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 살육의 규칙을 정하다

제2위원회

by밤톨



"헤이그는, 적어도 인간이 스스로 짐승이 되지 않기 위해 준수해야 할 살육의 한계선을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국제법의 테두리 안에 그어 대고 있었다."




# 가장 인도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법

무장 해제라는 이상주의적 환상이 제1위원회의 회의장 안에서 산산조각 난 직후, 제1차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의 무게 중심은 자연스럽게 또 다른 밀실로 옮겨갔다. 전쟁이라는 괴물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놓을 수 없다면, 적어도 그 괴물이 날뛰는 방식에 '문명'이라는 이름의 목줄이라도 채워보자는 타협안이 부상한 것이다. 무기를 버릴 수 없다는 제국주의 열강들의 차가운 진심이 확인된 위에서, 평화회의의 인도주의 위원회는 이제 대포의 구경과 폭약의 성분, 그리고 교전 규칙이라는 지극히 기술적인 논쟁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가장 인도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방법을 발명하기 위한, 기이하고도 서늘한 외교 전의 시작이었다.


제2위원회의 가장 시급한 목표 중 하나는 1864년 채택된 제네바 협약의 인도주의적 원칙을 육전(陸戰)을 넘어 해전(海戰)으로 확대 적용하는 일이었다. 네덜란드의 권위 있는 법학자 토비아스 아세르(Tobias Asser)가 이끄는 소위원회는 이 작업을 빠르게 추진했다. 뛰어난 두뇌와 강한 추진력을 지녔던 아세르는 위원들이 쓸데없는 수사에 시간을 낭비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불필요한 보고서 낭독 절차를 과감히 생략하고 곧바로 본론으로 뛰어들어, 회의가 시작된 지 불과 일주일 만에 병원선 보호와 부상병 대우에 관한 새로운 조약 초안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 열기구와 덤덤탄

하지만 이토록 순조로워 보이던 '전쟁의 인간화' 작업은 대서양 너머에서 온 한 냉혹한 해군 전략가의 현실주의 장벽 앞에서 번번이 제동이 걸렸다. 미 해군 대표 알프레드 세이어 마한(Alfred Thayer Mahan) 대령은 회의 내내 사냥꾼처럼 날카롭게 깨어 있었다. 그는 인도주의적 제안들이 조국의 국익과 해군의 작전 수행에 조금이라도 걸림돌이 될 조짐이 보이면, 즉각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특유의 반대 논리를 펼쳤다.


마한 대령의 차가운 시선은 특히 중립국 선박에 의해 구조된 전투원들의 지위 문제에 꽂혀 있었다. 1864년의 제네바 협약은 부상당하거나 난파된 군인을 적대 행위에서 이탈한 자로 보아 인도적으로 보호할 것을 규정했다. 하지만 마한에게 이는 승전국이 마땅히 획득해야 할 정당한 포로를 부당하게 빼앗기는 위험한 발상에 불과했다.


남북전쟁 당시 연방 해군으로 참전했던 마한은, 영국(당시 중립국) 요트 '디어하운드(Deerhound)'호가 격침된 남부 연합 순양함 '알라바마(Alabama)'호의 선원들을 구출한 뒤 영국 국기 아래 그들의 도주를 도왔던 역사적 사건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마한에게 전쟁의 목적은 오직 승리뿐이었으며, 인도주의라는 명목으로 적의 군사력을 살려두는 것은 군인의 본분을 저버리는 일이었다. 그에게 법과 규정이란 오직 전장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통제하고 도구화해야 할 대상이었다.


이러한 국가 이기주의와 현실주의의 민낯은 '육전의 법규와 관례(Laws and Customs of War on Land)'를 성문화하는 과정에서도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회의장에는 이미 역사적으로 이정표가 된 두 개의 텍스트가 존재하고 있었다. 하나는 미국의 남북전쟁 당시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승인 아래 프랜시스 리버(Francis Lieber) 교수가 작성했던 '일반 명령 100호(General Order No. 100, 리버 코드)'였고, 다른 하나는 이를 바탕으로 1874년 유럽 열강들이 시도했던 '브뤼셀 선언(Brussels Declaration)'이었다.


하지만 정작 미국의 육군 대표로 참석한 윌리엄 크로지어(William Crozier) 대위는 이 논의에 놀라울 정도로 무관심했다. 크로지어는 조국의 유산인 리버 코드의 사본조차 챙겨 오지 않아 워싱턴에 급전을 쳐서 급히 받아보아야 할 만큼 준비가 부족했고, 논의 내내 철저한 방관자로 머물렀다.


