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 몽상가들과 냉소주의자들

by밤톨


"전쟁은 결국 '자살이라는 대가를 치르지 않고는 불가능해졌다."




[D-1] 1899년 5월 17일


# 평화운동가, 작가, 예술가

네덜란드 헤이그에 모여든 각국의 외교관들은 자신들을 향한 대중의 관심이 국가 이성(raison d'État)을 방해하는 불필요한 소음이라고 생각했다.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회의장은 민중들이 정치적 가십을 주고받는 길거리와 전혀 다른 차원의 공간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은 이미 변해 있었다. 회의장 밖 헤이그의 거리와 광장, 호텔 로비는 평화를 열망하는 전 세계의 이상주의자들, 이른바 '평화의 십자군'들로 들끓고 있었다. 강대국들이 밀실의 문을 걸어 잠그려 할 때, 이 몽상가들은 여론이라는 거대한 해일을 일으켜 그 문을 부수려 하고 있었다.


이 들끓는 여론의 중심에는 오스트리아의 평화운동가이자 베스트셀러 『무기를 내려놓으라(Die Waffen nieder)』의 저자인 베르타 폰 주트너(Bertha von Suttner) 남작 부인이 있었다. 그녀가 머물던 센트랄 호텔(Hotel Centraal)의 응접실은 불과 며칠 만에 공식 회의장을 압도하는 '회의의 슬롯적 중심지'로 변모했다. 그녀는 비록 공식 대표단은 아니었으나, 평화운동의 살아있는 상징으로서 외교관과 언론인, 작가들을 자신의 응접실로 불러모아 밤늦도록 토론을 벌였다. 그녀를 조롱하던 자들조차 그녀의 부드럽고 음악적인 목소리와 논리적인 주장에 감화되곤 했다.


주트너 부인에게 이 회의는 인류의 진보를 증명할 위대한 도약이었다. 그녀와 동시대의 이상주의자들은 19세기가 이룩한 눈부신 과학과 물질적 번영이 인류를 영적으로도 변화시켰으며, 따라서 인간이 전쟁을 벌이기에는 '너무나 문명화되었다'는 장밋빛 믿음을 품고 있었다.


지식인과 예술가들 역시 펜과 붓을 무기 삼아 이 평화의 성전에 동참했다.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Leo Tolstoy)는 전쟁과 군국주의의 본질이 국가의 기만이라고 고발했다. 그는 군인들이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며, 거짓된 명분에 속아 넘어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 떼처럼 행진한다고 비판했다.


시각 예술가들의 고발은 더욱 처절했다. 네덜란드의 화가 얀 텐 카테(Jan ten Kate)는 헤이그의 풀크리 스튜디오(Pulchri Studio)에서 열린 전시회에서, 거대한 해골이 피처럼 붉은 망토를 휘날리며 사람들을 그물로 쓸어 담는 섬뜩한 작품을 선보여 전쟁의 야만성을 폭로했다. 러시아의 화가 바실리 베레시차긴(Vasili Vereshchagin) 역시 전쟁을 국가적 영광이나 낭만이 아닌 잔혹한 도살장으로 묘사하여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는데, 그의 그림이 군인들의 반전 의식을 자극할 것을 두려워한 독일 군부는 소속 군인들의 전시회 관람을 엄격히 금지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지식인들의 호소는 일반 대중의 폭발적인 평화 열망으로 이어졌다. 수십만, 수백만의 서명과 청원서가 각국에서 쏟아져 들어왔다. 프랑스 리옹, 영국 에든버러, 독일 라이프치히의 시민 단체들, 심지어 미국의 작은 소도시 주민들까지 만장일치로 군비 축소와 국제 재판소 설립을 촉구하는 탄원서를 보냈다. 덴마크에서는 무려 28만 6천 명이, 벨기에에서는 10만 6천 명 이상이 서명에 동참했다. 특히 여성 기독교 절제회(WCTU)의 한나 J. 베일리(Hannah J. Bailey) 등 여성 운동가들은 어머니의 마음으로 전쟁의 폐해를 막아야 한다며 수백만 장의 반전 문건을 배포했다.


단지 평화를 외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철도 사업가이자 학자인 이반 블로흐(Ivan Bloch)는 딜리전티아(Diligentia) 극장에서 슬라이드와 도표를 동원해 연속 강연을 열며 방대한 통계와 과학적 분석으로 미래의 전쟁을 경고했다. 그는 신형 무기의 파괴력이 압도적으로 진화했기 때문에 미래의 전쟁은 전면적인 살육과 슬롯 전체의 붕괴로 이어질 것이라 보았으며, 전쟁은 결국 '자살이라는 대가를 치르지 않고는 불가능해졌다'고 논증했다. 당시로서는 지극히 파격적이었던 이반 블로흐의 과학적 혜안은, 불과 십여년 뒤 전 세계를 피로 물들인 양차 세계대전(제1차 1914~1918 / 제2차 1939~1945)의 발발로 그 모두가 잔인한 진실이었음이 입증된다.



