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일 제국의 그림자
1899년 6월 첫째 주, 제3위원회 산하 심사위원회에 모인 각국 외교관들은 국제 분쟁의 사법적 해결을 위한 '상설중재재판소'의 골격을 짜 맞추며 막바지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영국의 파운스포트 경과 미국의 화이트 대사가 주도한 이 야심 찬 프로젝트는 인류 평화의 새로운 이정표가 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6월 9일, 무르익어가던 희망은 본국의 전보를 받은 독일 제국의 학술 대표 필리프 초른(Philipp Zorn) 교수에 의해 거센 난관에 부딪혔다. 회의 내내 침묵을 지키던 초른은 느닷없이 심사위원회를 향해 영·미가 제안한 혁신적인 상설 재판소안 대신, 기구의 상설화가 배제된 낡은 러시아안을 다시 논의의 기초로 삼자고 요구했다. 회의는 순식간에 원점으로 돌아갈 위기에 처했다.
당시 유럽의 신흥 강호 독일 제국은 막강한 육군력을 바탕으로 패권을 쥐기 시작한 참이었다. 프랑스를 무릎 꿇린 보불전쟁(1870-71) 이래 유럽 최고의 군사 강국으로 부상한 독일 제국 황제 빌헬름 2세에게 국가 간 분쟁을 외부 법관들에게 맡긴다는 중재 재판의 개념은 막 무대에 등판한 제국의 주권에 대한 침해이자 참을 수 없는 모독이었다. 독일의 수석 대표 뮌스터 백작(Count Münster) 역시 미국의 앤드루 D. 화이트 대사를 찾아가 상설 재판소 구상은 '순전한 사기극'에 불과하며 독일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강하게 압박했다.
그들의 논리는 냉혹하리만큼 단순했다. 독일은 다른 국가들과 달리 단 10일 만에 전군 동원령을 내릴 수 있는 압도적인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복잡한 중재 절차를 밟다 보면 프랑스나 러시아 같은 인접 경쟁국들에게 군대 동원 시간을 벌어주게 된다는 것이었다. 전쟁 발발 시 독일이 쥐게 될 절대적 이점이 상쇄된다는 지극히 냉정하면서도 솔직한 주장이었다. 뮌스터가 이 같은 맹점을 본국에 보고하자, 보고서를 읽은 빌헬름 2세는 여백에 다음과 같이 휘갈겨 썼다고 전해진다.
정확하다... 이 모든 사기극의 목적이 바로 그것이다.
Sehr richtig... Das ist der Zweck des ganzen Schwindels!
독일의 완고하고도 신경질적인 거부권은 심사위원회라는 작은 밀실을 넘어 회의장 전체로 연쇄 붕괴의 공포를 확산시켰다. 유럽 세력 균형의 한 축이었던 삼국 동맹(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이탈리아) 파트너들이 독일에 동조할 기미를 보였기 때문이다.
회의장 안팎에서는 독일 황제가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오스만 제국 등 동맹국 군주들을 움직여 재판소 설립을 조직적으로 방해하고 있다는 징후가 포착되었다. 실제로 이탈리아 수석 대표 니그라(Nigra) 백작은 "개인적으로는 중재 재판의 숭고한 대의에 공감하지만, 조국과 독일과의 동맹 관계 때문에 입장이 몹시 곤란해졌다"라며 화이트 대사에게 고통스러운 속내를 털어놓기도 했다.
재판소 설립에 정치적 생명을 걸었던 화이트는 일기장에 "파국이 다가오는 것 같다"라며 참담함을 토로했다. 독일과 그 동맹국들의 훼방 속에 평화회의가 무너진다면, 그간의 모든 노력이 한낱 희극이자 실패작으로 전락할 것이 분명했다. 문밖에서는 평화운동가들의 열망이 뜨겁게 끓어오르고 있었지만, 굳게 닫힌 문 안쪽의 완고함은 세상을 다시 회의 이전의 차가운 정세로 되돌리려 하고 있었다.
그들은 어떻게 이 위기를 돌파할 수 있었을까?
