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들(1)
전통 의상 아래 숨겨둔 그들의 차가운 시선은
이미 역사의 다음 페이지를 정조준하고 있었다.
# 회의장의 전통의상들
1899년 5월 18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숲속의 궁전' 오라녜잘(Oranjezaal)은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대표단으로 회의장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러나 묵직한 검은색 프록코트와 훈장을 주렁주렁 단 서구 열강의 군복 물결 속에서, 유독 시선을 잡아끄는 이들이 있었다. '푸른 비단 가운'을 입은 청나라 관료, 머리에 '붉거나 검은 페즈(Pez)'를 쓴 중동의 외교관들. 26개국 108명의 대표단이 모인 이 회의는 표면적으로는 인류의 보편적 평화를 표방했고, 그 슬로건에 걸맞게 몇몇 아시아 국가들에도 문을 열어주었다.
러시아 황제는 이 회의에 비서구 국가들인 청, 일본, 시암, 페르시아, 오스만 제국, 멕시코를 초대했다. 회의장에 전통 의상을 입은채 모습을 드러낸 '문명 세계 저편'의 그들은 유럽 대중들의 눈에 분명 이국적이었을 것이다.
'인류 보편'이라는 캐치프레이즈에 경도된 평화주의자들이 분명 회의장 근처에서 상기된 표정으로 서 있었겠지만, 만국평화회의가 내세운 포용성은 사실 착각에 가까웠다. 회의장을 지배하는 국제법은 철저히 '유럽 기독교 문명의 산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 거대하고 투명한 장벽 앞에서, 아시아의 외교관들은 제국주의의 위협으로부터 자국의 생존을 뜯어내야 하는 각자의 절박한 대본을 쥐고 있었다.
# 청 대표단의 비극
청나라 대표 양유(Yang Yü)는 공작석 푸른빛 예복에 고위 관리의 상징인 붉은 산호 단추 모자를 쓴 채 꼿꼿이 자리를 지켰다. 서양 외교관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쏟아졌지만, 그 화려한 옷자락 아래에는 아편전쟁 이후 강제로 조약항 체제에 편입되어 치외법권과 관세권을 빼앗긴 제국의 상흔이 숨겨져 있었다.
당시 청나라가 처한 현실은 가혹했다. 19세기 후반 중국 대륙은 고도 제국주의(High Imperialism) 열강들의 먹잇감으로 전락해 있었다. 독일은 산둥반도의 자오저우만을 강점했고, 러시아는 만주와 랴오둥반도를, 영국은 양쯔강 유역을, 프랑스는 남부 지역을 자신들의 세력권으로 분할 점령했다. 회의가 열린 바로 그 해인 1899년, 미국의 국무장관 존 헤이가 선언한 '문호개방정바카라(Open Door Policy)'조차 중국의 주권을 보호하기 위한 처방이 아니었다. 뒤늦게 제국주의에 합류한 미국이 "우리도 중국을 나누어 먹을 상업적 기회를 동등하게 달라"고 기존 열강들에게 요구한 타협안에 불과했다.
사실 청나라가 마냥 무기력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포기했던 것은 아니다. 일찍이 린쩌쉬(임칙서)는 스위스 법학자 바텔의 국제법 저서를 번역해 주권 행사의 정당성을 찾으려 했고, 청 정부는 1864년 번역된 《만국공법》을 무기로 삼아 영해를 침범한 프로이센 함선에 항의해 사과와 배상금을 받아낸 기억도 있었다. 법을 방패로 삼을 수 있다는 작은 확신이 그들에게도 있었다.
