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 숲속 궁전으로 모여든 세계

by밤톨


"밀실의 외교관들은
대중이라는 왕(King Demos)의 시선을 뼈저리게 느끼며 협상에 임해야 했다."




[Day 1] 1899년 5월 18일


# 네덜란드의 헤이그

1899년 봄, 이 거대한 외교적 실험의 무대로 낙점된 곳은 열강들의 화려한 수도가 아니었다. 회의를 제안한 러시아 제국 정부는 정치적 이해관계가 촘촘히 얽힌 강대국의 중심지를 피하고 싶어 했다. 특정 강대국이 호스트가 될 경우, 그들의 입김에 회의의 본질이 흔들리거나 지나친 영향력에 휘둘릴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러시아는 작고 중립적인 네덜란드에 회의 개최를 타진했다. 네덜란드 외무장관 윌럼 헨드릭 드 보포트(Willem Hendrik de Beaufort)는 처음에 이 제안을 받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는 "작은 국가는 가능한 한 혼란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있어야 한다"는 확고한 외교 철학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러나 당시 영국과 패권경쟁을 하던 러시아 황제의 "매우 확고한 염원"을 거절할 명분은 없었고, 결국 네덜란드 정부는 이 위험하고도 영광스러운 제안을 수락했다.


불과 18세의 나이로 갓 즉위한 네덜란드의 젊은 여왕 빌헬미나(Wilhelmina)는 회의 개최를 흔쾌히 수락하며 자신의 여름 궁전인 '하위스 텐 보스(Huis ten Bosch)', 즉 '숲 속의 궁전'을 회의장으로 기꺼이 내놓았다. 회의 개막일은 회의를 처음 제안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생일인 5월 18일로 정해졌다.


작고 조용했던 도시 헤이그는 전 세계에서 몰려든 외교관들과 평화주의자들, 언론인들로 인해 거대한 축제장으로 변모했다. 17세기의 붉은 벽돌집과 조약돌 거리라는 "시대착오적 풍경"을 간직하고 있던 이 조용한 도시는 평화회의를 맞아 마치 "수백 년의 깊은 잠에서 깨어난 잠자는 숲속의 미녀"처럼 깨어나 요동치기 시작했다.


5월 18일 당일의 날씨는 완벽한 봄날이었다. 회의장으로 향하는 약 2마일의 길목에는 네덜란드를 상징하는 밝은 오렌지색 깃발을 필두로 각국의 국기들이 펄럭였고, 수천 명의 인파가 길게 늘어서서 화려한 마차들의 행렬을 환영했다. 놀랍게도 이 거대한 인파를 통제하기 위한 경찰은 단 한 명도 배치되지 않았으며, 오직 궁전 문 앞에 소수의 군인과 하인들만이 마차의 통행을 도울 뿐이었다. 길가에는 흑백 얼룩소들이 평화롭게 풀을 뜯고, 풍차의 날개가 부드럽게 돌아가며, 수로 위를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돛단배들이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을 자아냈다.


오후 2시, 숲 속의 궁전 정중앙에 위치한 3층 높이의 팔각형 홀인 '오라녜잘(Oranjezaal, 오렌지 홀)'에 26개국 108명의 대표단이 모두 착석했다. 홀의 벽면은 1648년 베스트팔렌 평화조약을 기념하는 웅장한 그림들로 장식되어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평화의 여신이 야누스의 신전 문을 닫기 위해 홀로 들어서는 은유적인 그림은 참석자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네덜란드 외무장관 드 보포트가 개회사를 통해 이 아름다운 알레고리가 회의의 성공을 알리는 길조가 되기를 바란다고 선언한 뒤, 러시아의 수석 대표이자 주영 러시아 대사인 드 스탈(Baron de Staal) 남작을 회의의 의장으로 추대했다.



# 초대받은, 초대받지 못한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이 완벽한 평화의 축제 이면에는, 회의의 성공에 대한 깊은 회의감과 의장의 지독한 불안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백발의 구레나룻을 기른 77세의 노련한 외교관 드 스탈은 "내가 아는 한 가장 훌륭한 사람 중 하나이며 진실이 아닌 것은 결코 말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영국 웨일스 공의 찬사를 받을 만큼 인품이 훌륭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일기장이나 지인들에게 솔직하게 고백했듯, 반세기가 넘는 외교관 생활 동안 단 한 번도 이런 대규모 국제회의에 참석해 본 적이 없었으며, 더구나 의회식 회의 진행 절차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전무했다.


의장석에 오른 드 스탈은 극도의 긴장감에 휩싸였다. 그의 개회사는 떨림과 단호함이 교차하는 목소리로 울려 퍼졌고, 급기야 손에 쥐고 있던 나무 의사봉을 바닥에 떨어뜨리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회의의 성공을 불신하던 비관론자들에게 의장이 의사봉을 떨어뜨린 사건은 즉각적으로 회의의 불길한 전조이자 조롱거리로 소비되었다. 그는 안건을 제시하는 방법조차 알지 못했고, 누군가 수정안을 내놓으면 그것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 결국 러시아의 권위 있는 국제법 학자 표도르 마르텐스(Fedor Martens)가 서둘러 그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회의를 마무리해야 한다고 알려주어야만 했다.


이토록 불안하게 출발한 만국평화회의는 그 참석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더욱 짙은 모순을 드러냈다. 이 회의는 '세계 평화'를 표방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륙 너머의 신생 국가들이 지닌 정통성이나 독립성에 대한 끝없는 논쟁을 피하기 위해 오직 러시아 궁정에 외교 사절을 파견한 26개국 만을 초청하는 것으로 그 대상을 제한했다. 이는 곧 임박한 제국주의 전쟁의 가장 처참한 희생양이 될 약소국들이 철저히 배제되었음을 의미했다.


