도 섞지 않았다. 흔들리는 호롱불 아래로 장도와 단도의 칼자루들이 미세하게 덜걱거릴 뿐이었다.
시노루는 뱃벽에 등을 기댄 채 품속의 단도를 꺼내 손톱 밑을 파내듯 칼날을 굴리고 있었다. 그의 흐릿한 시선이 이따금 반대편 구석에 정좌한 겐지로의 손매를 훑었다. 손마디의 굳은살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신토무넨류(神道無念流)인가."
시노루가 낮게 읊조렸다. 쇳가루 긁는 듯한 목소리였다.
"조선 놈들 비린내나 맡는 변방 경비병 치고는 제법 칼을 쥐어본 솜씨군 그래."
겐지로는 눈을 감은 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칼자루를 쥔 그의 왼손 엄지손가락만이 코등이를 살짝 밀어 올려 날의 틈새를 한 푼 벌렸다가, 딸깍 소리를 내며 도로 닫았다.
"바다 위에서는 입을 아끼는 법이오. 말이 많은 무사는 대개 물고기 밥이 되더군."
어둠 속에서 시노루의 눈매가 가늘게 찢어졌다. 살기가 팽팽하게 튀었다. 모리야마가 헛기침을 하며 둘 사이에 끼어들지 않았다면, 파도가 덮치기 전에 배 안에서 먼저 핏물이 튀었을 터였다.
현해탄의 검은 파도를 가른 배가 영도(影島) 앞바다의 물길을 돌아 초량포구로 미끄러져 들어간 것은, 칠흑 같은 자정 무렵이었다. 항구의 수면 위로 짙은 해무가 깔려 있었다. 멀리 어둠 속에서 거대한 소나무 말뚝을 박아 세운 초량왜관의 설바카라(設柵)이, 마치 거대한 괴수의 이빨처럼 윤곽을 드러냈다.
닻이 묵직하게 바닷속으로 떨어져 내렸다. 배에서 가장 먼저 내린 모리야마가 삿갓을 깊게 눌러쓰며 왜관의 어두운 골목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등 뒤로 아이즈의 자객들이 소리 없이 발을 디뎠다.
겐지로는 뱃전에 멈추어 서서 설바카라문 너머, 삭풍이 몰아치는 동래읍 쪽의 험준한 산세를 올려다보았다. 칼기름 밴 비릿한 쇳내가 밤안개를 타고 서늘하게 번져 나갔다.
커버사진: Unsplash의 Nichika Sakura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