그러나 유럽 국제법의 본진이라 할 수 있는 헤이그의 현실은 그들에게 냉혹했다. 서구 법학자들에게 국제법은 '유럽에 의한, 유럽을 위한 체계'일 뿐이었고, 비서구 국가는 그저 '반(半)야만 국가'에 불과했다. 청나라 대표단인 루정샹과 후웨이더는 "강대국들이 휘두르는 영사재판권은 우리의 영토 주권과 양립할 수 없다"고 외치려 했으나, 끝내 발언의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열강들이 중국 분할의 야욕을 번득이는 회의장 한구석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침묵 속에서 서구식 평화의 모순을 응시하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이 불길한 예감은 어김없이 현실이 되었다. 바로 이듬해인 1900년, 열강의 수탈에 반발해 폭발한 의화단 운동과 이에 대한 진압은 서구식 제국주의의 가장 폭력적인 민낯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에 더해 일본까지 합세한 8개국 연합군이 소요를 진압한다는 명분 하에 베이징을 무력 점령했고, 청나라는 당장 자국 1년 예산의 수 배에 달하는 배상금을 짊어진 채 베이징에 외국 군대의 주둔을 허용해야 했다(1901년 신축조약).
이러한 상황을 목전에 둔 1899년의 헤이그에서 청나라가 입었던 그 푸른 비단 가운은, 어쩌면 스러져가는 제국이 걸친 화려하고도 슬픈 수의(壽衣)였는지도 모른다.
# 일본 대표단의 속내
청나라가 수동적인 방어에 급급했다면, 일본의 전략은 서구 열강이 제시한 '문명국 표준'을 자발적으로 내면화하여 동등한 지위를 인정받는 동시에, 이를 발판 삼아 아시아 역내 세력권을 확보하는 이중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1854년 개항 이후 불평등 조약 개정을 국가적 과제로 삼은 일본은 서양의 군사력뿐만 아니라 국제법을 비롯한 제도적 기반을 빠르게 이식했다.
대표단으로 파견된 법률가 아리가 나가오의 행보는 이러한 전략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청일전쟁 당시 육군 법률고문으로 종군했던 그는, 일본이 서구식 인도주의 규범을 완벽히 수행하는 '문명국'임을 국제슬롯에 증명하는 데 주력했다. 치외법권 폐지라는 대내외적 명분을 확보하는 한편, 서구와 스스로를 동일시함으로써 향후의 팽창주의적 조치들을 국제법 체제 안에서 합법화하려는 의도였다. 이들에게 국제법은 주권을 지키는 방어벽이자, 타국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문명국 자격증'이었던 셈이다.
상설중재재판소 조약 타결 직후 6,000달러라는 천문학적인 비용을 들여 조약문 전체를 도쿄로 송신한 집착은 서구의 게임 법칙을 완전히 습득했음을 알리는 상징적 신호였다. 영국의 국제법학자들이 이를 두고 "일본이 동양에서 유럽 계급으로 이행한 흥미로운 사례"라고 평가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서구 문명국 클럽으로의 진입은 다른 아시아 이웃 국가들을 '비문명'으로 타자화하는 배제의 과정이었으며, 이는 훗날 한반도 병합 과정에서 일본이 야욕을 국제법 기술로 정당화하는 정교한 기초가 되었다.
# 시암 대표단의 한계와 좌절
영국의 버마와 프랑스의 인도차이나라는 두 거대한 식민지 제국 사이에 끼어 있던 시암(태국)의 생존법은 조금 더 영리했다. 직접 싸우는 대신, 서구의 거물 법률가를 방패로 고용한 것이다. 시암 왕실은 국제법학회의 공동 설립자인 벨기에 법학자 구스타프 롤랭-자크맹을 고문으로 영입했고, 이번 회의에도 그의 아들 에두아르를 대표로 보냈다.
그러나 당시 시암의 외교관이 남긴 기록은 당대 국제법의 편협함을 보여주는 씁쓸한 장면을 남겼다. 초기 회의에서 가까스로 발언권을 얻은 시암 대표는 러시아 차르를 찬양하는 장황한 연설을 늘어놓은 뒤, 세계가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는 사실에 감격해 연설 전문을 방콕의 국왕에게 전보로 쳤다. 어떻게든 회의의 일원으로 인정받고 싶었던 약소국 외교관의 눈물겨운 몸부림이었다.
