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름날의 환상: 폐회 선언
1899년 7월 29일, 눈부시게 화창한 토요일 아침 10시. 네덜란드 헤이그의 '숲속의 궁전(Huis ten Bosch)'에는 지난 72일간의 길고 험난했던 외교적 줄다리기를 마친 26개국 대표단이 마지막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의 발걸음은 개막일의 팽팽했던 긴장감과는 달리 한결 가벼웠다. 대표단은 최종 의정서와 각종 협약, 선언문들에 서명하기 위해 모였고, 그 역사적인 문서들은 회의장 다이닝룸의 커다란 탁자 위에 펼쳐져 있었다. 전권대사들의 붉은 밀랍 인장이 정성스럽게 덧붙여진 이 아름답고 화려한 문서들은 마치 인류가 폭력의 시대를 끝내고 바야흐로 이성과 법치의 시대로 진입했음을 알리는 거룩한 증서처럼 보였다.
강대국의 콧대 높은 외교관들과 무력을 맹신하던 군사 전문가들조차 이날만큼은 서로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건넸다. 서로의 속내를 의심하며 날 선 공방을 벌였던 회의장은 어느새 방학을 맞이한 학교처럼 홀가분한 공기로 가득 찼고, 지난했던 모든 상황과는 정반대의 묘한 안도감이 흘렀다.
오후 3시에 열린 공식 폐회식에서 노련한 러시아의 수석 대표이자 회의 의장인 드 스탈(de Staal) 남작은 상기된 목소리로 회의의 성과를 치하했다. 강제성 있는 군비 축소에는 실패했을지언정, 전쟁의 참상을 완화하고 국제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할 제도를 발명해 냈다는 자부심이 그의 연설에 배어 있었다.
마침내 그가 나무 의사봉을 두드리며 "여러분, 회의를 폐회합니다!라고 선언했을 때, 민간 평화운동가들은 축배를 들었고 유럽의 언론들은 인류의 위대한 진보를 찬양했다.
그러나 그들이 샴페인 잔을 부딪치며 자축하던 그 순간,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역사는 가장 잔혹한 방식으로 그들의 서명을 조롱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 기만의 시대: 전 세계에 울려퍼진 총성
평화의 제전이 막을 내린 지 불과 3개월 뒤, 헤이그에서 가장 열정적으로 상설 중재 재판소의 설립을 부르짖었던 대영제국은 남아프리카의 보어인들을 향해 잔혹한 전쟁의 방아쇠를 당겼다. 보어 공화국들이 중재 재판소를 통해 갈등을 해결하자고 필사적으로 호소했으나, 영국은 종속국과의 분쟁은 국제법의 대상이 될 수 없다며 이를 차갑게 묵살했다. 평화회의의 성과를 비웃듯, 그들은 금지된 무기(확산탄)를 버젓이 사용했고, 심지어 적을 기만하기 위해 상대방의 군복을 입고 위장 전술을 펼치는 등 야만적인 살육전을 이어갔다.
영국의 총성이 신호탄이라도 된 것처럼, 이듬해인 1900년에는 아시아 대륙에서 제국주의 열강들의 무자비한 폭력이 폭발했다. 중국에서 서구 제국주의의 수탈에 저항하며 일어난 의화단(義和團)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평화회의에서 나란히 앉아 인류애를 논했던 여덟 개의 열강국들이 연합군을 결성하여 중국을 침공했다. 그들은 반제국주의 봉기를 진압한다는 명목 아래 베이징을 무력으로 짓밟고 무자비한 약탈과 학살을 자행했다.
무엇보다 세계를 경악하게 만든 것은 이 거대한 평화회의를 최초로 주창하며 전 세계를 헤이그로 불러 모았던 주최국 러시아의 행보였다. 회의가 끝난 지 불과 몇 년 지나지 않아, 러시아는 만주와 한반도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신흥 강대국 일본과 유례없이 끔찍하고 파괴적인 전쟁에 돌입했다. 군비 축소와 전쟁 억제를 부르짖었던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그리고 헤이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본국에 타전했던 일본 정부는 역설적이게도 20세기 최초의 대규모 참극인 러일전쟁의 당사자가 되었다. 수십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이 전쟁에서 양국은 기관총과 철조망, 거대한 함포를 동원하여 헤이그의 이상주의자들이 그토록 두려워했던 '미래 전쟁의 참상'을 현실에 생생하게 구현해 냈다.
그리고 전쟁 당사국도 아닌 동아시아의 '조용한 아침의 나라' 한국은 이 살육전의 실질적 무대가 되었다.
