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폭우 속의 순례: 7월 4일 델프트의 아침
1899년 7월 4일, 중재재판소 설립을 향한 막판 협상이 한창일 무렵, 네덜란드 델프트의 아침은 음산하고 사나웠다. 하늘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고, 빗줄기는 마치 장막처럼 델프트 위로 쏟아져 내렸다. 거센 바람이 신교회(Nieuwe Kerk)의 첨탑을 휘감으며 광장 위를 거칠게 휩쓸고 지나갔다. 그러나 궂은 날씨 속에서도 각국 외교관들과 언론인들을 태운 마차들이 속속 광장으로 모여들었고, 이내 검은 중절모 차림의 신사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빗줄기 속 광장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방문객들을 기다리는 델프트 시민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 위로는 근대 국제법의 아버지라 불리는 후고 그로티우스(Hugo Grotius)의 거대한 청동 동상이 비바람을 견디며 침묵 속에 솟아 있었다. 이 궂은 날씨 속에서도 수백 명의 유럽 엘리트들이 델프트의 오래된 성당으로 발걸음을 옮긴 이유는 단 하나, 신흥 강대국 미국이 자국의 독립기념일을 맞아 준비한 전례 없는 외교적 이벤트에 참석하기 위함이었다.
1898년 미서전쟁을 통해 열강의 반열에 올라선 미국은 유럽의 견제와 의구심 어린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더욱이 제1위원회와 제2위원회에서 미국의 군사 대표 마한과 크로지어가 신형 무기 금지에 사사건건 반대표를 던지며 국익 우선주의를 고집한 탓에 평화주의자들의 원성은 극에 달해 있었다. 이러한 호전적인 이미지를 단숨에 불식시킬 계기가 필요했던 미국 대표단은, 자국의 독립기념일을 활용해 그로티우스의 무덤에 헌화하기로 결정했다.
# 정치적 상징을 주조하다
이 우아하고도 정치적인 이벤트를 기획한 인물은 미국 수석대표 앤드루 D. 화이트(Andrew D. White) 대사였다. 6월 6일, 화이트는 국무장관 존 헤이(John Hay)에게 서신을 보내 델프트에 안치된 그로티우스의 무덤에 은과 금으로 만든 화환을 바칠 수 있도록 승인해 달라고 요청했다.
화이트의 명분은 완벽했다. 이 헌화는 근대 국제질서의 사상적 씨앗을 뿌린 거장에 대한 예우인 동시에, 네덜란드 정부의 환대에 대한 품격 있는 감사의 표시였다. 나아가 구대륙의 정부들이 신대륙의 신흥 강국에 대해 품고 있던 '무례하고 호전적인 제국'이라는 낙인을 단숨에 씻어내기 위한 고도의 연출이었다. 문학적 소양과 전통에 대한 감각이 뛰어났던 국무장관 존 헤이는 이 제안의 상징적 파급력을 즉각 꿰뚫어 보고 지체 없이 승인했다.
화이트 대사는 베를린 최고의 은세공 장인에게 특별히 화환 제작을 의뢰했다. 완성된 화환은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했다. 거대한 화환의 한쪽은 반투명한 은빛 잎사귀와 금빛 열매가 달린 월계수 가지로, 다른 한쪽은 은빛 잎사귀와 금빛 도토리가 달린 참나무 가지로 이루어졌다. 두 가지는 하단에서 은빛 리본 매듭으로 단단히 묶였고, 네덜란드와 미국의 문장이 에나멜 방패 위에 정교하게 새겨졌다. 그리고 그 위에는 다음과 같은 헌정사가 선명하게 각인되었다.
휴고 그로티우스의 기억을 기리며,
존경과 감사를 담아, 미합중국으로부터.
헤이그 만국평화회의를 즈음하여.
# 오르간과 멘델스존
행사 당일, 성당 안은 각국 대사들과 회의 주요 위원들, 네덜란드의 장관들과 대학교수들을 포함한 청중으로 가득 찼다. 화이트 대사는 베를린에서 독일 정부를 설득해 낸 프레더릭 홀스(Frederick W. Holls)에게 행사 진행을 맡겼다. 그러나 막상 개식을 알리는 선언이 흘러나왔음에도 그가 보이지 않아 장내는 일 순간 술렁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성당 내부를 웅장하게 울리는 오르간 소리가 퍼져나갔을 때, 화이트는 안도와 함께 감탄을 금치 못했다.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지녔던 홀스가 성당 연주자 대신 오르간 앞에 앉아 찬송가와 국가를 연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홀스의 즉흥 연주는 이 정치적 이벤트에 엄숙한 종교적 아우라를 덧입히며 좌중의 감정을 서서히 고조시켰다.