진짜 장벽은 해전에서의 적십자 조약 적용을 논의하던 소위원회에서 나타났다. 오스만 제국 대표가 기독교의 상징인 십자가 대신 이슬람의 상징인 '반달(적신월)'을 자국의 병원선에 쓰게 해달라고 요구하자, 시암 대표도 힘을 보태며 불교의 상징인 '법륜'(톱니바퀴 모양)을 인정해 달라고 요청했다. 보편적 인류애를 논하는 자리에서 비서구 문명의 상징들이 존중받을 수 있을지 시험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의장이었던 네덜란드의 토비아스 아세르는 이 요구를 단칼에 묵살했다. "불필요한 논의"라는 이유였다. 결국 적십자만이 유일한 보편성을 인정받았다. 시암의 목소리는 서구 문명의 배타적인 성벽에 부딪혀 산산조각 났고, 그들은 유럽의 승인 없이는 자국의 상징조차 통용되지 않는 현실을 뼈아프게 받아들여야 했다.
# 페르시아의 시선
회의장 한편에서 머리에 "검은 페즈"를 쓴 채 묵묵히 자리를 지키던 페르시아(이란) 대표 미르자 리자 칸 장군의 처지도 다르지 않았다. 19세기 말 페르시아는 북쪽의 러시아와 남쪽의 영국이 벌이는 지정학적 땅따먹기, 즉 '그레이트 게임'의 무기력한 바둑판이었다.
유럽의 법학자들은 페르시아를 중국과 함께 '반(半)문명 국가'로 분류하며 영사재판권을 당연시했다. 페르시아 대표단은 강대국들이 밀실에서 세계의 군비와 평화의 규칙을 제멋대로 재단하는 모습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회의의 주도권은 온전히 유럽의 손에 있었고, 그들은 체스판 위의 말에 불과해 보였다.
하지만 이들은 단순히 절망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페르시아의 외교관들은 제국주의 열강이 평화라는 화려한 수사학 뒤에 숨겨둔 야심을 조용히 읽어내고 있었다. 훗날 이 서구의 논리를 역으로 들이받기 위한 규범의 무기를 내밀하게 학습하고 있었던 것이다. 검은 페즈 아래 가려진 차가운 시선이 서구의 위선 속에서 생존의 법칙을 감별해 내고 있었다는 사실을, 당시 회의장의 서구인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 프로메테우스의 형벌
1899년 제1차 헤이그 평화회의에서 아시아 외교관들이 수행한 역할은 강대국들이 주도하는 화려한 연극 무대의 엑스트라처럼 보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역사라는 긴 앵글로 보면, 이 이방인들이 남긴 발자국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현대의 학자들은 이들의 참가가 철저히 유럽만의 리그였던 국제 질서에 균열을 내고, 서구의 국제법을 전 지구적인 보편 체제로 끌어내리는 거대한 서막이었다고 평가한다.
물론 그들의 지향점은 저마다 달랐다. 스스로 열강의 문법을 완전히 체득하여 제국의 반열로 도약하고자 했던 일본은 이 회의를 기점으로 이방인의 코트를 벗어던지고 포식자의 대열에 합류했다. 반면 청나라와 시암, 페르시아의 외교관들은 회의장의 냉대와 제도적 배제를 온몸으로 견디며 외교와 국제법이라는 무기를 조용히 벼려내야 했다.
비록 1899년의 헤이그에서 대부분의 비서구 대표단들은 주권적 평등이라는 불을 훔쳐 오기 위해 차별을 견뎌내는 프로메테우스의 형벌을 자처했으나, 전통 의상 아래 숨겨둔 그들의 차가운 시선은 이미 역사의 다음 페이지를 정조준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서구 슬롯에 합류하는 것을 넘어, 그들과 경쟁하는 위치가 될 것을 예견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