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 아르메니아, 청년 투르크 당

이방인들(2)

by밤톨


"그로부터 8년 후 지구를 반바퀴 돌아 머나먼 한국에서 찾아올 세 명의 특사가 겪게 될 고난을 섬뜩하게 예고하는 전조(前兆)였다."




화려한 샹들리에와 녹색 나사천이 깔린 회의장 안쪽의 분위기와 달리, 궁전 밖 조약돌 거리에는 전혀 다른 종류의 평화를 갈구하는 이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 주최국인 러시아와 네덜란드는 엄격한 기준을 들이대며 약소 민족들의 출입을 철저히 통제했다. 그러나 개최국들이 밀실의 문을 걸어 잠글수록, 조국을 잃거나 학살의 위협에 내몰린 이들에게 헤이그는 세상에 자신들의 비극을 알릴 수 있는 유일하고도 절박한 구원의 창구로 여겨졌다.


공식 초대장은 없었으나, 억압받는 민족들의 대표단은 즉각적인 조치를 요구하기 위해 헤이그로 이끌리듯 몰려들었고, 그 결과 평화회의장 주변에는 청년 투르크당, 폴란드인, 핀란드인, 아르메니아인, 그리고 마케도니아인들이 절박한 눈빛으로 서성이고 있었다.



# 아르메니아인들의 호소

19세기 말, 오스만 제국 치하의 아르메니아인들이 겪고 있던 참상은 유럽 지식인 슬롯에 적지 않은 충격을 던져주고 있었다. 제국 내의 기독교 소수 민족이었던 아르메니아인들은 오스만 제국의 쇠퇴와 민족주의의 발흥 속에서 잔혹한 탄압과 대규모 학살의 표적이 되었다. 그러나 주권 국가의 내정 불간섭이라는 핑계 뒤에 숨은 유럽 열강들은 오스만 제국의 지정학적 가치와 자신들의 이권에만 몰두할 뿐, 아르메니아인들의 피흘림에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 철저한 고립 속에서 1899년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는 아르메니아인들에게 마지막 남은 실낱같은 희망이었다. 미국의 유력 일간지는 아르메니아인들이 평화회의를 향해 구원을 읍소하는 청원서를 연이어 보내고 있다고 타전했다.


헤이그 거리에서 이들의 피맺힌 절규를 대변한 핵심 인물은 아르메니아의 열정적인 활동가 미나스 체라즈(Minas Tschéraz)였다. 그는 공식 외교관의 신분증이나 화려한 마차도 없이 혈혈단신으로 헤이그에 잠입했다. 그의 무기는 오직 진실을 알리겠다는 맹렬한 의지뿐이었다. 네덜란드 정부의 은밀한 외교 보고서에 따르면, 이 아르메니아 활동가는 네덜란드 외무장관 보포트(W. H. de Beaufort)에게 평화회의의 기만성을 비판하며 항의하고자 했고, 심지어 네덜란드 여왕과의 면담을 요구했으며, 아르메니아인들의 억압에 관한 강연을 열 계획이었다.


체라즈의 방식은 거칠고 절박했다. 그는 회의장 주변의 삼엄한 경비를 뚫기 위해 가짜 명함을 만들어 뿌리고 다니며, 각국 대표단이 묵고 있는 호텔 로비와 기자들이 모이는 카페를 배회했다. 때로는 회의장인 숲속의 궁전 문턱까지 다가가 자신들의 참상을 담은 문건을 전달하려 애썼다.


이러한 체라즈의 끈질긴 장외 투쟁은 즉각적으로 오스만 제국 대표단의 심기를 건드렸다. 오스만 대표단은 네덜란드 외무장관 보포트에게 불같이 화를 내며 체라즈를 스파이로 몰아세웠고, 그의 공개 강연을 강제로 금지해 줄 것을 강력히 압박했다. 그러나 보포트는 네덜란드의 국내법상 집회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면서까지 그를 추방할 권한이 없음을 내세우며 난처한 상황을 교묘히 회피했다.