가장 격렬하고 치명적인 충돌은 살육의 도구, 즉 신무기 사용 금지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마침내 폭발했다. 열기구에서 폭발물을 투하하는 행위, 팽창성 덤덤탄(dum-dum bullets)의 사용, 그리고 질식성 가스(asphyxiating gases)를 탑재한 포탄의 사용을 금지하자는 제안들이 차례로 도마 위에 올랐다. 인간이 개발한 새로운 살육 병기를 법으로 묶어보려는 시도는 사실 헤이그가 처음은 아니었다. 멀게는 고대의 독 묻은 무기 금지에서부터, 중세 제2차 라테란 공의회(Second Lateran Council)가 기독교인에 대한 석궁사용을 금지했던 1139년의 시도에 이르기까지 인류는 지나치게 잔혹한 무기의 등장을 늘 두려워해 왔다.


하지만 20세기의 문턱에 발명되기 시작한 새로운 무기들은 지난 수백년 간의 무기들과는 이미 완전히 다른 차원에 있었다. 평화를 갈망하던 회의장 밖의 몽상가들은 이 다가오는 재앙을 법으로 금지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하지만 무기의 파괴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각국의 군사 전문가들은 양보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우선 열기구에서의 폭발물 투하 금지 안에 대해 열강들은 선뜻 '5년간의 금지'에 동의했다. 하지만 이는 그들이 갑자기 인류애(人類愛)에 눈을 떴기 때문이 아니었다. 단지 1899년 당시의 비행선과 열기구 기술은 아직 전장에서 결정적인 타격력을 발휘할 만큼 성숙하지 않았기에, 미래의 기술 개발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하지 않는 선에서 5년이라는 짧은 기한을 두고 타협한 것에 불과했다.


덤덤탄을 묘사한 그림 (발사 전과 명중 후)


# 무엇이 잔인한가?

영국의 노골적인 위선이 폭로된 것은 탄환이 인체에 명중하는 순간 내부에서 파열되어 끔찍한 신체 손상을 남기는 '덤덤탄' 금지 논의에서였다. 러시아를 필두로 한 대다수 국가는 이 잔혹한 탄환의 사용을 금지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이미 인도와 수단 등지의 식민지 전쟁에서 이 팽창성 탄환으로 쏠쏠한 재미를 보았던 대영제국은 강력히 반발했다.


영국의 군사 대표인 존 아다그(Sir John Ardagh) 장군의 논리는 19세기 제국주의의 오만과 인종주의적 편견을 섬뜩할 정도로 완벽하게 대변하고 있었다. 아다그 장군은 "문명화된 나라의 병사들은 일반적인 총탄에 맞으면 상처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순순히 쓰러지지만, 야만인(savages)들은 몸을 관통하는 작은 총탄 정도로는 멈추지 않고 끝까지 돌진해 오기 때문에, 그들의 발을 묶기 위해서는 신체에 더 큰 충격을 가하는 팽창성 탄환이 반드시 필요하다"라고 강변했다. 백인 문명국 간의 전쟁에서는 인도주의를 시늉이라도 내겠지만, 식민지 영토를 지배하고 원주민을 탄압하는 전쟁에서는 그 어떤 제한도 받지 않겠다는 이 소름 끼치는 이중잣대는, 평화회의의 본질이 결국 '유럽 강대국들만의 잔치'에 불과함을 여지없이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 회의에서 가장 서늘한 철학적 딜레마를 던진 인물은 다시 한번 미국의 마한 대령이었다. 적진에 질식성 독가스를 퍼뜨리는 포탄의 사용을 영구히 금지하자는 제안에 대해 거의 모든 열강이 동의할 때, 마한은 홀로 고개를 저으며 조약 문서에 서명하기를 완강히 거부했다. 그는 "질식 가스는 인체를 산산조각 내거나 평생 불구로 만드는 폭탄이나 어뢰보다 오히려 더 인도적인 살상 수단일 수 있다"는 궤변을 고집했다.


그의 질문은 가차 없었다. 왜 물에 빠진 선원을 어뢰로 폭사시키는 것은 '합법적이고 문명화된' 전쟁 행위로 용인하면서, 적을 가스로 질식시키는 것은 '야만적이고 잔혹한' 범죄로 규정해야 하는가? 전쟁 그 자체가 본질적으로 생명을 빼앗는 가장 극단적인 야만인데, 그 폭력의 구덩이 안에서 더 인도적인 살인 방식과 덜 인도적인 방식을 구분하려는 시도 자체가 지독한 위선이자 모순이 아니던가? 마한은 이러한 논리적 허점을 무기 삼아, 조국 미국이 장차 전장에서 쥐게 될지도 모르는 신무기의 가공할 가능성을 선제적으로 포기하는 어리석음을 단호히 거부했던 것이다.


