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뜻밖의 평화제안

by밤톨



"그러나 역사의 행로는 종종 의도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간다."




[D-267]


# 러시아 황제의 초대장

1898년 8월 24일 수요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러시아 외무성 주례 리셉션 장소는 평소처럼 우아한 사교의 장이 아니었다. 러시아 궁정에 주재하는 각국 대사와 공사들은 아연실색한 채 서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외무장관 미하일 무라비예프(Mikhail Muraviev) 백작 앞 탁자에는 공식 문서가 겹겹이 쌓여 있었다. 무라비예프가 외교관들에게 이 뜻밖의 문건을 한 부씩 나누어 주자, 내용을 황급히 훑어내려 가던 각국 대표들의 손이 떨렸다. 본국 정부와 긴급히 협의해야 할 중대한 사건임을 직감했다.


문서에는 세계 최대 규모의 상비군을 거느린 러시아 제국의 젊은 황제, 니콜라이 2세가 전 세계를 향해 던진 '군비 축소와 평화회의' 제안이 담겨 있었다. 칙서의 문구는 숭고하고도 절박했다. 그는 "모든 국가를 짓누르는 과도한 군비를 축소하는 것이야말로 현재 전 세계 모든 정부가 지향해야 할 이상"이라며, "멈출 줄 모르는 군비 경쟁이 공공의 번영을 근본적으로 해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국가의 지적·육체적 역량과 노동, 자본이 생산적 활동에서 벗어나 파괴적인 무기를 만드는 데 소비되고 있다"고 주장하며 그는 전 세계 26개국을 만국평화회의에 초대했다. 그는 이번 회의가 "다가오는 세기를 위한 행복한 전조가 될 것"이라는 장엄한 수사로 문장을 맺었다.


북방의 전제 군주가 내민 우아한 평화의 손길은 순식간에 세상을 뒤흔들었다. 파리의 언론은 이를 "북방에서 내리친 번갯불"이라 불렀고, 평화주의자들은 인류의 오랜 숙원이 마침내 이루어지는 "새로운 세기의 전조"라며 열광했다. 오스트리아의 평화운동가이자 훗날 노벨 평화상을 받게 되는 베르타 폰 주트너(Bertha von Suttner) 부인에게 이 소식은 구원과도 같았다. 남편이 들고 온 신문을 본 그녀는 일기장에 "벼락같지만 경이롭다. 차르의 평화 선언이라니!"라며 벅찬 심정을 기록했다.


영국의 저명한 언론인 윌리엄 T. 스테드(W. T. Stead) 역시 이 칙서를 생애 최고의 기회로 여겼다. 그는 러시아 황제의 진정성을 설파하기 위해 전 유럽을 순회하는 '평화 십자군 운동'에 동참했다. 지식인들은 "앞으로 세상은 평화의 사상으로 고동칠 것"이라며 장밋빛 미래를 확신했다.


하지만 이 장엄한 칙서의 이면에는 거룩한 인류애와는 거리가 먼, 제국주의 열강의 숨 막히는 정치 현실과 바닥을 드러낸 러시아 국고의 앙상한 민낯이 숨겨져 있었다. 평화는 그저 값비싼 군비 경쟁에서 도태된 제국이 선택한 가면에 불과했다.


러시아 황제는 도대체 왜 이 제안서를 전 세계에 내밀었을까?



# 신형 무기에 대한 공포

사건의 발단은 러시아 육군 장관 알렉세이 쿠로파트킨(Alexei N. Kuropatkin) 장군이 느낀 지정학적 우려에서 시작되었다. 1898년 초, 그는 주된 경쟁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신형 '속사 야포'를 도입한다는 보고를 받고 깊은 시름에 빠졌다. 이미 독일과 프랑스가 손에 넣은 이 신형 대포는 분당 6발을 발사할 수 있는 가공할 무기였다. 반면 러시아의 야포는 분당 1발을 쏘는 수준에 머물러 있어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았다. 러시아군이 이에 맞서 야포를 전면 교체하려면 최소 1억 루블이라는 천문학적인 비용이 필요했다.