체라즈는 외교관들의 냉대에도 굴하지 않고 대중을 향한 호소로 전략을 수정했다. 그는 암스테르담에 이어 7월 11일에는 헤이그의 저명한 극장인 딜리전티아(Diligentia)에서 아르메니아의 비극을 폭로하는 강연을 강행했다. 그의 강연은 평화의 제전을 주최한 네덜란드 정부와 열강들의 위선을 찌르는 비수와도 같았다.


친정부 성향의 네덜란드 언론은 이 강연이 네덜란드 정부와 평화회의에 반대하는 항의 집회의 성격을 띠었다며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흥미롭게도 네덜란드 국내 정치의 거물이자 야당 지도자였던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는 정부를 공격하기 위한 정치적 계산 속에서 체라즈에게 지지를 표명하고 심지어 그를 자신의 집으로 거두어들이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그러나 체라즈를 향한 일부 정치인의 동정이나 언론의 단발성 관심은 아르메니아인들의 운명을 바꿀 수 없었다. 그의 절규는 거대한 성벽을 때리는 파도 소리에 불과했다. 밀실 안의 외교관들에게 아르메니아인들의 피눈물은 자신들이 논의할 가치가 없는 남의 나라 '내정'이자 귀찮은 소음에 지나지 않았다.



# 청년 투르크당의 굴육

아르메니아인들이 생존을 향한 절규를 내뱉고 있었다면, 전제 군주 압뒬하미트 2세의 폭정에 맞서 조국의 근대적 개혁을 부르짖던 '청년 투르크당(Young Turks)' 망명객들의 사연은 가장 뼈아프고 서글픈 희극의 형태를 띠고 헤이그의 거리에서 회자되었다. 파리 등지에 망명하여 오스만 제국의 헌정 복구와 서구화 개혁을 도모하던 이 엘리트 지식인들은, 헤이그 평화회의를 제국의 부패와 독재를 규탄하고 자신들의 개혁 대의를 서구 문명국들로부터 인정받을 절호의 무대로 보았다.


하지만 서구 열강의 외교관들이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동정심조차 없었다. 오히려 그 시선 밑바닥에는 짙은 혐오와 조롱, 그리고 인종주의적 편견이 도사리고 있었다. 미국 대표단의 수석 대표이자 코넬 대학교의 설립자인 앤드루 화이트(Andrew D. White) 대사가 자신의 일기장에 남긴 기록은 당시 제국주의 엘리트들이 비서구 지역의 망명객들을 얼마나 냉소적으로 취급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화이트는 이들이 "오직 술탄을 협박하여 파리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활동할 뿐"이라고 폄하하며, "그들의 개혁에 대한 열정은 자금이 바닥날 때만 뜨거워진다"고 비판했다. 유럽 한복판에서 회의하던 이들에게 정치 개혁은 오직 문명화된 백인들의 전유물일 뿐, 유색인종의 망명객들이 떠드는 혁명은 사기극이나 돈벌이 수단으로 치부되기 쉬웠다.


청년 투르크당 대표단은 자신들의 명분을 설명하기 위해 미국 대표단에게 끊임없이 면담을 간청했고, 화이트와 미국 대표단은 이들의 끈질긴 방문 요구에 지쳐 마침내 비공식적인 자리를 허락했다. 그러나 이 만남의 진짜 목적은 그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함이 아니라 귀찮은 불청객들을 영원히 떼어내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실제로 화이트는 당시의 심정을 회고하며 “마침내 우리 중 몇몇이 그들에게 비공식적인 발언 기회를 주기로 결정했는데, 그 주된 목적은 그들을 영원히 쫓아내기 위함이었다”고 고백했다.


약속된 면담 날, 청년 투르크당 대표들은 자신들이 오스만 제국의 비문명적인 폭도들이 아니라 훌륭한 신사들임을 증명하고자 노력했다. 그들은 실제로 파리 등지에서 유학한 지성인들이었다. 서양 귀족들과 같이 이브닝 드레스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차려입고 결연한 표정으로 미국 대표단의 응접실에 들어섰다.