회의가 거듭될수록 '전쟁의 규칙'을 정하려는 제2위원회의 시도는 강대국과 약소국, 점령국과 피점령국의 날 선 이해관계에 부딪혀 번번이 좌초될 위기를 맞았다. 특히 점령지 내에서의 '저항 권리'를 둘러싸고, 압도적인 무력으로 이웃 나라를 짓밟으려는 군사 대국(독일)과 침략에 맞서 나라와 영토를 지켜내야만 하는 약소국(벨기에, 네덜란드) 사이의 입장은 평행선을 달렸다.



# '마르텐스 조항'

파국 직전, 이번 제2위원회의 엉킨 매듭을 끊고 회의를 구출해 낸 인물은 위원회 의장이자 당시 러시아의 저명한 법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던 표도르 마르텐스(Friedrich Martens)였다. 마르텐스는 각국의 이해관계로 갈가리 찢긴 조약문의 빈 공간을 '인류의 양심'이라는 거대한 개념으로 메워버리는 이른바 '마르텐스 조항(Martens Clause)'을 제안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조항을 헤이그 협약에 포함시킬 것을 제안했다.


"성문화된 국제법이 다루지 못하는 전쟁의 예기치 못한 비극 속에서도 분쟁 당사국과 민간인은 여전히 문명국들 사이에 확립된 관습과 인류애의 법칙, 그리고 공공 양심의 요구(the dictates of the public conscience)라는 보호 아래 놓여 있다."

- 헤이그 제2협약(육전의 법규와 관례에 관한 협약)의 전문(前文) 中


마르텐스 조항은 법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인간의 도덕적 바카라임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려 했던 한 법학자의 처절한 고뇌가 빚어낸 타협의 산물이었다. 제국주의 열강들이 팽창성 탄환으로 식민지의 원주민들을 사냥하듯 학살할 권리를 고집하고, 냉혹한 해군 전략가가 독가스의 인도주의적 효용성을 열변하는 그 기만적인 밀실 안에서도, 누군가는 폭력의 야만성에 맞서 최소한의 인간적 방파제를 세우려 분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마르텐스 조항을 모든 이에게 평등하게 적용되는 법적 장치로 평가하기에는 여전히 한계가 존재했다. 유럽의 군인들에게 마르텐스 조항은 결코 넘어서는 안 될 '최소한'의 경계선이었지만,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피지배 민중들에게 이것은 열강의 자비에 기댈 수밖에 없는 '최대한'이자 '유일한' 법적 보호막이었다.


전투 현장에서 이러한 법적 기준의 온도 차는 필연적으로 처참한 불평등으로 이어졌다. 덤덤탄과 독가스의 사용 여부는 오직 그 무기를 쥔 유럽인들의 자의적인 '양심'에 맡겨졌을 뿐이었다. 비록 마르텐스 조항이 전쟁 수단에 대한 금지 규정이 부재했던 시대에 인류의 "양심적 기준"을 설정하는 데는 성공했을지언정, 성문화된 전쟁법의 따뜻한 품은 끝내 아시아를 포함한 비유럽 지역까지 뻗어가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제2위원회에서 탄생한 살육의 규칙들은 국가의 이기심과 인류의 도덕 사이에서 위태롭게 흔들리는 근대 문명의 씁쓸한 자화상이었다. 그럼에도 1899년의 헤이그는, 적어도 인간이 스스로 짐승이 되지 않기 위해 준수해야 할 '살육의 한계선'을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국제법의 테두리 안에 그어 대고 있었다. 비록 차디찬 현실 위에 그려진 못내 서글픈 선이었을지라도 말이다.





1899년 제1차 만국평화회의 당시 러시아 대표단과 표도르 마르텐스(하단 왼쪽에서 두 번째)

사진: Unsplash의 The Australian War Memorial

사진: By wikipedia, Public Domain,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7927923

사진: By Unknown author - Шиллинг М. Ф. Дневник (1899) / Публ., предисл. и примеч. В. Е. Авдеева, М. В. Сидоровой // Российский Архив: История Отечества в свидетельствах и документах XVIII—XX вв.: Альманах. — М.: Студия ТРИТЭ; Рос. Архив, 2004. (direct image link)zakon.ru/blog/2019/12/24/, Public Domain,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23273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