# 각국 대표단의 냉소

그러나 회의장 안의 현실은 바깥의 뜨거운 이상과 철저히 유리되어 있었다. 각국을 대표하여 파견된 외교관과 군사 전문가들은 평화를 열망하는 대중을 멸멸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독일 대표단의 수석 대표인 뮌스터 백작(Count Münster)은 헤이그에 모여든 사람들을 향해 "회의는 전 세계의 정치적 쓰레기들을 이곳으로 끌어들였다. 스테드 같은 최악의 언론인들, 블로흐 같은 유대인들, 그리고 주트너 부인 같은 여성 평화 광신도들이 그들이다"라며 노골적인 혐오감을 드러냈다.


더욱 기만적인 것은 평화회의에 임하는 열강들의 태도 그 자체였다. 독일 제국은 애초에 대놓고 전쟁을 찬양하는 인물을 대표로 파견하여 회의 자체를 조롱했다. 뮌헨 대학의 법학 교수 카를 폰 슈텡겔(Karl von Stengel) 남작은 『영구 평화(Der Ewige Friede)』라는 팸플릿을 통해 (제목과 상반되게도!) 전쟁을 칭송하고 다가오는 평화회의를 한낱 '백일몽'으로 치부했던 인물이었으나, 독일 정부는 전 세계의 비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공식 대표로 헤이그에 보냈다.


프랑스 역시 겉으로는 러시아와의 동맹을 유지하기 위해 회의에 참석했으나, 속내는 독일과 다르지 않았다. 프랑스 외무장관 델카세(Théophile Delcassé)는 회의에서 프랑스의 이익이 독일의 이익과 같을 것이라고 독일 측에 은밀히 귀띔하며, 군비 축소를 반대하는 데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영국의 솔즈베리 총리와 아서 발푸어(Arthur Balfour) 역시 겉으로는 인도주의적 수사를 늘어놓았지만 내심으로는 이 회의가 영국의 압도적인 해군력을 억제하려는 음모라고 경계하며 실질적인 군비 축소안을 철저히 묵살했다.


군사 엘리트들의 냉소는 한술 더 떴다. 특히 미국 대표단으로 파견된 해군 전략가 알프레드 세이어 마한(Alfred Thayer Mahan) 대령의 지론은 19세기 말 제국주의 시대에 유행하던 슬롯진화론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마한은 국가 간의 '정직한 충돌'이야말로 진보의 법칙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는 전쟁이라는 무력 행사가 국가의 운명을 결정하는 영웅적인 이상이며, 무력 대신 중재라는 허상에 기대는 것은 국가의 투쟁 에너지를 상실하게 하여 문명의 생존마저 위협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문명국들이 전쟁 준비를 포기하는 것보다 더 큰 불행은 없다는 것이 그의 냉혹한 신념이었다.


군비 축소안을 논의하는 제1위원회에서 이 냉소주의는 마침내 폭발했다. 군사 예산과 병력을 동결하자는 러시아의 제안이 상정되자, 독일의 육군 대표 그로스 폰 슈바르츠호프(Gross von Schwarzhoff) 대령은 차갑고도 단호한 연설로 회의장을 압도했다. 대중들이 무거운 군사비에 짓눌려 고통받고 있다는 평화주의자들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며, 병역은 무거운 짐이 아니라, 국가의 존재와 번영, 그리고 미래를 위해 이행해야 할 '신성하고도 애국적인 의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 1899년 헤이그의 풍경

이날 헤이그의 하늘 아래 너무도 다른 두 세계가 충돌하고 있었다. 거리에서는 인류애와 이성을 맹신하며 새로운 평화의 시대를 노래하는 몽상가들과 대중들의 외침이 요동쳤고, 화려한 궁전의 밀실 안에서는 국가 이성과 무력의 우위를 신봉하는 현실주의자들의 차가운 계산기가 돌아가고 있었다.





IMULIt_MFduv_pgs9aqvGa6jAH0.png폰 주트너 (1896). 1905년 그녀는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커버 사진: Unsplash의 Dustin Bowdige 오늘날의 헤이그

사진: By Martin Maack - "Die Novelle" Ein kritisches Lexikon über die bekanntesten deutschen Dichter der Gegenwart mit besonderer Berücksichtigung der Novellisten, Public Domain,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132867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