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5년 1월 20일, 초량왜관
어른 키를 훌쩍 넘는 소나무 기둥들이 빈틈없이 얽힌 설바카라(設柵)은 조일 양국의 쉬이 좁혀지지 않는 간극처럼 박혀 있었다. 살을 에듯 불어오는 대한(大寒)의 갯바람이 목바카라의 갈라진 틈새를 훑고 지날 때마다, 짐승 울음 같은 풍절음만이 굳게 닫힌 경계를 맴돌았다.
그 얼어붙은 적막을 깨며, 불 꺼진 왜관의 좁은 뒷골목에서 시커먼 그림자 두엇이 비틀거리며 걸어 나왔다. 질질 끌리는 나막신 소리와 허리춤에서 덜거럭거리는 칼자루의 쇳소리가 차가운 흙바닥 위를 어지럽게 긁어댔다. 달빛조차 닿지 않는 어둠 속에서 서로의 어깨를 치며 킬킬대는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설바카라 주변으로 바짝 다가서자 둘의 몸에서, 훅 하고 짙은 사케 냄새가 겨울 공기 속으로 끼쳐왔다.
"이깟 나무 울타리 하나 넘는 게 대수인가. 똑똑히 보게나, 내가 단숨에 뛰어넘을 테니."
술에 잔뜩 취한 일본 무사 하나가 허리춤의 칼자루를 덜거럭거리며 목바카라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거친 숨을 내쉬며 기어코 담장을 넘은 그는 결국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반대편 꽁꽁 언 바닥으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담장 안쪽에 남아 있던 다른 한 명이 낄낄거리며 땅에 풀어두었던 일본도를 집어 들었다. 허리띠에 단단히 찔러 넣고는 말을 건냈다.
"바보 녀석. 기어코 일을 저지를 줄은 몰랐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동래 고을에 기생이 널렸다던데, 날 밝기 전까지 계집이나 하나 끼고 다시 돌아오자."
그는 술기운 하나 없이 가볍게 목바카라을 뛰어넘어 착지했다.
두 사내는 주변의 동정을 살피며 헐벗은 겨울 숲으로 숨어들어갔다.
왜관 설바카라이 시야에서 멀어지려는 찰나, 어둠 속에서 거대한 바위 같은 그림자가 길을 막아섰다.
"기유년(己酉年) 이래, 왜관의 설바카라은, 조일 양국이 목숨으로 지켜온 약조거늘……"
낮고 묵직한 조선어가 꽉 물은 어금니 사이로 빠져나왔다.
달빛이 잿빛 구름을 벗어나자, 남색 융복(戎服)을 단정히 차려입은 동래부 군관 박무혁(朴武赫)의 서늘한 얼굴이 드러났다. 그의 두 손에는 제 키만 한 조선의 무기, 쌍수도(雙手刀)가 묵직하게 들려 있었다.
"어째서 이 밤중에 개구멍을 빠져나가려 하는가."
술이 깨 정신이 멀쩡한 무사가 등줄기에 맺히는 식은땀을 느끼며 즉각 칼을 뽑아 들었다. 머리 위로 번쩍 치켜든 일본도의 서슬 퍼런 칼날이 달빛 없는 어둠 속에서 번뜩였다.
"하찮은 조선 놈이!"
무사가 기합을 내지르며 정수리를 향해 단숨에 내리베어 왔다.
그러나 무혁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의 두 손이 묵직한 쌍수도의 자루를 으스러져라 틀어쥐는가 싶더니, 허리 반동을 이용해 거대한 쇳덩어리를 횡으로 후려쳤다. 기교라곤 없었다. 오직 압도적인 무게와 힘으로 공간 자체를 찢어발겼다.
—커엉!
내리꽂히던 일본도가 두 동강 나며 튕겨 나갔다. 궤도를 멈추지 않은 쌍수도의 두꺼운 칼날은 무사의 빗장뼈부터 가슴팍까지 단숨에 으깨며 베어 내렸다. 달이 구름에 가려 피조차 보이지 않았다. 얼어붙은 바닥에 둔탁하게 고꾸라지는 소리만이 들렸을 뿐이다.
