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 상설 중재재판소의 탄생

제3위원회

by밤톨



"중재는 영어권 세계가 인류에게 선사한 가장 위대한 선물 중 하나였다."




# 다시 살아난 헤이그 회의: 제3위원회의 활약

군비 축소라는 제1위원회의 원대한 이상이 참여국들의 제국주의적 탐욕 앞에 산산조각 났을 때, 네덜란드 헤이그 '숲 속의 궁전(Huis ten Bosch)'을 감돌던 공기는 무겁고 우울했다. 평화를 발명하겠다며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회의였으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각국의 군사 전문가들은 무기를 내려놓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순진한 환상인지를 입증하는 데 경쟁이라도 하듯 혈안이 되어 있었다.


대포의 구경을 줄이거나 신형 폭약의 사용을 금지하자는 논의는 번번이 조국의 안보와 국익이라는 핑계 앞에 가로막혔다. 군축을 향한 열망이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면서 회의장 안팎에는 짙은 회의감만이 감돌았다.


무력의 도구를 물리적으로 통제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내려진 이상, 남은 희망은 폭력이 맹목적으로 행사되기 전에 국가 간의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방파제를 세우는 것뿐이었다. 회의의 성패를 가를 최후의 보루로서, 평화를 갈망하는 전 세계 시민들과 민간 운동가들의 시선은 이제 온전히 제3위원회로 집중되었다.


제3위원회의 지휘봉을 쥔 인물은 다시 프랑스의 정치가 레옹 부르주아(Léon Bourgeois)였다. 회의 초반, 의사봉을 떨어뜨리고 의회식 절차에 서툴러 안팎의 곤혹스러움을 자아냈던 이 백발의 정치가는, 정작 자신의 사상적 본진이라 할 수 있는 '중재'의 무대에 오르자 전혀 다른 인물로 돌변했다. 그 자신은 원래 인류가 폭력적인 야만 상태에서 벗어나 상호 연대와 법치로 나아가야 한다는 '연대주의' 사상을 주창한 철학적 신봉자였다.


부르주아는 강대국의 오만함과 약소국의 피해의식이 날카롭게 부딪히는 소위원회의 삭막한 분위기를 특유의 우아함과 지성으로 압도해 나갔다. 훗날 동료 외교관들은 제3위원회에서 그가 보여준 태도를 가리켜 타협을 이끌어내는 무한한 재치와 예의, 그리고 장애물을 솜씨 좋게 제거하는 천재성을 지녔다고 회고했다.


5월 26일에 열린 제3위원회의 두 번째 회의에서, 부르주아는 지루하고 기술적인 법률 논쟁으로 빠져들려는 위원들을 향해 그들이 이곳 헤이그에 모인 근본적인 철학적 이유를 부드러운 어조로 상기시켰다. 그는 각국의 쟁쟁한 대표들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국가 간의 분쟁이 발생할 경우 법과 정의에 따라 이를 규제하도록 노력하는 입장 자체에는 모두가 동의하는지 물었다. 이어서 더욱 본질적인 화두, 즉 국가 간의 분쟁을 해결함에 있어 무력보다는 평화적 수단에 호소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대원칙을 그는 모두에게 확인받았다. 부르주아는 주권 국가들의 이기적인 각축장을 거대한 국제법의 실험실로 조용히 변모시키고 있었다.


기묘한 사실은, 이 거대한 평화회의를 최초로 기획하고 전 세계를 헤이그로 불러 모은 주최국 러시아조차 중재 재판소 설립에 대해서는 아무런 구체적인 청사진을 쥐고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권위주의적 전제 군주국이었던 러시아의 수뇌부는 자국의 행동을 외부에서 제약할지도 모를 국제 사법 기구의 창설에 본능적인 거부감이나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미국과 영국의 법적 DNA

철저히 비어있던 이 진공 상태를 파고든 것은 미국과 영국의 실용주의적 외교관들이었다. 신흥 강대국으로 발돋움하며 세계 무대의 전면에 나서고 있던 미국은, 모순적이게도 국제 분쟁을 법정으로 끌어들여 사법적으로 해결하는 데 가장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미국 대표단은 대서양을 건너 고국을 떠날 때부터 국제 중재 재판소 창설을 위한 명확하고 확실한 프로젝트를 품고 회의에 참석했다.


이들이 이토록 국제 분쟁의 사법적 해결에 집착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한 도덕적 이상주의 때문이 아니었다. 미국은 이미 자국의 헌법 체계 내에서 대등한 주권을 가진 여러 주(States)들 간의 분쟁을, 연방 대법원이라는 중립적이고 공정한 사법적 포럼을 통해 평화적으로 해결해 온 혁명적인 역사적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의 외교관들은 자국 대법원과 비슷한 원리로 작동하는 사법 기구가 국제무대에서도 동일하게 작동할 수 있다고 믿었다.