그러나 극도의 긴장감 속에서 대표가 내뱉은 첫마디는, 그들이 짊어진 조국의 비극을 한순간에 가장 끔찍한 코미디로 추락시키고 말았다. 그들 중 대표는 한껏 위엄을 잡고 유창하지 않은 영어로 "귀빈 여러분, 저희는 젊은 칠면조들입니다("Your Excellencies, we are Young Turkeys”) 라고 외친 것이다. 젊은 튀르키예인 (Young Turks)를 젊은 칠면조(Young Turkeys)로 잘못 발음한 이 어설픈 실수 앞에서, 응접실의 공기는 묘하게 일그러졌다. 화이트 대사를 비롯한 미국 대표단은 터져 나오는 폭소를 참기 위해 입술을 깨물며 육체적 고통에 가까운 인내심을 발휘해야 했다고 그들의 일지에 기록했다. 한낱 영어 발음 실수 하나로 그들의 호소는 미국 대표단에게 일종의 희극으로만 기억되었다.



# 리자의 문명적 투쟁

한편, 또 다른 청년 투르크당의 지도자 아흐메드 리자(Ahmed Riza)는 이런 웃지못할 실수를 만회하듯 공개적인 강연을 통해 오스만 정부의 폭정과 부패를 맹렬히 폭로하고자 했다. 그의 연설이 헤이그 거리를 뜨겁게 달구자, 격분한 오스만 제국의 관료가 그를 향해 전통적인 방식인 명예 결투를 신청하는 아찔한 일도 벌어졌다.


아흐메드는 “문명화된 정치적 투쟁”을 고집하며, 이 평화회의에서 유혈 사태가 벌어질 뻔했던 유일한 상황을 가까스로 넘겼다. 회의장 밖에 운집한 일부 평화주의자들은 아흐메드의 이 거절을 비폭력과 이성의 승리라며 열렬히 박수 쳤다. 그러나 밀실에 앉아 있던 열강의 외교관들에게 이 소동은 그저 미개한 이들이 평화의 성전 밖에서 벌이는 삼류 연극으로 소비되었다. 아흐메드가 내고자 했던 정치적 의사의 목소리는 스스로 “문명적 투쟁"임을 항변하였지만, 그 어떤 “문명국"의 대표단들도 그를 그들과 같은 범주로 여기지 않았다.



# 밀실 밖의 눈물

미나스 체라즈의 핏빛 절규와 청년 투르크당의 서글픈 희극은 단순히 1899년 헤이그에서 벌어진 두 개의 작은 에피소드가 아니다. 이들의 궤적은 당대 국제 질서를 지배하던 제국주의의 맨얼굴과 19세기 국제법의 배타적 본질을 정확하게 관통하고 있었다. 당시 독일 제국의 수석 대표였던 뮌스터(Count Münster) 백작이 본국의 뷜로프(Bülow) 외무장관에게 보낸 비밀 편지는 밀실 안의 지배자들이 밀실 밖의 절규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를 소름 돋을 정도로 솔직하게 드러낸다.


뮌스터는 평화를 열망하며 헤이그로 모여든 비주류 지식인들과 약소 민족들을 묶어 전 세계의 “정치적 쓰레기들(political riffraff)”이라고 매도하며, 회의가 “스테드 같은 최악의 언론인들, 블로흐 같은 세례받은 유대인들, 그리고 주트너 부인 같은 여성 평화 광신도들을 이곳으로 끌어들였다”고 맹비난했다. 그는 평화운동가들의 열정 못지않게 약소 민족들의 저항 역시 불온한 폭동으로 간주했다. 그는 편지에서 이러한 모든 오합지졸들이 슬롯주의자들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러시아의 비호 아래 공개적으로 활동하고 있다며 불쾌감을 숨기지 않았다.


1899년 헤이그의 눈부신 오렌지색 깃발 아래서 아르메니아인들의 죽음과 청년 투르크당의 굴욕은 저녁 만찬의 가십거리였다. 그것은 훗날 이 거대한 위선의 카르텔 앞에서 문전박대당하게 될 수많은 식민지 민족들의 운명과, 그로부터 8년 후 지구를 반바퀴 돌아 머나먼 한국에서 찾아올 세 명의 특사가 겪게 될 고난을 섬뜩하게 예고하는 전조(前兆)였다.


굳게 닫힌 회의장의 문밖에서 길거리를 떠돌며 절규했던 이들의 서글픈 피와 눈물은, 아름다운 헤이그 경관의 이곳 저곳에 역설적인 자국으로 오늘까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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