# 절망과 냉소: 조롱거리가 된 평화의 성전
연이어 터져 나오는 참혹한 전쟁의 소식 앞에서, 1899년의 회의를 향해 쏟아지던 찬사는 순식간에 차가운 냉소와 멸시로 돌변했다. 언론과 지식인들은 헤이그의 외교관들이 전 세계를 상대로 거대한 사기극을 벌였다고 맹비난했다. 영국의 유력 일간지 타임스는 이 회의를 가리켜 '헤이그의 대실패'라고 규정했고, 독일의 위대한 역사가이자 노벨상 수상자인 테오도르 몸젠(Theodor Mommsen)은 이 회의가 역사바카라에 인쇄된 한낱 '오탈자'에 불과하다며 깎아내렸다. 독일 제국의회에서 슬롯민주당 지도자 아우구스트 베벨(August Bebel)은 헤이그의 합의문들이 "그것이 적힌 종잇장만큼의 가치조차 없는 쓰레기"라고 독설을 퍼부었다.
대중들의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수백만 명의 서명을 모아 헤이그로 달려갔던 네덜란드의 한 신문은 "수개월 동안 전 세계가 영구적인 평화에 대한 희망으로 기뻐했지만... 그것은 단지 불쾌하고 끔찍한 코미디에 불과했다"며 깊은 좌절감을 토로했다.
미국의 앤드루 D. 화이트 대사마저도 노골적으로 전쟁의 유용성을 찬양하던 동료 마한(A. T. Mahan) 대령을 떠올리며, "그가 입을 열 때마다 천년왕국의 평화로운 환상이 산산이 부서져 내린다"고 탄식할 정도였다. 현실 정치의 거대한 폭력 앞에서 평화를 제도화하려던 인간의 시도는 철저히 유린당했고, 헤이그 평화회의는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하고 우스꽝스러운 실패작으로 낙인찍히는 듯했다.
# 바다 한가운데 띄워 둔 케이블의 끝자락
그렇다면 1899년의 제1차 헤이그 평화회의는 진정 시대착오적인 몽상가들과 기만적인 제국주의자들이 연출한 한 편의 부조리극에 불과했을까?
당대의 쏟아지는 조롱 속에서도, 평화를 향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던 소수의 선각자들은 이 회의가 남긴 보이지 않는 균열을 예리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평화운동의 대모 베르타 폰 주트너 부인은 심각한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인류의 진보란 결코 곧게 뻗은 직선이 아니며, 때로는 퇴보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결국 더 빠른 속도로 전진하는 길을 찾아낼 것이라며 꺾이지 않는 희망을 기록했다.
이 선각자들의 믿음처럼, 역사적 관점에서 1899년 회의의 진정한 성취는 당장의 전쟁을 멈추었는가가 아니라, 인류가 국가 간의 관계를 상상하는 '개념적 틀'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는 데 있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부터 1815년 빈 회의까지, 과거의 모든 국제회의는 전쟁이 끝난 뒤 승전국들이 모여 전리품을 나누고 패전국에 평화를 강요하는 전후 처리의 장이었다.
그러나 1899년의 헤이그 회의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심각한 전쟁이 발발하기 전의 깊은 평화 시기에 전 세계가 모여, 무력이 아닌 주선과 조정, 그리고 중재라는 수단으로 갈등을 해결할 방법을 논의한 기념비적인 선례를 남겼다. 강대국들이 밀실에서 지도를 그어대던 시대가 저물고, 하나의 국가가 하나의 투표권을 행사하며 다자간의 규범을 형성하는 패턴이 바로 이곳 헤이그에서 탄생한 것이다.
미국의 국무장관 엘리후 루트(Elihu Root)는 이 회의가 지닌 거대한 역사적 의미를 가장 정확하고 아름다운 은유로 짚어냈다. 그는 각각의 국제회의를 평가할 때 중요한 것은 그 회의가 당장 무엇을 달성했는가가 아니라, 그것이 무엇을 시작하게 만들었고 인류를 어느 방향으로 전진시켰는가를 보아야 한다고 조용히 지적했다.
1899년에 채택된 결의안과 조약들이 비록 당장에는 무력해 보일지라도, 그것들은 망망대해 한가운데 띄워 둔 통신 케이블의 끝자락과 같아서, 훗날 지나가는 다른 배가 그 끝을 건져 올려 새로운 선을 연결하고 마침내 목적지인 해안까지 닿게 만들 거대한 여정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헤이그의 밀실에서 외교관들이 남긴 강제성 없는 타협의 문구들은 절반의 성공, 혹은 어이없는 실패작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어설픔이야말로 인류가 반드시 쥐어잡아야 할 단 하나의 케이블이지는 않았을까.
커버 사진: Unsplash의 Emmanuel M
사진 By Ben Bender, CC BY-SA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