미국이 심사위원회에 제출한 재판소 설계도는 구체적이고 혁신적이었다. 미국 측 안건은 각국의 최고 법원이 한 명의 국제 재판소 구성원을 임명하도록 했으며, 아홉 개 국가가 조약에 동의하는 즉시 재판소가 조직되도록 규정했다. 더 나아가, 이 재판소가 일시적인 기구가 아니라 영구적인 성격을 띠며 언제든 새로운 사건을 접수할 수 있도록 항상 열려 있어야 한다고 명시했다. 또한 소송 당사국들이 한 번의 판결에 승복하지 못할 경우, 특정 시간 내에 동일한 판사들 앞에서 두 번째 심리(재심)를 받을 수 있는 권리까지 섬세하게 보장하고 있었다.


영국 역시 중대한 역할을 수행했다. 1897년 미국과 영국 사이의 중재 조약 초안을 성사시킨 바 있는 영국의 수석 대표 줄리언 파운스포트(Julian Pauncefote) 경은 노련하고 대담했다. 그는 위원회의 분위기를 단숨에 장악하며, 분쟁 국가들의 요청에 따라 즉시 소집될 수 있는 ‘상설’ 국제 재판소를 조직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선언했다. 파운스포트가 제안한 영국 측 안건은 각 체약국이 동수의 중재인을 임명하여 '재판소 구성원'이라는 일반 명부에 올리고, 헤이그에 상설 사무국을 설치하여 행정 실무를 담당하게 하자는 현실적이고 실현 가능한 체계를 담고 있었다.


'상설(permanent)'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감은 엄청났다. 단 한 번도 인류는, 아니 적어도 서구 슬롯에서는 국가 간의 재판소가 영구적으로 세워진 적이 없었다. 그 단어는 국가라는 이름 아래 자행되던 전쟁을 불법화하고, 국제 슬롯 전체를 구속할 항구적인 사법 체계를 세우겠다는 선전포고로 들렸다.


미국과 영국이 이처럼 '국제 중재'라는 개념에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태도를 보일 수 있었던 근저에는, 이 두 앵글로색슨 국가가 수백 년에 걸쳐 축적해 온 짙은 중재의 역사적 DNA가 있었다. 영미권 외교관들에게 중재는 추상적인 철학이 아니라 피와 살로 엮인 실제적 정바카라 수단이었다. 그들에게 현대적 의미의 중재는 1794년 영국과 미국이 맺은 '제이 조약(Jay's Treaty)'에서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는 정치적 타협에 의존하던 기존 관행을 넘어, 독립적인 위원회가 법적 원칙에 따라 분쟁을 해결하도록 규정한 근대적 시도였다.


더 나아가 이 두 나라는 1871년 미국 남북전쟁 당시 영국의 중립 위반으로 촉발된 엄청난 규모의 '앨라배마호 배상 사건(Alabama Claims)'을 사법적으로 해결하는 기적을 연출한 바 있었다. 국가의 명예나 사활적 이익이 걸려 있어 도저히 중재가 불가능할 것이라 여겨졌던 이 갈등을 사법 재판으로 해결한 경험은 당시 국제슬롯에 엄청난 충격을 던졌다. 국가 간의 논쟁의 규모가 아무리 크더라도 그것이 결코 평화적 해결의 장애물이 될 수 없음을, 당시 영국과 미국은 마치 전 세계에 증명이라도 하는 듯 움직였다.


결국 1899년 헤이그 밀실에서 미국과 영국이 보여준 실용주의는 하루아침에 잉태된 것이 아니었다. 미국의 저명한 국제법학자 제임스 브라운 스콧(1866-1943)은 “중재는 영어권 세계가 인류에게 선사한 가장 위대한 선물 중 하나였다”라고 기록했다.



#트레베잘: 베스트팔렌의 역설적 전환

미국과 영국의 주도 아래 제3위원회의 핵심 기구인 심사위원회는 실무적인 논의를 진전시키기 위해 헤이그 중심부에 위치한 빈넨호프(Binnenhof)의 트레베잘(Trèveszaal), 즉 '휴전의 방'으로 모여들었다. 네덜란드 정치의 심장부인 이곳은 1697년 프랑스의 다니엘 마로(Daniel Marot)에 의해 벽면 곳곳에 우의적인 패널들이 장식된 매혹적인 공간이었다. 특히 사방의 벽면을 가득 채운 웅장한 천장화들은 회의실에 모인 위원들의 시선을 압도하며 1648년 베스트팔렌(Westphalia) 조약의 강렬한 잔상을 투영하고 있었다.