네덜란드 정부는 같은 핏줄인 남아프리카의 트란스발 공화국과 오렌지 자유국(보어 공화국들)을 초청하고자 했으나, 영국과의 마찰을 두려워한 독일 외무성의 조언에 따라 끝내 초청을 포기해야만 했다. 또한 교황청 역시 초청 대상에서 제외되었는데, 이는 교황청이 회의에 참석할 경우 즉각 회의장을 박차고 나가버리겠다는 이탈리아 정부의 강력한 협박 때문이었다. 불가리아는 오스만 제국의 종주권 아래 있는 속국이었으나 러시아의 강력한 입김 덕분에 간신히 회의에 참석할 수 있었는데, 이 때문에 불가리아 대표단은 모든 공식 행사에서 오스만 제국 대표단의 바로 뒷자리에 앉아야만 하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 윌리엄 스테드

궁전 안의 외교관들이 이처럼 강대국의 논리에 따라 초대장을 통제하고 철저한 비밀주의의 장막 뒤로 숨으려 하자, 궁전 밖에서는 대중의 알 권리를 무기로 한 언론인들의 치열한 장외 전쟁이 불을 뿜었다. 각국 대표단은 협상의 성격상 공개적인 토론이 불필요하다고 합의하고 모든 외부인의 회의장 출입을 엄격히 통제했다. 언론에 대한 정보 제공은 오직 의장과 사무국이 작성한 요약본으로만 제한되었다. 관료주의적 통제와 빈약한 정보에 분노한 수많은 기자들은 회의가 개막한 지 불과 일주일도 되지 않아 헤이그를 떠나버렸다.


하지만 당시 『맨체스터 가디언(Manchester Guardian)』의 특파원 자격으로 헤이그에 머물던 영국의 열정적인 언론인 윌리엄 T. 스테드(William T. Stead)는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굳게 닫힌 밀실의 문을 부수기 위해 그는 "추적하기 어려운 여우를 사냥하겠다"라고 호언장담했으며, 실제로 그 여우들을 찾아내는 것은 그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1899년 6월부터 7월까지 스테드는 현지 신문인 『다흐블라트(Dagblad van Zuid-Holland en 's-Gravenhage)』의 지면을 활용해 『평화회의 연대기(La Chronique de la Conférence de la Paix)』라는 명칭의 4쪽짜리 일일 부록을 매일 발행했다. 그는 회의장 주변을 맴돌며 세르비아 수석 대표 체도밀 미야토비치(Chedomil Mijatovich)를 비롯한 여러 대표단으로부터 은밀한 내부 정보를 캐냈고, 이를 바탕으로 각국 대표단의 꼼수와 비공개 토론의 이면을 낱낱이 폭로했다.


스테드가 발행한 이 신문은 매일 아침 모든 대표단에게 무료로 배포되었다. 외교관들은 불쾌감을 토로하면서도 그의 기사를 읽지 않을 수 없었다. 공식 회의장의 굳게 닫힌 문틈 사이로 여론의 빛을 들이민 영국 언론인 스테드의 폭로전 덕분에 밀실의 외교관들은 굳게 닫힌 문틈 사이로 자신들을 감시하는 이른바 '대중이라는 왕(King Demos)'의 시선을 뼈저리게 느끼며 협상에 임해야 했다. 결국 언론과 여론의 엄청난 압박에 굴복한 회의 주최 측은 고립주의적 비밀주의를 일부 포기하고 본회의장 갤러리에 기자석 50석(후에 68석)을 마련하는 등 조금씩 문을 열 수밖에 없었다.


비록 차가운 밀실의 문을 완전히 열어젖히지는 못했을지언정, 1899년의 몽상가들과 대중들이 만들어낸 거대한 여론은 '평화'라는 의제를 사상 처음으로 강대국들의 밀실 외교가 아닌 '대중의 감시와 요구'라는 시대적 무대 위로 끌어올린 이정표적 사건으로 남았다.





사진: Door PeteBobb - Eigen werk, CC BY-SA 3.0 nl,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21732803 오늘날 헤이그의 하위스 텐 보스 모습.

사진: Unsplash의 Chloe Christine

사진: Door Fundatie voor Internationalisme te Den Haag / Fondation Pour l'Internationalisme à la Haye / Foundation for Internationalism - Courrier de la Confèrence de la Paix, No. 18. Vendredi 5 Juillet 1907DigiZeitschriften, Public Domain


쿠키글


훗날 제2차 만국평화회의(1907)이 열리자 윌리엄 스테드는 아예 회의 관련 전문 일간지를 스스로 발행하기 시작한다. 그것이 바로 『평화회의보(Courrier de la Conférence de la Paix)』이다. 제2차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기간 동안 주 6일 발행된 프랑스어 기반의 국제 신문으로, 1907년 6월 15일부터 10월 20일까지 총 109호가 간행되었다.


이 신문은 전체 회의의 요약 보고, 각국 대표단의 인물 스케치 및 초상화, 인터뷰, 사진, 풍자 카툰 등을 수록했다. 일간지 형태를 띠며 회의의 일상적인 진행 상황과 현장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달했다. 특히 1907년 6월 30일, 평화회의에 공식 초대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성명서를 통해 일본의 식민화 시도를 국제슬롯에 알리려 했던 세 명의 한국인 문제에 주목했다.


『평화회의보』는 이들의 성명서 전문을 지면에 게재했다. 윌리엄 T. 스테드(William T. Stead)가 신문의 발행인이었으며, 편집진에는 베르타 폰 주트너 남작부인(Barones Bertha von Suttner)등이 참여했다.


헤이그 특사: 이준, 이상설, 이위종 (19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