"히, 히익……!"
취해 있던 무사가 다리 사이로 뜨거운 소변을 지리며 주저앉았다. 달달 떨리는 그의 손에서 칼자루가 힘없이 미끄러졌다.
무혁은 칼날에 묻은 핏물을 허공에 툭, 한 번 털어낸 뒤 벌벌 떠는 그의 목덜미를 거칠게 움켜쥐었다. 마치 짐짝이나 어린아이를 질질 끌듯, 그는 왜관 설바카라을 향해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묵직한 소나무 문이 닫히며 빗장이 걸렸다.
밤바람만이 거친 돌 문지방에 부딪혀 서늘하게 흩어졌다.
이튿날 아침
간밤의 피비린내가 무색하게, 왜관은 이른 아침부터 상인들의 호객 소리와 화물 수레 구르는 소리로 소란스러웠다. 대마도 측 역관들이 바쁘게 장부를 넘겼고, 칼을 차지 못해 불만이 가득한 낭인들은 볕이 드는 담장 밑에 고목나무처럼 웅크리고 앉아 퀭한 눈으로 허공만 노려보고 있었다.
동준은 무심한 얼굴로 인삼과 구리를 거래하는 객주들 사이의 시비를 가르고 있었다.
"약정은 어제 맺었으나, 은자(銀子)가 먼저 건너온 것은 이쪽이오. 조선 상법의 전례대로 물건을 절반씩 나누시오. (約定は昨日に結ばれ候へども、銀の渡り候ひしは此方が先にござる。朝鮮の商法に任せ、荷は折半に致されよ。)"
운문사에서 돌아온 이후, 동준은 마치 심장 한구석을 도려낸 사람처럼 오직 역관의 실무에만 기계적으로 몰두하고 있었다.
객주들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서는 찰나, 객사 뒤편에서 거친 고성과 함께 칼자루가 부딪히는 소리가 일었다.
"사쓰마의 촌놈이 감히 어디서!"
"막부의 개 노릇 하는 에도 놈이!"
열도 본토의 내전이 토해낸 적개심이 좁디좁은 왜관 한복판까지 튄 것이었다. 왜국 무사 둘이 칼을 반쯤 뽑아 올리며 맞붙으려던 찰나, 커다란 그림자 하나가 벼락처럼 파고들었다.
칼을 뽑으려던 사쓰마 무사의 턱주가리를 손바닥 하나가 사정없이 잡아챘다. 미처 칼을 다 빼내지 못한 무사가 허공으로 붕 떴다가 흙바닥에 처박히는 것과 동시에, 다른 무사의 멱살을 낚아챈 거친 손아귀가 그를 객사 회벽으로 내다 꽂았다. 쿵, 소리와 함께 흙먼지가 풀썩 일며 사내가 벽을 타고 맥없이 허물어졌다.
사위가 얼어붙었다. 낭인들이 침을 꿀꺽 삼키며 물러서는 가운데, 남색 융복을 단정히 여민 박무혁이 흙먼지 묻은 주먹을 무심하게 털어냈다. 그의 등 뒤로, 굵은 포승줄에 굴비처럼 엮인 사내 하나가 무릎을 꿇은 채 덜덜 떨고 있었다. 어젯밤 설바카라을 넘다 무혁에게 산 채로 목덜미를 잡힌 그 취객 무사였다.
"물렀거라! 동래부사 영감 행차시다!"
바로 그때, 왜관 정문 쪽에서 징 소리와 함께 길을 비키라는 군졸들의 날카로운 호령이 장터를 갈랐다.
쩌렁쩌렁한 취타와 벽제(辟除) 소리에 어수선하던 장터의 소음이 일시에 가라앉았다. 군졸들이 양옆으로 왜인과 상인들을 거칠게 밀어내며 길을 텄고, 그 삼엄한 호위를 받으며 관수왜의 처소로 향하던 동래부사 정현덕의 행차가 멈추어 섰다.
