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홀스와 호엔로에
1899년 6월 16일 금요일 밤, 헤이그 국영철도역의 플랫폼은 차갑게 내려앉은 야간열차의 증기기관 소리로 뒤덮여 있었다. 짙은 안갯속에서 베를린행 열차에 몸을 실은 두 밀사, 독일의 필리프 초른 교수와 미국의 프레더릭 홀스의 어깨 위에는 인류가 만들 최초의 상설 재판소의 운명이 얹혀 있었다.
주말 동안 베를린 제국의 심장부로 들어가 카이저의 마음을 돌려놓지 못한다면, 월요일 아침 헤이그 빈넨호프에 모인 세계 평화회의는 통째로 붕괴될 터였다. 공식 회의 일정을 '프랑스 대표단의 부재'라는 궁색한 핑계로 겨우 사흘간 멈춰 세운 채 감행하는, 그야말로 초를 다투는 막후의 탈출극이었다. 덜컹거리는 열차의 어둠을 뒤로하고 두 사람은 조용히 독일 제국의 수도 베를린에 내렸다.
베를린 외무성으로 찾아간 홀스는 늙은 제국 수상 호엔로에(Chlodwig zu Hohenlohe-Schillingsfürst)와 외무장관 뷜로프(Bernhard von Bülow)를 차례로 독대하는 자리에서 단도직입적으로 의견을 펼쳤다. 그는 지금 헤이그에 모인 열강들의 평화를 향한 의지가 돌이킬 수 없는 대세임을 직시해야 한다고 압박했다. 홀스는 주저하는 제국주의 엘리트들을 향해 거침없는 비유를 쏟아냈다.
기차는 곧 출발할 것이며, 제시간에 탑승하지 않는 사람은 승강장에 홀로 남겨져 결코 권위나 존경 따위는 챙길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될 것이요.
이어서 홀스는 앞서 화이트 대사가 치밀하게 준비했던 감정적 승부수를 띄웠다. 미국 텍사스의 성공회 주교가 헤이그에 모인 통치자들과 신자들을 향해 평화회의의 성공을 간절히 기원하며 쓴 소박한 사목 서한 주머니에서 꺼내 들었다. 군사 대국 독일의 심장부인 이곳, 초대 제국 수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그늘 아래서 제국의 행정과 정치를 도맡아 온 여든 살의 노정객(老政客)에게 익숙한 것은 오직 철혈(鐵血, Blut und Eisen)의 언어뿐임을 외교부 건물 안에서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홀스는 기도문을 늙은 제국 수상 호엔로에의 손 위에 조용히 올려놓았다. 정확한 기도문의 내용은 오늘날까지 전해지지 않으나, 그 안에는 수십만 명의 평범한 사람들이 남긴 "평화를 향한 깊고 광범위한 열망"이 담겨 있었다고 후일 미국의 국제법학자 제임스 브라운 스콧은 기록했다.
뜻밖에도 편지를 읽은 호엔로에의 눈동자는 부정할 수 없을 만치 흔들렸다. 그는 군주의 권위와 개인의 신앙을 구분하는 독일 외교관이었지만, 평생 독실한 로마 가톨릭 신자로 살아온 인물이기도 했다. 대서양 너머의 한 성공회 주교가 보낸 글귀를 읽으며, 기독교 국가의 행정수반으로써 짊어져야 할 도덕적 바카라임 그리고 비극적 전쟁의 부채감과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파의 장벽을 넘어선 보편적 영혼들의 신앙 고백 앞에서 늙은 수상의 양심은 철벽이 아니었다. 그는 분명히 동요했고 깊이 감동받았다고 전해진다. 이어서 그는 현실 정치가가 내어 줄 수 있는 가장 격조 높은 양보의 언어를 고르기 시작했다.
# 초른과 뷜로프
한편 필리프 초른 교수는 곧바로 외무성의 장관 집무실로 향했다. 그는 자신의 상관인 뷜로프 외무장관을 대면하자마자 다급하게 헤이그의 험악한 기류를 전했다. 조국 독일의 고집이 오히려 독일을 벼랑 끝으로 몰고 있을지 모른다고 조심스럽게 경고했다. 만약 독일이 끝까지 타협을 거부하고 재판소 설립 자체를 반대한다면, 영국과 프랑스는 물론이고 삼국 동맹의 파트너인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이탈리아조차 등을 돌려 조국을 치명적인 외교적 고립으로 이끌 수 있다고 냉혹한 계산을 직언했다.