그런데 독일 영토인 베스트팔렌에서 체결된 조약의 역사적 숨결이 왜 이곳 네덜란드 헤이그의 밀실에 표현되어 있었을까?


그 해답은 베스트팔렌 조약이 네덜란드, 그리고 근대 국제법 역사에 던진 거대한 궤적 속에 숨어 있다. 현대의 많은 학자들은 1648년의 베스트팔렌 조약을 근대 국제관계의 역사를 도출해 낼 수 있는 결정적인 시대적 기점으로 평가해 왔다. 이 조약은 신성로마제국의 보편적 지배를 해체하고, 개별 국가들에게 동맹을 맺고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배타적 권리를 부여했다고 해석되었다. 무엇보다도 이 조약은 스페인 제국을 상대로 한 네덜란드의 80년 독립 전쟁에 종지부를 찍고, 네덜란드의 완전한 주권 독립을 국제 슬롯가 공식적으로 승인한 빛나는 외교적 승리의 결과물로 인식되었다.


트레베잘이 위치한 헤이그의 빈넨호프는 바로 그 네덜란드 공화국의 최고 권력 기관인 국가회의가 자리 잡고 있던 심장부였다. 이곳은 오랫동안 네덜란드 의회의 중심지로 남아 있었다. 특히 이 '트레베잘(휴전의 방)'이라는 이름 자체는 1609년 스페인과 맺었던 '12년 휴전 조약(Twelve Years Truce)'이 바로 이 방에서 체결된 데서 유래했다. 1609년의 이 휴전은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네덜란드가 완전한 주권 국가로 승인받기 위한 결정적인 디딤돌이었다.


즉, 베스트팔렌 조약의 문서는 독일 땅에서 서명되었을지언정, 그 조약이 만들어낸 '절대적이고 평등한 주권 국가'라는 근대적 질서의 가장 큰 수혜자이자 그 질서가 물리적으로 완성된 정치적 공간은 다름 아닌 헤이그의 빈넨호프와 트레베잘이었던 것이다.


1899년, 이 방에 모여든 심사위원회의 외교관들이 직면한 역사적 은유는 숨이 막힐 듯 역설적이었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은 주권 국가들에게 '전쟁을 수행할 신성한 권리'를 부여하며 근대 국가 체제를 탄생시켰다. 그러나 250년이 흐른 뒤, 1899년의 외교관들은 바로 그 주권 국가의 절대성이 탄생했던 성소(聖所)에 모여, 그 폭력적인 주권 행사를 사법적 절차로 '제한'하고 '통제'하려는 인류 최초의 세계 법원을 설계하고 있었다.


오래전 국가들에게 전쟁을 할 수 있는 주권적 자유를 부여했던 방에서, 이들은 상설 재판소라는 제도적 장치를 통해 이러한 자유에 다시 고삐를 채우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주권의 성채에서 주권을 해체하려는 이 치열한 막후의 고뇌는 회의 초반 각국의 이합집산으로 분열되었던 의미 없는 논쟁을 넘어, 헤이그 평화회의가 근대 국제법의 위대한 전환점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그나마 합리적인 이유를 제공하였다.


밀실의 무거운 침묵 속에서, 현실주의자였던 외교관들은 한때 서로에게 총구를 겨누게 했던 낡은 베스트팔렌의 논리를 역으로 비틀어, 세상을 바꿀 새로운 판결문을 조심스레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국가의 의지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합하는 일, 그 결과 가까스로 탄생한 상설 중재 재판소(PCA: Permanent Court of Arbitration)는 오늘날까지 무너지지 않은 성벽이 되었다.





오늘날 상설중재재판소의 국제사무국이 있는 헤이그 평화의 궁, 국제사법재판소(ICJ)와 건물을 공유한다.


현재까지 외교 무대로 활발히 사용되고 있는 트레베잘 (네덜란드-베트남 공식 회담 2011)


1648년 체결된 베스트팔렌 조약은 30년 전쟁을 종식시킨 유럽 최초의 다자간 평화 회담의 산물로, 유럽 전역에서 종교적 자주권을 확립하고 영토적 주권에 기반한 근대적 국가 체제의 기틀을 마련한 역사적 합의이다. 특히 이 조약은 군주나 신성로마제국의 보편적 권위 대신 개별 국가들이 대등한 주권을 행사하는 국제질서의 출발점이 된 것으로 여겨진다.

사진: Unsplash의 Michael Fousert (커버 사진) 오늘날 네덜란드 헤이그의 빈넨호프(Binnenhof). 이곳에는 네덜란드 의회 양원 회의장과 총리 집무실이 자리하고 있다.

사진: By Minister-president Rutte from Nederland (+31) - Delegatieoverleg Trêveszaal, CC BY 2.0,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28680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