가마에서 내린 정현덕의 서늘한 시선이, 흙벽 아래 버티고 선 무혁과 포승줄에 묶인 채 엎드린 왜인을 번갈아 내려다보았다. 부사를 수행하던 사역원 관원들과 기록관들 틈에서, 동준 역시 굳은 얼굴로 걸음을 옮겨 부사의 곁으로 다가섰다.
"안 통사."
정현덕이 설바카라 너머 굳게 닫힌 목바카라문을 바라보며 나직이 탄식했다.
“기유년 약조 이래 왜관을 이리로 옮겨 설바카라(設柵)을 세운지도 어느덧 이백 년 가까이 되었거늘, 저 목바카라은 조일 양국이 서로를 지키기 위해 세운 서릿발 같은 국경선이 아니었던가. 헌데 근래 들어 밤마다 목바카라을 넘나드는 범월(犯越)자들이 부쩍 늘었네. 바다 건너 왜국의 정세가 심상치 않다는 흉흉한 소문이 그저 빈말은 아닌 모양이야.”
"열도 내부의 전란이 임박하여 왜관 내부의 통제가 헐거워진 탓이옵니다, 부사 영감."
동준이 담담하게 답했다.
무릎을 꿇린 왜인의 등덜미를 훑던 정현덕의 시선이, 그 포승줄 끝을 무심하게 틀어쥐고 박무혁의 얼굴로 천천히 올라갔다.. 흙먼지를 뒤집어쓴 남색 융복 너머로 뿜어져 나오는 서슬 퍼런 기세가 여느 고을 포졸이나 군관의 것이 아니었다.
"네가…… 이번에 영남포에서 차출되어 새로 부임해 온 별군관(別軍官)인가?"
무혁이 포승줄을 바닥에 툭 떨어뜨리더니, 절도 있게 군례(軍禮)를 올렸다.
"동래부 별군관 박무혁이라 하옵니다. 간밤 삼경, 설바카라을 넘어 숲으로 도주하려던 왜인 둘 중 한 놈은 현장에서 칼을 뽑고 저항하기에 목을 베었고, 남은 한 놈은 법례에 따라 추궁하고자 산 채로 결박하여 끌고 왔습니다."
정현덕이 무혁의 다부진 체구와 형형한 눈빛을 지그시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의 기상이 참으로 든든허이. 양국의 약조를 어긴 자이니, 관수왜(館守倭)를 불러 마주 앉힌 뒤 법대로 집행할 것이다."
오시(午時), 차가운 갯바람이 부는 설바카라문 앞 공터.
조선 측의 동래부사 정현덕과 역관 안동준, 그리고 대마도 측의 관수왜와 쓰시마 통사들이 차가운 침묵 속에 양쪽으로 마주 섰다. 멍석 위에 꿇어앉혀진 왜인의 뺨 위로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동준은 메마른 목소리로 범월(犯越, 국경을 넘음)의 죄목과 수문 앞 제찰(制札)에 새겨진 일죄(一罪, 사형)의 금조를 낭독했다.
禁標定界之外 毋論大小事 闌出越犯者 論以一罪事
금표로 정한 경계 밖으로, 대소사를 막론하고 목바카라을 뛰쳐나가 지경을 넘은 자는 '일죄(一罪, 사형)'로 다스린다.
이어 촌마게를 틀어 올린 대마도 통사가 칼칼한 왜어 훈독(訓読)으로 같은 조문을 되받아 낭독했다.
禁標定界の外、大小の事を論ぜず、闌出越犯致す者は、一罪に論ずべき事。
금표로 정한 경계 밖으로, 대소사를 막론하고 난출하여 지경을 넘은 자는 일죄에 처할 일.
장부를 덮는 동준의 손가락 끝에 자신도 모르게 힘이 실리며 빳빳한 닥종이 모서리가 거칠게 우그러졌다. 양국 수장의 날선 고갯짓이 오가자, 집행인의 칼날이 허공을 갈랐다.
동준은 숨을 겨우 들이켜며 우그러진 장부의 바카라등을 다시 말없이 손바닥으로 문질러 폈다.