당시 텅 빈 러시아의 국고로는 이 비용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궁여지바카라으로 쿠로파트킨은 오스트리아 정부에 '향후 10년간 신형 무기 도입을 서로 유예하자'는 비밀스러운 제안을 건내기 위해 먼저 황제 니콜라이 2세를 알현했다. 코로파트킨의 제안에 젊은 러시아 황제는 크게 공감하며, 자신 역시 군대의 과도한 무기 도입을 반대해 왔다고 답했다.


황제의 재가를 얻은 쿠로파트킨은 외무장관 무라비예프를 거쳐 이 계획을 재무장관 세르게이 비테(Sergius Witte)에게 전달했다. 냉철하고 현실적인 관료였던 비테는 군대에 루블화가 낭비되는 것을 혐오했으며, 그 돈이 시베리아 횡단 철도 같은 국가 근대화 사업에 쓰이기를 원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오스트리아와 일대일로 무기 유예를 협정하겠다는 육군 장관의 계획이 얼마나 순진하고 위험한 발상인지 단번에 꿰뚫어 보았다. 오스트리아가 제안을 받는 순간 러시아의 재정적 취약성을 알아차리거나, 무언가 어두운 음모가 있다고 의심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비테의 말대로 "전 세계에 우리의 약점을 스스로 폭로하는 꼴"이었다.


대신 비테는 훨씬 거대하고 교활한 계획을 역제안했다. 단일 국가를 상대할 것이 아니라, 아예 전 세계를 향해 호기롭게 군비 축소와 평화회의를 제안하자는 것이었다. 이 제안은 성공하면 러시아의 파산을 막을 수 있고, 실패하더라도 전 세계에 러시아 황제를 '평화의 사도'로 각인시킬 수 있는 절묘한 수였다. 외무장관 무라비예프는 비테의 구상에 매료되어 이를 즉각 공식 외교 문서로 탈바꿈시켰다. 바닥난 금고와 신형 대포에 대한 공포가 인류 역사상 전례 없는 '평화 제안'으로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이토록 노골적인 재정적 동기를 그럴싸하게 포장하기 위해, 러시아 수뇌부는 당대 유행하던 파국적 전쟁론을 빌려왔다. 철도 사업가이자 독학으로 정치경제를 연구한 이반 블로흐(Ivan Bloch)의 역작 『전쟁의 미래』(The Future of War)는 이들에게 완벽한 명분을 제공했다. 블로흐는 "근대 무기의 파괴력이 너무 압도적이어서 미래의 전쟁은 신속하게 끝나지 않으며, 국가의 모든 자원이 고갈될 때까지 이어지는 소모전 끝에 참전국 모두가 파멸할 것이다"라며 경고하던 인물이었다.


특히 러시아 지배층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것은 군비 경쟁이 초래할 '슬롯 혁명'의 위협이었다. 무익한 무기 생산에 국가 자원을 낭비하면 결국 대중의 반군사주의를 자극하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마침 "정부가 전쟁을 준비하는 것은 곧 민중들에게 혁명의 승리를 보장해 주는 것과 다름없다"는 블로흐의 주장은 혁명의 전운이 감돌던 제정 러시아 수뇌부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렸다.


결국 군비 경쟁을 멈춰야 한다는 러시아의 평화 칙서는 진정한 인류애가 아니라, 재정적 파산과 체제 전복을 두려워한 전제 군주국의 이기적인 생존 본능에서 나온 결과물이었다.



# 서유럽의 반응

한편, 러시아의 은밀한 속내를 짐작조차 못한(혹은 짐작했기에 더욱 분노한) 서유럽 열강의 지도자들은 황제의 칙서에 노골적인 경멸과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 그들은 황제의 제안이 각국의 군사적 주권과 제국주의적 팽창에 제동을 걸려는 불순한 의도라고 확신했다.


영국의 웨일스 공(후일의 에드워드 7세)은 이 제안을 두고 "내가 들어본 것 중 가장 큰 넌센스이자 쓰레기"라며 격노했다. 그는 이 칙서가 러시아 외무장관 무라비예프의 교활한 속임수이며, 강대국들이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헛소리라고 일축했다.