외무장관 뷜로프 역시 상황의 심각성을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다. 밀실의 외교관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통제 불능의 여론이었다. 영국 언론인 윌리엄 T. 스테드와 오스트리아의 평화운동가 베르타 폰 주트너 부인이 주도하는 범 유럽적 분노의 압박은 이미 독일 정부가 통제할 수 있는 임계점을 훌쩍 넘어서고 있었다. 강경파였던 초른조차 이 거대한 여론의 파도를 두고 '스테드-주트너 언론의 테러리즘'이라고 호소할 정도였다.
결국 뷜로프는 황제 카이저 빌헬름 2세에게 올리는 최종 보고서에서 현실적인 타협을 간언 했다. 중재 재판소 법안을 완전히 거부할 경우, 미국과의 관계가 치명적으로 틀어지고 러시아를 향한 정바카라의 결실마저 모두 잃게 될 것이라는 경고와 함께 입장을 선회할 것을 권고한 것이다.
이 굴욕적인 보고서를 받아 든 독일 황제(카이저) 빌헬름 2세는 끝내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이지 못했다. 그는 보고서 여백에 제국주의자의 오만과 신경질이 날것 그대로 응결된,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코멘트를 거칠게 휘갈겼다. 그는 "내가 이 모든 난센스에 동의하는 것은 오직 차르가 유럽 앞에서 체면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함일 뿐이다"라고 적었다. 그리고는 끝내 자국의 호전적인 무력을 맹신하는 속내를 숨기지 않고 덧붙였다.
현실에서 나는 신과 나의 날카로운 검에 의지할 것이며,
헤이그 회의장의 모든 결정 위에 똥을 싸지르겠다!
황제의 이 불쾌하고도 노골적인 배설의 언어는, 아이러니하게도 상설 중재 재판소를 향한 독일 제국의 '공식적인 타협과 동의'를 의미하는 상징이 되었다. 적어도 기구의 상설화 자체는 수용하겠다는 사실상의 항복 선언이었다.
며칠 뒤, 양국의 비공식 밀사들은 베를린의 짙은 안개를 뚫고 다시 헤이그의 기차역으로 귀환했다. 늦은 밤 역사 앞에는 주트너 부인과 평화운동가들이 마중 나와 있었다. 초조하게 결과를 묻는 그들을 향해, 홀스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제목을 빌려 은은한 미소와 함께 짧게 대답했다.
끝이 좋으면 다 좋은 법 (All's well that ends well).
# 무거운 영수증: 의무 조항의 폐기
베를린으로 급파되었던 밀사들이 짙은 안개를 뚫고 네덜란드 헤이그로 귀환했을 때, 회의장을 짓누르던 파국의 공포는 기적처럼 걷히는 듯했다.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마침내 고집을 꺾고 상설 중재 재판소의 설립에 동의했다는 소식은 전 세계의 평화주의자들을 열광시켰다.
그러나 경험 많은 외교관들은 독일 제국이 내민 항복 문서의 이면에 적힐 무거운 청구서를 직감하고 있었다. 무력을 신봉하는 카이저가 아무런 대가 없이 '평화의 성전'에 순순히 입장할 리 만무했기 때문이다. 독일이 상설 재판소라는 그릇의 형체를 인정하는 대신 요구한 타협의 조건은, 그 그릇 안에 담길 핵심 내용물인 '강제성'을 완벽하게 진공 상태로 비워내는 것이었다.
1899년 7월 4일, 제3위원회 산하 심사위원회 제14차 회의가 트레베잘(Trèveszaal)에서 재개되었다. 베를린에서 돌아온 독일의 학술 대표 필리프 초른 교수는 동료 위원들을 한동안 응시하다가 이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독일 정부는 제9조와 제10조의 완전한 삭제를 요구하며, 강제 중재 조항을 수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호하게 선언했다.