식은땀이 났다.
여러 날이 지났다. 동준은 사역원 별당에 틀어박혀 쓰시마에서 건너온 서계(書契, 외교문서)들을 기계처럼 번역했다. 공무에 필요한 최소한의 문답 외에는 누구에게도 입을 열지 않았다. 찾아오는 객주들이나 동래부의 관원들도 그의 가라앉은 낯빛 앞에서 섣불리 사담을 건네지 못했다.
해가 지고 왜관의 등불이 하나둘 꺼지면, 그는 홀로 바카라상 위에 삼남(三南)의 도로가 그려진 낡은 관방 지도를 펼쳤다. 운문사에서 북으로 뻗은 영남대로, 호서로 꺾어지는 험준한 산길, 나루터와 역참의 이름들을 외우듯 손가락으로 지도를 쉼없이 훑었다.
지도를 접고 왜관을 나와 바깥의 역참 숙소로 발길을 옮겼을 때는, 이미 사경(四更)의 삭풍이 동래 고을을 훑고 지나갈 무렵이었다.
얼어붙은 설바카라문 어귀를 지나치려는데, 장승처럼 서있던 그림자 하나가 인기척을 냈다.
"안 찰방 나으리 아니십니까."
박무혁이 입김을 뿜어내며 물었다.
"어찌 이 야심한 시각까지 왜관 안에 머물다 나오십니까. 관아의 나랏일이 그리도 바쁘십니까."
동준이 걸음을 멈추고 엷은 쓴웃음을 지었다.
"피차 마찬가지 아닌가. 박 군관 역시 이 살을 에는 갯바람을 맞으며 밤을 새우고 있으니."
"소인은 이제 번을 교대하고 숙소로 돌아가 몸을 녹이려던 참입니다."
동준이 잠시 무혁의 얼굴을 응시하다, 나직이 입을 열었다.
"괜찮다면…… 역관 앞 주막에서 탁주 한잔하려는데, 말동무나 좀 되어주겠나."
무혁이 잠시 의아한 눈으로 동준을 보더니, 이내 툭 던지듯 대답했다.
"목구멍에 먼지가 낀 참이었습니다. 사양치 않겠습니다."
손님이 끊긴 새벽, 읍내 귀퉁이의 허름한 주막 봉당에는 기름때 묻은 등잔불만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투박한 사발 위로 거친 탁주가 콸콸 쏟아져 채워졌다.
무혁이 사발을 단숨에 비워내고는 거친 숨을 내뱉었다. 술잔을 천천히 돌리던 동준이 문득 물었다.
"자네는…… 왜인들의 목을 벨때, 혹시 스스로에게 낯설어 본 적이 있는가."
무혁의 곧게 뻗은 서늘한 눈썹 한쪽이 비스듬히 치켜올라갔다. 그늘 깊은 눈매에 순간적으로 날카로운 기색이 스쳤다.
"소인은 동래부를 지키는 무관입니다. 국법을 어기고 칼을 찬 놈들의 목을 베는 것이 내 직분인데, 낯설 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들의 목을 베기 전에, 얼굴을 들여다본 적이 있나?"
"나랏일을 하는데 어찌 그런 사적인 눈길을 준단 말입니까. 게다가 왜놈들은 짐승 같은 야만인들이 아닙니까."
무혁의 단호한 대꾸에 동준은 메마른 미소를 지었다.
"그게 말일세…… 다 그런 건 아니더군."
탁주를 한 모금 넘긴 동준이 시선을 들어 무혁을 바라보았다.
"헌데 자네는 어쩌다 이 변방 구석까지 흘러들어왔는가. 그만한 무예라면 한양의 훈련원이나 금위영에 자리를 잡았을 법도 한데."
무혁이 헛웃음을 뱉으며 빈 잔에 술을 따랐다.
