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먼지 풀풀 날리는 학교 운동장의 지면은 사포처럼 거칠고 군데군데 돌도 박혀 있었다. 경기 중 태클이라도 하려고 상대선수가 몰고 있는 공을 향해 옆으로 미끄러지면 반바지 아래로 드러난 맨다리는 피투성이가 되기 일쑤였다.
동생이 뛰고 있는 축구팀은 상대에게 어이없이 한 골을 내주었고, 골을 만회하기 위해 11명의 아이들은 뜨거운 뙤약볕 아래에서 기를 쓰고 뛰어다녔다.
그럼에도 골 차를 줄이지 못하고 전반전이 끝난 후 맞이한 15분의 하프타임. 아이들은 이 시간을 '타작 시간'이라고 불렀다.
성장기에 강도 높은 운동까지 더해져 웃자란 식물처럼 가늘고 긴 체구의 선수들이 일렬로 줄을 맞추어 섰다.
"짝! 풀턱!"
소리가 연이어 울렸다.
대열이 정돈되자마자 순식간에 차례로 날아오는 감독의 매운 손은 한 명, 한 명의 뺨에 정확하게 꽂혔다.
"어서 일어나"
두 발로 단단히 버티려 해도 감독이 휘두른 손바닥 힘에 의해 맥없이 픽픽 쓰러졌고, 쓰러진 아이들의 엉덩이 위로는 어서 일어나라는 고함과 함께 발길질까지 더해졌다.
감독의 얼굴은 점점 뻘겋게 달아오르고 자가발전하는 동력기처럼 스스로 가속을 내고 있었다.
어이없게도 이런 타작 시간이 끝나고 치른 후반전에서 2골을 넣으며 경기는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가족들이 참관하고 있는 시합의 경기장 한복판에서 정신력을 강화시켜 승리를 쟁취하기 위함이라는 미명아래 폭력이 정당화되던 시절이었다. 또한, 경기 결과가 좋으면 부모들조차도 어느 정도 폭력에 대해 암묵적인 합의를 했다. "맞고 나면 확실히 뛰는 게 달라져"라는 말을 종종 학부모들로부터 들었던 기억이 또렷하게 남아있다.
당시, 선수들은 열악한 환경과 인격적으로 존중받지 못하는 상황을 거부하거나 불합리하다고 느끼지 못했다. 인식자체가 부재했던 시대였다. 성적만 좋으면 과정은 미화되었고 성공이라는 보상으로 대체되었다. 폭력은 때때로 능률을 끌어올리기 위한 수단으로 정당화되었고, 수용되었으며, 묵인되었다.
폭력은 비단 스포츠업계의 고질적인 문제만은 아니다. 기업 오너의 황제 갑질을 비롯해 관공서, 학교, 가정에서 조차 여전히 권력은 폭력을 동반해 자신의 우위를 각인시키고 과시하려 한다. 때로는 최상의 결과와 상대를 위해서라는 말로 포장된다. 뉴스에서는 심심치 않게 폭력에 대한 보도가 나오고 국민들은 그때마다 분노한다.
그럴수록 폭력은 점차 형태를 바꾸고 음지로 향한다. 법망을 피하기 위해 피해자의 약점을 쥐고 더 지능적이고 교활하게 자신들의 폭력이 양지로 드러나는 것을 막는다. 인권에 대한 인식이 높아진 현재에도 압제자는 줄지 않고 있고 거부는 여전히 힘이 없다.
보도와 분노가 원인을 없애주지는 못 한다.
인간이 인간을 향해 행하는 폭력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의식의 자리매김이 필수이다. 과다 경쟁 슬롯에서 지식만을 입력시키는 교육이 아닌, 삶의 의미를 성찰하고 사람의 가치를 생각하게 하는 인문학 교육이 더 절실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삶에서 지켜져야 마땅한 선! 그것을 선명하게 가르쳐야 하는 시대이다. 그 선의 수호가 우리 삶의 최소한의 격을 지켜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 지지선이 점차 하향되고 흐릿해지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