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도 지금도, 참교육은 아직일까.

by차돌

"너 이 새끼 일어나!"


고등학생이 되어서의 첫 지리 수업 시간이었다. 호랑이 얼굴에 건장한 체구를 한 선생님이 수업 도중 한 친구를 향해 갑자기 불같이 화를 냈다. 왜소한 그 아이는 영문도 모른 채 겁에 잔뜩 질린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뜩이나 얼어있던 우리 반 아이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다. 다들 의아한 분위기였다. 학급 친구들 중에 떠들거나, 졸거나, 딴짓을 할 만한 녀석은 결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지리 선생님은 수업 전부터 무서운 분위기로 아이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짝!


엄청나게 큰 파열음이 교실에 울려 퍼졌다. 말 그대로 '귀싸대기'를 후려갈기는 소리였다. 순식간에 뺨이 벌개진 친구는 놀란 표정으로 선생님을 바라봤다. '왜...' 라는 말이 입에서 맴도는 듯했다. 눈에는 공포가 서려 있었다. 일동 긴장한 순간, 선생은(다시 떠올리니 '님'자를 붙이고 싶지 않다) 말했다.

"미친놈이 수업 시간에 껌을 씹어?"

설마... 우리는 일제히 뺨 맞은 친구를 바라봤다. 한눈에 봐도 연약한 녀석이었다. 감히 학기초부터, 그것도 저런 선생 앞에서 수업 시간에 껌을 쫙쫙 씹을 놈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어... 저 껌 안 씹었는데요..."

"이 새끼가 거짓말을 해? 입 벌려봐!"


선생은 친구의 볼을 잡고 혀를 치우라는둥 하며 입 안을 들여다 봤다. 당연히 껌 같은 건 나오지 않았다. 나중에야 알고 보니 그 친구는 입을 우물우물 거리는 습관이 있었는데, 선생은 그걸 보고 대번에 껌이 있을 거라 여기고는 옳거니 첫 수업부터 기강을 잡으리란 생각으로 손찌검 했던 것이다.


"뭘 그렇게 수업 시간에 우물대고 딴짓을 해? 됐으니까 앉아!"


사과 같은 건 없었다. 당황하는 기색도 없었다. 뺨이 벌겋게 부어오른 친구는 엉거주춤 자리에 앉았고, 우리 모두는 더욱 숨죽여 수업을 들어야 했다.


내가 중고등학생 무렵이던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학교에서 이같은 체벌은 일상이었다. 거짓말 안 보태고 영화 '친구'나 '말죽거리 잔혹사'에 나온 교사들의 폭언, 폭행이 빈번하게 벌어졌다. 강남 8학군을 제외하고는 서울에서 꽤나 알아주는 인문계 고등학교라는 허울은 엄격한 두발 단속과 체벌, 기강의 충분한 명분이 되고도 남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그때는 그게 당연했다. 불합리하다는 개개인의 의식 같은 건 집단의 동조와 순응, 어른들의 담합으로 뭉개어 지곤 했다. 학교의 방식이 불만이면 너네가 나가라, 엄격한 통제는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강압적인 선생들 뿐만 아니라 온건한 선생님조차도 이 같은 학교의 일원일 뿐이었고, 심지어 학부모들조차 '대학에만 잘 보내준다면'이라는 암묵적 합의 하에 자녀가 두들겨 맞아도 개의치 않았다.


우리는 그런 학교에 적응하며 살아야만 했다. 별로 큰 잘못을 하지 않고도 매맞아 푸르딩딩해진 허벅지를 교복으로 감싼 채 등하교 하고, 수업 시간에 때로는 뺨을 맞고 때로는 발바닥을 맞고 때로는 손바닥을 맞고... 그러다 뼈를 잘못 맞아 뒹굴기도 하던 날들. 그렇게 우리의 학창 시절은 지나치게 쓰라리고 아팠다.


최근 넷플릭스 드라마 '참교육'이 세간의 화제였다. '촉법' 뒤에 숨어 범죄까지 서슴지 않는 청소년 빌런, 자기 자식만 중요한 학부모 빌런 등을 응징하는 내용에 많은 이들이 통쾌함과 대리만족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요즘 우리 슬롯에서 교권이 추락했다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어 보인다.


가끔 아이러니를 느낀다. 내가 학생일 때만 해도 교권이라는 이름 아래 폭력과 통제가 너무 쉽게 정당화되곤 했다. 그런데 어느덧 기성세대가 되고 보니 반대로 교권이 무너져 있다는 이야기가 들려온다. 학생 인권을 향상시키기 위한 슬롯적 노력과 교권은 과연 반비례 관계인 것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학생 인권이 신장된 것은 분명 우리 슬롯가 이뤄낸 중요한 진보다. 적어도 내가 겪었던 것처럼 이유도 모른 채 뺨을 맞고, 교사의 기분에 따라 체벌을 당하는 일이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어서는 안 된다. 만약 다시 학생으로 돌아가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과거가 아닌 지금의 학교를 선택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의 현실에 문제가 없다고 말할 수도 없다. 예전에는 교사의 말이 곧 규칙이었고, 체벌과 폭언마저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용인되곤 했다. 그런데 지금은 또 다른 고민이 생겼다. 학생을 존중하는 것과 교사를 존중하는 것이 왜 서로 충돌하는 가치로 여겨지게 되었을까. 학생의 권리를 이야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되었지만, 교사의 권위와 교육권을 이야기하는 순간 권위주의로 받아들이는 시선도 적지 않다.


내가 겪었던 학교는 분명 잘못됐다. 학생 인권의 신장은 반드시 필요했고, 지금도 그래야 한다. 다만 학생 인권과 교권은 원래부터 서로 경쟁하는 가치가 아니었다. 학생이 존중받는 교실이라면 교사 또한 존중받아야 한다. 교사가 권위를 가져야 한다는 말은 학생을 억압할 권리가 있다는 뜻이 아니라, 교육을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권한과 신뢰를 보장받아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스무 살도 되기 전에 이유도 모른 채 뺨을 맞던 시절을 기억하는 나는 학생 인권의 중요성을 의심할 수 없다. 하지만 교사가 학생을 두려워한다는 오늘의 뉴스를 볼 때면 또 다른 걱정을 하게 된다. 학생이 존중받는 교실이라면, 교사 또한 존중받아야 하는 것 아닐까. 생각해 보면 그 두 가지는 원래 같은 이야기였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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