"흘러오고 싶어 흘러왔겠습니까. 대대로 칼을 쥐어온 집안이라 한들, 한양 문벌 대감들 줄타기 판에서 진작에 뿌리 뽑힌 집안이오. 뒷배 없는 놈이 무과를 장원으로 급제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훈련도감이나 포청의 말단 자리 하나 얻으려 해도 권세가 문전에 뇌물 보따리부터 들이밀어야 하는 세상인데. 말 잔등에 먼지나 털어주며 비렁뱅이 노릇 하느니, 차라리 왜놈들 목이나 베며 내 손으로 밥벌이하는 게 덜 비루하지 않겠소."
무혁의 음성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래도 막살고 싶진 않았습니다. 가진 게 칼 한 자루뿐이니, 변방에서 나랏일이라도 바르게 하는 게 내겐 최선이오."
동준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남의 이야기 같지 않았다.
"나 역시……"
동준이 가만히 말을 이었다.
"사대부 집안의 서자로 태어나 잡과(雜科)를 보고 왜학통사가 되었다네. 하지만, 단 한 번도 내가 걷는 이 길을 후회해 본 적도, 비루하다 여긴 적도 없네. 조선의 누군가는 바다 건너 놈들과 말을 섞고 평화를 지탱해야 하니까."
동준의 목소리에 쓸쓸한 무게가 실렸다.
"헌데 가끔…… 그 왜인들에게서 사람의 얼굴이 보일 때면, 생각이 좀 많아지네. 왜국은 임진년 이래 우리에게 철천지원수이고, 왜인들 중에도 조선을 깔보고 넘보는 늑대 같은 자들이 부지기수이지 않나. 허나 그 틈바구니에서도 문(文)과 도리를 알고, 까닭 없는 피를 흘리지 않으려는 자들이 있더란 말이지."
무혁이 기이하다는 듯 동준을 빤히 쳐다보았다.
"나으리께선…… 이 왜관 땅에서 왜인들에게 그런 사람의 얼굴을 보셨소?"
등잔불이 잘게 흔들렸다. 침묵 끝에 동준이 툭 털어놓았다.
"여인을 보았네."
무혁이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농담도 지나치십니다. 왜국의 여인이 여기 어떻게 옵니까? 왜관에 발이라도 들이면 양국 법대로 사형에 처해지지 않소?”
"왜관 밖이라면?"
동준의 눈빛이 흔들림 없이 무혁을 꿰뚫었다.
무혁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순식간에 지워졌다.
"……그건 말할 것도 없지요. 참형(斬刑)이오."
두 사람 사이에 서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무혁은 동준의 잔에 술을 더 권하지 않았고, 동준 역시 더는 말을 얹지 않았다.
무혁은 손에 쥐고 있던 사발을 탁자 위에 소리 나게 엎어놓고는 말없이 몸을 일으켰다.
주막을 나와 각자의 길로 헤어진 뒤, 동준은 묵묵히 새벽길을 걸어 역관 숙소 마루로 돌아왔다.
어둠 속에서 졸고 있던 만석이 화들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나으리, 이 야심한 밤에 어딜 다녀오십니까. 날이 이리 찬데……."
"만석아."
동준이 신을 벗으며 융복 소매를 걷어 올렸다. 목소리가 은밀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내 부탁이 하나 있네."
"예? 말씀하십시오, 나으리."
"날이 밝거든 장터 뒤편 송상(松商)의 지전(紙廛)으로 가보게. 삼남을 오가는 보부상 놈들이 은밀히 쥐고 다니는 노정기(路程記)나, 충청도의 산천이 적힌 관방 지도 필사본을 한 장 구해오게.
만석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예? 지도요? 왜 하필 충청도입니까? 관아의 서고나 한양 관청에 나으리께서 정식으로 청하시면 정밀한 관방 지도를 얼마든지 내어줄 텐데요."
동준이 마루 끝에 걸터앉아 먼 어둠을 응시했다. 차가운 갯바람이 옷깃을 스치고 지나갔다.
"관아의 장부에 남겨서는 안 되는…… 사적인 일일세. 은밀히 구해야 해."
"사적인 일이라니요…… 나으리, 설마."
차가운 새벽 공기 속으로 낮게 가라앉은 한숨과 함께, 부서질 듯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치즈루를 찾아야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