# 외교적 포커 게임: 화이트 대사의 비밀 외교
제3위원회가 완전한 붕괴 직전에 몰렸을 때, 미국 화이트 대사는 공식 회의장을 벗어나 판을 뒤집기 위한 치열한 물밑 외교전에 착수했다. 6월 15일, 독일 대표단의 뮌스터 백작이 화이트의 숙소를 찾아와 상설 재판소안을 재차 비난하자, 화이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노련하게 준비된 반격을 시작했다.
그는 먼저 상대의 명예와 공포를 동시에 자극했다. "독일의 훼방으로 평화회의가 좌초된다면, 평화를 갈망하는 전 세계의 분노가 오직 독일 정부를 향할 것"이라 경고하며, "러시아의 차르는 세계 민중의 우상이 되는 반면, 독일의 카이저는 증오의 대상이 될 것"이라고 압박했다.
이어 화이트는 19세기 제국주의 귀족들이 가장 두려워하던 지점을 정확히 타격했다. 프랑스의 저명한 슬롯주의자 장 조레스(Jean Jaurès)의 일화를 넌지시 던진 것이다. 화이트는 조레스가 평화회의의 실패를 조롱하면서도, 그 결과야말로 자신들의 혁명 대의에 도움이 된다며 기뻐했다는 소문을 전했다. 회의 실패로 각국 정부가 대중의 신뢰를 잃는다면, 이는 슬롯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 같은 세력에게 가장 강력한 무기를 쥐여주는 꼴이 될 것이라는 정교한 심리전이었다.
화이트는 마주 앉은 독일 귀족의 기세가 위축되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도박판의 오래된 비유를 빌려 대담하고도 부드러운 타협안을 제시했다. 러시아의 평화 공세가 기만이라 여겨진다면, 오히려 독일이 "그보다 한 수 위로 나아가(Go them one better)" 더 뛰어난 재판소안을 적극 지지함으로써 전 세계의 찬사를 가로채라는 제안이었다.
전 세계의 찬사를 가로채라
화이트의 파상적인 논리 공세에 뮌스터의 마음도 흔들리는 듯했다. 그러나 이튿날 아침, 얼굴이 하얗게 질린 뮌스터가 다시 찾아왔다. 베를린으로부터 "중재 재판소와 관련된 모든 계획에 절대 반대하라"는 단호한 훈령이 내려왔다는 것이다. 당일 예정된 심사위원회에서 초른 교수가 이 재앙적인 훈령을 공식 발표하기로 되어 있었고, 이는 곧 재판소 설립 구상의 종말을 의미했다.
하지만 이미 화이트에게 설득당한 뮌스터는 본국에 둘러댈 명분을 만들어내고자 했다. 두 사람은 재빨리 합의하여 '마침 프랑스 대표단이 바빠 참석하지 못했다'라는 핑계로 당일 회의 일정을 주말을 넘긴 월요일로 간신히 지연시키는 데 성공했다.
가까스로 시간을 번 뮌스터는 반대 의견을 발표하려던 초른 교수를 즉시 베를린으로 급파하여 외무성을 직접 설득하도록 했다. 화이트 역시 중대한 결단을 내렸다. 미국 대표단의 유능한 비서 프레더릭 홀스(Frederick W. Holls)를 초른과 함께 베를린으로 보내기로 한 것이다. 마한 대령을 비롯한 미국 대표단 내부의 거센 반발이 이어졌지만, 화이트는 베를린 주재 대사의 자격으로 모든 결과에 바카라임을 지겠다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화이트는 독일 외무장관 뷜로프에게 보내는 장문의 호소문과 함께, 평화회의의 성공을 기원하는 미국 텍사스 성공회 주교의 간절한 사목 서한을 홀스의 손에 쥐여주었다. 당시 이 기도문을 독일 황제에게 보낸 화이트의 정확한 의중은 알 수 없으나, 무력의 언어가 지배하던 제국의 심장부에 평화를 향한 미국 민중의 소박한 신앙적 언어를 증표로 덧붙이는 대담한 승부수였음은 분명하다.
과연 시민들의 소박한 기도문은 독일 황제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 있었을까?
커버사진: 미국 코넬 대학교의 설립자이자 주 베를린 미국 대사였던 A. D. White를 기리는 서가, 미국 코넬대학교 Uris 도서관. By eflon - https://www.flickr.com/photos/eflon/2874341070/in/set-72157607982619613, CC BY 2.0,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27345574
사진: Unsplash의 Aidan How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