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들(3)
열강이 발명해 낸 평화와 국제법의 카르텔 속에서 대한제국은 이미 죽음이 예정된 제물이었다.
# 폭풍전야
네덜란드 헤이그의 '숲 속의 궁전'에 세계 26개국의 대표들이 모여 인류 최초로 무장 해제와 항구적 평화를 논의하고 있을 때, 지구 반대편 대한제국은 이 화려한 평화의 제전에 초대받지 못했다. 힘과 문명의 잣대로 세계를 재단하던 제국주의 열강들에게, 당시 변방에 머물러 있던 조선은 오랫동안 국제법의 주체로 인정받을 자격이 없는 투명한 존재에 불과했다. 유럽이 군비 축소라는 우아한 위선을 연기하고 있던 바로 그 시각, 한반도는 제국주의가 촉발한 군비 경쟁의 가장 뜨거운 화약고로 변해가고 있었으며, 대한제국은 그 어느 때보다 처절한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불과 3년 전인 1895년 10월의 매서운 새벽, 국왕 고종은 일본 낭인들에게 왕비가 참혹하게 살해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신변의 극심한 위협 속에서 밤을 지새우던 고종은 이듬해인 1896년 2월, 궁궐을 몰래 빠져나와 정동의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했다. 일국의 군주가 타국의 외교 공관에 목숨을 의탁해야 했던 굴욕적인 이 ‘아관파천’ 이후, 조선은 그 뼈아픈 수모를 씻고 주권 국가로서의 위엄을 되찾기 위해 발버둥 쳤다. 고종은 1897년 경운궁으로 환궁한 뒤 그해 10월 11일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다음 날 황제 즉위식을 거행했다. 황제의 국가라는 외투를 걸쳤으나, 그 토대는 강대국들의 차가운 흥정 속에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당시 헤이그 회의장의 유럽 외교관들에게는 아직 중요한 이슈가 아니었지만,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칙서 이면에는 동아시아에 대한 러시아의 은밀한 의도 역시 숨어있었다. 만주 지역의 세력권 확보를 위한 뤼순, 다롄을 확보(1898년 3월)한 러시아는, 한반도에서 일본과의 경쟁 상황에서 국방비의 압력이 가중되고 있었다. 시베리아 횡단 철도가 아직 완공되지 않아 극동에서의 군사적 우위를 장담할 수 없었던 러시아로서는 팽창하는 일본의 군비 증강을 늦추고 유럽에서의 군사적 부담을 줄일 '시간'이 절실히 필요했다. 러시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뿐 아니라 동쪽 끝에서 일본과도 군비경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 역시 러시아와의 결전을 대비하여 청일전쟁(1894-95)에서 얻어낸 막대한 배상금을 포함한 전 국가 예산의 60퍼센트를 군비 예산으로 투입하고 있던 시기였다. 일본 정계의 거두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이미 1890년에 "시베리아 철도는 이미 중앙아시아로 진출하였고... 시베리아 철도 완성의 날은 곧 조선에 다사(多事) 한 시기가 됨을 잊어서는 안 된다"며 한반도를 반드시 피로써 지켜내야 할 '이익선'으로 규정했다. 러시아가 유럽에서 평화를 읊조리던 1899년은 역설적이게도 동아시아에서 이 두 제국주의 국가가 장차 한반도를 두고 벌일 거대한 살육전(러일전쟁, 1904-5)을 위해 숨을 고르던 폭풍 전야였다.
# 양무호의 허무
이러한 숨 막히는 열강의 각축전 속에서 대한제국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스스로 무장하는 것뿐이었다. 헤이그에서 유럽의 외교관들이 대포의 구경을 줄이자는 가식적인 토론을 벌이고 있을 때, 대한제국은 가녀린 국고를 쥐어짜며 1년 예산 중 40퍼센트에 육박하는 돈을 군사 분야에 투입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강병을 육성하여 외세의 간섭을 물리치고자 했던 고종의 집착은 때로는 서글픈 희극으로 전락하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비극이 바로 군함 양무호(揚武號)의 도입이었다. 양무호는 원래 1888년 영국의 딕슨사에서 건조한 3,432톤급 원양 항해용 화물선으로 낡고 비효율적인 고철 덩어리에 불과했으나, 대한제국은 여기에 포를 달아 군함으로 개조하기 위해 당시 정부 예산 1천만 원의 10퍼센트 남짓 되는 천문학적인 혈세를 쏟아부어 선박을 구입했다.
백성들의 고혈로 사들인 이 군함은 어이없게도 러일전쟁 발발과 동시에 일본군에 의해 징발되어 일본의 군수품 수송선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막대한 재정과 부국강병의 실낱같은 희망을 걸었던 대한제국으로서는 허망한 결과가 아닐 수 없다. 힘이 없는 ‘제국’의 군비 증강은 이미 궤도에 오른 일본과 러시아의 날 선 경쟁 앞에서 한낱 무기력한 몸부림에 지나지 않았을까.
# 독립신문의 시각
의외로, 제1차 헤이그 회의에 초대조차 받지 못한 대한제국의 지식인들 중 일부는 오히려 이 상황을 가장 서늘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다. 예를 들어, 당시 『독립신문』 영문판은 평화회의에 열광하는 전 세계의 몽상가들을 향해 뼈아픈 일침을 가했다. "지상의 유일한 평화 약속은 목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선포한 천사의 입술에서 온 것이며, 그리스도의 원칙이 사람의 삶과 국가의 의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될 때에만 인류의 군대가 해산될 것이다"라고 적었다. 그들은 강대국 외교가 선전하는 평화 이면의 정치적 야욕을, 그들이 허울 좋게 내세우는 기독교의 본래 정신을 역으로 인용하며 파헤친 것이다.
