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 근육

byGoodmorning

내 안의 예술가는 어디로 갔는가?

아직 무사한 것일까?

<오래 준비한 대답. 김영하>


며칠 전, 동네 친구와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정자에 앉아 짧은 시간에 강력한 수다를 떨었다.

오랜만에 만난 그녀와 넉넉지 않은 시간 동안 우린 최대한 자신들의 근황을 끌어내 전달하기 바빴다.


나보나 두 살 어린 그녀는 최근 대상포진에 걸려 심하게 앓았고 덕분에 꼼짝 못 하고 집에서 쉬었다고 한다. 아프고 무료해하는 그녀를 위해 한 친구가 중드(중국 드라마)를 추천해 줬고 120편의 드라마를 아픔을 참아가며 밤낮으로 정주행 했단다.


"언니, 나 중드는 처음인데 스토리는 좀 어설프지만 남주(남자 주인공)와 여주(여자주인공)가 너무 멋있고 예뻐."


"두 배우가 피부도 완전 백옥이더라고. 뽀샵은 한 거겠지? 성형도 했을 것 같아."


"완전 폭 빠졌잖아. 다른 것도 또 봐야겠어!"

그녀의 목소리는 아직도 들떠 있었고 "근데 언니 내 친구가 중드보고 아무 감정도 없으면 이미 여자는 아니고 그냥 중성이래 "라는 말을 웃으며 덧붙였다.


그녀는 이미 한드(한국드라마)와 미드(미국드라마)를 모두 거친 정주행의 달인이지만 최고봉은 중드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오늘처럼 정주행을 하고 난 후면, 종종 흥분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드라마 내용을 상세히 풀어놓고는 했지만 내 반응은 늘 심드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난 드라마를 거의 안 본다. 특히 멜로드라마는 십 분도 채 보지 못한다.


"어휴, 저 사람들 왜 저래?"

억지 설정에 느닷없는 애정행각, 돈 많고 능력 좋은데 외모까지 완벽한 주인공들. 게다가 일상에서는 사용하거나 들어 본 적도 없는 달달한 대사들.


그녀가 배우들의 잘생김에 빠지고 달콤한 대사에 흥분하는 반면 나는 스토리의 개연성과 현실성을 따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솔직히 그런 억지 상황을 보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난다.


그녀가 한 번 보라고 아무리 권해도 시도조차 해 보지 않는 이유다.


그런데 다른 날과 달리 그날은 문득, 잠자리에 누웠을 때 낮에 나눴던 대화에 대한 상념이 비집고 올라왔다.


내가 마지막으로 본 드라마가 뭐였지?


나도 고등학생 때는 수업시간에도 교과서 사이에 하이틴 로맨스를 끼워 놓고 정신없이 읽었고, 영화나 드라마의 남주에 빠져 그와 연애하는 상상에 빠지고는 했는데...


그때 느꼈던 감정의 파편들은 이미 석기시대의 유물이 되어 버린 듯하다.

현재의 내 감정은 흑ㆍ백 논리와 팩트에 경도돼 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된 것인지, 나이 탓 인지,

심장이 설렜던 적이 언제였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가물하다.


나 보다 두 살 많은 남편은 지금도 거실에서 혼자 드라마에 폭 빠져있다. 간간히 웃음소리도 들리고 한숨 소리도 들린다. 감성의 퇴화가 나이 탓은 아닐 듯하고, 그 퇴화의 시기가 언제부터였는지는 도통 감도 못 잡겠다.


'감성근육이 없는 사람은 무언가를 느끼기 피곤해한다'라고 김영하 작가는 같은 바카라에서 말하고 있다.


느끼는 것을 피곤해한다... 내가 지금 그런 상태인 것 같은데.


내 안의 감성근육은 아직 무사한 것일까.

이런 상태로 글은 쓸 수 있는 것일까.

쉽게 잠들지 못하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