홀스의 오르간 연주 위로 성당의 종소리와 왕실 합창단이 뿜어내는 장엄한 화음이 감돌았다. 특히 백여 명의 목소리가 멘델스존의 합창곡, '평화를 알리는 사자들의 발걸음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를 노래할 때, 그곳에 모인 참석자들의 마음속에는 묘한 감동과 연대감이 차올랐다.
이윽고 네덜란드 국가 '빌헬무스(Wilhelmus)'가 장중하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화이트 대사가 그로티우스의 묘소로 다가가 은빛 화환을 내려놓았다. 이 극적인 장면에 성당을 메운 네덜란드인들의 민족적 자부심도 한껏 고조되었다. 네덜란드 외무장관 보포트(W. H. de Beaufort)는 연단에 올라 위엄 있는 답례사를 낭독했다.
이 고귀한 과업 앞에서, 우리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이 성당 묘역에 마지막 안식처를 둔 위대한 인물에게로 향합니다.
네덜란드 정부는 미국이 선사한 섬세한 외교적 배려에 깊이 만족했다. 이어 제2위원회(전쟁 법규) 위원장으로 활약하며 훗날 노벨 평화상을 받게 될 네덜란드의 토비아스 아세르(T. M. C. Asser) 교수가 등단하여 연설을 이어갔다.
이날 행사의 철학적 절정은 화이트 대사의 기념사였다. 무력이 숭배받던 19세기 말의 제국주의적 현실 속에서, 그는 그로티우스의 고전 『전쟁과 평화의 법(De jure belli ac pacis)』을 국제법의 성전으로 끌어올렸다. 그는 이 저작이 "인류에게 가장 위대한 축복임을 입증했다"고 찬사를 보냈다. 나아가 "전쟁이 초래하는 비참함과 슬픔을 줄였으며, 군인이라는 직업을 고귀하게 만들었다"고 역설하며 참석자들의 양심을 두드렸다.
하지만 화이트의 연설은 과거에 대한 찬양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는 회의장을 떠도는 냉소주의를 똑바로 응시하며 호소했다.
사이비 철학자들은 여러분을 향해 악의적인 예언을 쏟아낼 것입니다. 비관론자들은 비웃을 것이며, 냉소주의자들은 조롱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과업을 멈추지 마십시오. 세계를 향해 최소한 실행 가능한 중재 제도의 첫걸음이라도 내딛어 주십시오!
# 미국의 가장 우아한 PR
장엄했던 의식이 끝난 후, 축제는 델프트 시청사의 성대한 오찬으로 이어졌다. 약 350명의 주요 인사들이 시청사 테이블을 채웠고, 100여 명의 손님들은 시내 레스토랑에서 미국이 베푸는 만찬을 즐겼다. 축제는 밤까지 계속되었다. 오후에는 스탠퍼드 뉴얼 미국 공사가 주최하는 리셉션이 열렸고, 저녁에는 스헤베닝겐의 대연회장에서 수많은 인파가 모인 가운데 성대한 '미국 콘서트'가 울려 퍼졌다. 궂은 날씨 속에서도 모든 일정은 빈틈없이 완벽하게 진행되었다.
미국 독립기념일에 펼쳐진 이 치밀하고 화려한 외교 이벤트는 기대 이상의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틀 뒤 네덜란드의 젊은 여왕 빌헬미나는 화이트 대사에게 직접 감사를 표했다. 워싱턴의 수뇌부 역시 이 빛나는 외교적 성과에 환호했다. 윌리엄 매킨리 대통령과 존 헤이 국무장관은 대표단이 이토록 세련된 방식으로 미국의 평화적 리더십에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것에 크게 흡족해했다.
1899년 7월 4일 델프트에서의 하루는, 거대한 외교 체스판 위에서 미국이 어떻게 '문명'과 '국제법'이라는 보편적 상징을 선점해 주도권을 쥐었는지를 보여주는 결정적 장면이었다. 미서전쟁의 승리로 팽창주의의 야욕을 드러냈다는 유럽의 비판을 받던 미국은, 대포 대신 은빛 화환과 오르간 선율 그리고 그로티우스라는 17세기의 위대한 유산을 소환해 구대륙 엘리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바야흐로 신흥 강국 미국은 유럽의 낡은 규칙을 흡수하며, 새로운 시대를 향한 세련된 도약을 조용히 준비해가고 있었다.
1899년의 델프트는 다가올 20세기의 주인공 초강대국 미국을 조용히 내정하고 있었던 것일까.
멘델스존의 곡, '평화를 알리는 사자들의 발걸음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커버사진: 사진: Unsplash의 Juan Pablo Jou-Valencia
사진: Unsplash의 Lizzy Zh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