초른이 삭제를 요구한 제9조와 제10조는, 영미권에 회의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으려 러시아가 회의 도중 급히 덧붙여 제출한 협약 초안(Russian Draft Protocol)의 핵심이었다. 본래 재정난과 군비 경감을 이유로 평화회의를 소집했던 러시아는 상설 재판소라는 '독립된 사법 기구'를 세우는 데에는 다소 미온적이었다. 그러나 영미권의 '상설화' 바람에 밀려 회의의 주도권을 잃기 시작하자, 이를 만회하기 위해 배수의 진을 치기 시작했다. 상설 기구 대신 분쟁 발생 시 무조건 중재 재판에 회부해야 하는 '의무적 중재' 카드를 대담하게 제안한 것이다.
러시아의 초안은 '국가의 영예나 사활적 이익이 걸리지 않은 비교적 가벼운 사안들(예: 우편 연합 갈등, 철도 협정 위반, 금전적 채무 불이행 등) 발생 시 외교적 흥정 없이 '무조건 재판소로 가야 한다'라고 명시하고 있었다. 기구의 상설화보다는 법적 '의무화'에 사활을 건 러시아식 원칙이었다.
그러나 독일 제국에게는 아무리 사소한 사안일지라도 국가의 주권적 결정을 외부의 재판관에게 의무적으로 맡긴다는 것 자체가 체제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되었다. 초른 교수는 "독일은 이미 중재인 명부와 상설 재판소를 수용함으로써 많은 것을 했다고 믿는다"며 무겁게 말을 이어갔다. 영미가 요구한 '재판소 건물'을 지어주는 것에는 동의하겠으나, 그 재판소의 문을 열고 들어갈지 말지는 전적으로 해당 국가의 자유로운 선택에 맡겨두어야 한다는 최종 입장이었다.
# 이빨 빠진 조약문
독일의 확고한 거부권 행사 앞에서, 평화회의의 심장부였던 심사위원회는 딜레마에 빠졌다. 독일을 배제한 채 의무적 중재 조항을 밀어붙여 반쪽짜리 조약을 만들 것인가, 아니면 강제성을 포기하더라도 만장일치의 합의를 이끌어낼 것인가.
결국 위원회는 후자의 길, 즉 현실과의 타협을 선택했다. 격렬한 토론 끝에 강력한 구속력을 지녔던 의무적 중재 조항(제10조)은 뼈대만 남긴 채 철저히 난도질당했고, 그 공백은 훗날 국가들이 자발적으로 중재의 범위를 넓혀갈 수 있다는 공허한 선언(제19조)으로 채워졌다. 이 조항은 “체약국들이 훗날 중재 재판을 확대할 목적으로 새로운 협약을 맺을 권리를 스스로 보유한다(reserve to themselves)”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즉, 지금은 중재를 강제적으로 행할 수 없으니, '먼 미래에 누군가 해보고 싶으면 하라'는 무바카라임한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의무 조항이 찢겨 나가자, 상설 재판소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던 평화운동가들과 일부 이상주의적 외교관들은 다시 짙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비록 당초 제10조에 포함되었던 항목들이 지나치게 사소한 사안들이었다 할지라도 국가의 전쟁 권한을 법의 테두리 안에 묶어두려는 의미 있는 시도였기 때문이다.
독일의 칼질 끝에 의무적 중재의 대상 카테고리에 남은 안건들이란 고작 우편물 분실이나 유산 상속 같은 지극히 사소한 다툼에 불과했다. 오죽하면 이탈리아의 수석 대표 니그라(Nigra) 백작조차 허울만 남은 이 의무적 중재 대상들을 바라보며, "내 눈에는 너무나 비참해서(miserable) 더는 말할 가치조차 없다"라고 냉소적으로 토로했을 정도였다.
이러한 결과를 놓고 영국의 언론들은 앞다투어 "의무적 중재의 패배”라고 선언했다. 평화의 성전을 지어놓고도 그 안으로 강대국들을 끌고 들어와 전쟁을 금지시킬 법적인 문고리가 끝내 만들어지지 못한 것이다.
커버사진: Unsplash의 Maheshkumar Painam
사진: Unsplash의 CARMELA LUST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