막강한 육군력을 자랑하며 해군 증강에 열을 올리던 독일의 카이저 빌헬름 2세의 반응은 더욱 히스테릭했다. 그는 이 칙서를 러시아의 교묘한 '악마적 속임수'로 규정했다. 자신처럼 강력한 통수권을 가진 군주가 조상들의 역사가 깃든 신성한 군대를 해체하고 국가를 무정부주의자들에게 넘겨주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며 분개했다. 더 나아가 빌헬름 2세는 칙서의 여백에 "그렇다면 크루프(Krupp, 독일의 거대 군수기업)는 노동자들에게 무엇으로 임금을 주란 말인가?"라고 휘갈겼다. 거대 군수 산업에 의존하던 당대 자본주의 열강의 민낯을 가장 적나라하고 정확하게 찌른 대목이었다.


회의에 파견될 외교관들조차 자조 섞인 불만을 토로했다. 후일 독일 수석 대표로 헤이그에 파견되는 뮌스터 백작(Count Münster)은 "빈 짚더미를 두드리는 것은 늘 피곤한 일이다. 그런데 이번 러시아의 짚더미는 그 안에 불화의 씨앗을 감추고 있을 수도 있어 위험하기까지 하다"며 군비 축소 논의 자체를 부조리하다고 비판했다.


가장 희극적인 장면은 정작 이 칙서를 기안한 러시아 내부에서 연출되었다. 제1차 헤이그 평화회의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될 러시아의 권위 있는 국제법 학자 표도르 마르텐스(Fedor Martens)조차 이 칙서의 발표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발트해 연안의 영지에서 여름휴가를 보내고 있던 그는 신문을 통해 자국 황제의 '평화 칙서'와 거대한 국제회의 개최 소식을 접하고 아연실색했다. 국제법의 대가가 보기에도 군비 축소와 전쟁 근절이라는 목표는 도저히 실현 불가능한 터무니없는 발상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런 사전 준비나 의제 설정도 없이, 오직 재정적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즉흥적으로 내던진 러시아 정부의 폭주에 실무진마저 경악을 금치 못했다.



# 역설적인 역사

이처럼 제1차 헤이그 만국평화회의는 시작부터 철저한 위선과 기만, 그리고 강대국들의 노골적인 이기심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세계 최강의 군사 대국들이 모여 군비 축소를 논의한다는 발상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블랙 코미디였다. 평화를 갈망했던 민중과 이상주의자들의 순수한 염원은 강대국들의 치열한 국익 계산과 외교 장기판 위의 말로 이용당할 뿐이었다.


그러나 역사의 행로는 종종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간다. 파산을 면하기 위한 러시아의 얕은 수작과 이를 무산시키려던 열강들의 팽팽한 견제 속에서도, 인류는 이 회의를 통해 처음으로 '전쟁의 규제'와 '평화적 분쟁 해결'이라는 의제를 국제 슬롯의 공론장으로 끌어올렸다. 비록 군비 축소라는 본래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을지언정, 서로를 속이고 기만하려던 위선의 장막 속에서 '국제중재재판소 설립'과 '전쟁법 성문화'라는 획기적인 평화의 싹이 움트고 있었던 것이다. 거짓과 공포가 빚어낸 1898년 8월의 칙서는, 그렇게 역설적으로 인류를 근대적 국제 평화 체제의 문턱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500px-Artillery_-_South_African_National_Museum_of_Military_History.jpg러시아가 두려워 했던 신형 '속사 야포' 8 cm FK M. 5


500px-Mikola_II_(cropped)-2.jpg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1912)


이반 블로흐의 저서의 러시아판 원제는 무려『기술적, 경제적, 정치적 관점에서 본 미래의 전쟁』Будущая война в техническом, экономическом и политическом отношениях이라는 긴 제목이며, 영미권으로 번역되면서 이 긴 제목이 『The Future of War』로 축약되었고, 우리나라에도 이 영어 제목을 번역한 『전쟁의 미래』로 가장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커버사진: Unsplash의 Vitali Adutskevich

사진: By NJR ZA - Own work, CC BY-SA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