나아가 독립신문은 러시아 황제의 평화 칙서가 발표된 직후에도 러시아가 동아시아에서 군사력을 은밀히 증강하고 있는 현실을 상기시켰다. "니콜라이 황제의 병비 절감하자는 의안이 난 후에 아라사(러시아) 정부의 지금 행동은 뜻밖에 기이한 광경이 있으니... 육지에 포대의 더 쌓고 또 새로 베풀기를 심히 바쁘게 하고" 있음을 고발했다. 네덜란드 헤이그에서는 만국평화회의를 주도하고 있지만, 극동에서는 은밀하게 전쟁준비를 하던 당시 러시아 정부의 말도 안 되는 모순을 적나라하게 폭로했다.
이어서 기사는 대한제국의 구성원들이 허울뿐인 평화론에 기대지 말고 스스로 깨어날 것을 절규했다. "대한 관민들은 더욱히 잠들을 깨여 시세 형편이 이러한 줄을 쾌히 깨닫고 나라를 잘 보호하야 위태한 경우에 이르지 말게 할지어다." 비록 현실적인 국가의 처지는 나약했을지언정, 지식인들의 통찰은 이미 헤이그의 깊숙한 곳까지 닿아 있었다.
당시 한국과 러시아의 관계는 결코 무조건적인 짝사랑이 되어서는 안 될 상황이었다. 러시아는 만주를 염두에 두고 일본과 경쟁하고 있었지만, 조선 문제에 관해서는 서로 양보를 주고받는 사이였다. 1898년에 체결된 '로젠-니시 의정서'에서 러시아는 이미 "러시아국 정부는 한국에서 일본의 상업 및 공업에 관한 기업이 크게 발달한 것과... 관계의 발달을 방해하지 않는다"라고 합의하며, 대한제국의 주권을 흥정의 대상으로 전락시키고 있었다.
역사학자 최덕수 교수가 날카롭게 지적하듯, 열강들의 밀실에서 조선을 두고 벌인 러시아와 일본의 라이벌전은, "뜨거운 열전이라기보다 차가운 냉전 같은 것"이었다. 그 냉전의 틈바구니 속에서 고종은 필사적으로 살길을 모색했다. 그는 외세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국제 슬롯의 공인을 받는 방식을 택했다.
# 대한제국의 고독
대한제국은 1900년에는 만국우편연합, 1903년에는 국제적십자사에 가입했다. 나아가 고종 황제는 1902년에 즉위 40주년을 칭송하는 거대한 칭경(稱慶) 예식을 기획하며, 그 화려한 축제의 장에서 각국 주재 공사들에게 특사 파견을 요청하라고 지시했다. 또한 예식에 참석한 특사들에게 대한제국이 중립국임을 승인받고자 계획했다. 비록 전염병의 창궐로 무산되기는 했으나, 서울 한복판에 세워진 거대한 '칭경 기념비'는 총칼의 위협 속에서도 외교적 명분과 국제법의 수사에 기대어 기적 같은 중립을 쟁취하려 했던 군주의 애처로운 소망이 응결된 돌기둥이었다.
그러나 서구 열강이 1899년 헤이그에서 다듬었던 국제법과 문명의 규칙은 결코 변방의 약소국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음은 위에서 설명하였다. 고종이 가장 굳게 믿고 있었던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제1조의 내용, 즉 "제3국이 체약국에 위해를 가할 경우 우호적인 방향으로 조정을 시도한다"는 이른바 '거중조정(Good offices)' 조항 역시 허망한 종잇조각에 불과했다. 미국은 대한제국을 이미 보호할 가치가 없는 문명 밖의 국가로 취급하고 있었다. 당시 미국의 여론을 주도한 언론인 조지 케넌(George Kennan, 1845~1924)은 한국 정부가 "생명과 재산권을 보호하지 않으며... 공중위생에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며 야만적인 국가로 낙인찍었고,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해당 기사에 동조했다.
결국 1899년 헤이그 제1차 만국평화회의에서 지워졌던 대한제국의 운명은, 그로부터 8년 뒤인 1907년 제2차 헤이그 평화회의에서 가장 처절한 비극으로 완성된다.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폭로하고 잃어버린 주권을 되찾기 위해 파견된 세 명의 특사들은, 굳게 닫힌 평화회의의 문 앞을 서성이며 피를 토하듯 호소했으나 어느 누구도 그들의 절규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열강 모두가 이미 공범이 된 상황 속에서, 이 비극은 이미 예견된 수순이었을지 모른다.
열강이 발명해 낸 '평화'와 '국제법'의 카르텔 속에서 대한제국은 이미 죽음이 예정된 제물이었다. 1899년의 무관심은 1905년의 침묵을 낳았고, 그것은 다시 1907년의 냉대로 이어졌다. 아무도 오지 않을 연회장에서 칭경(稱慶)의 축배를 준비하던 고종과,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붓을 들던 대한제국의 지식인들. 그러나 그들이 삼켜야 했던 고뇌는 역사의 양심을 일깨우는 엄연한 증거가 되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 흔적을 드러내고 있다.
[1] 대한제국을 혹평하며 시어도어 루스벨트 행정부의 친일 정바카라을 대변한 인물은 탐험가이자 저널리스트인 조지 케넌(George Kennan, 1845~1924)이다. 훗날 냉전기 대소 봉쇄 정바카라(Containment Policy)의 초석이 된 '롱 텔레그램(Long Telegram, 1946)'을 기안한 미국의 전설적인 외교관 조지 F. 케넌(George Frost Kennan, 1904~2005)은 그의 친척(8촌)으로, 삼촌의 이름과 시베리아 연구 등의 학술적 유산을 물려받았을 뿐 이 시기의 동아시아 외교 사안과는 무관하다. 양자 간의 인물 혼동에 주의를 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