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해가는 것을 사랑하는 방법
언제부터인지 내 취향이라는 것이 참 덧없이, 그러나 은근하지만 빠르게 변해간다는 생각을 한다.
불과 지난달만 해도 보이생차의 푸릇하고 텁텁한 향에 빠져서 오로지 생차만 고집했는데, 오늘은 문득 찻장에 놓인 숙차의 묵직하고 따뜻한 온기가 그리워졌다. 결국 생차는 딱 두 잔만 마시고 나머지는 숙차로 잔을 채웠다.
요즘 내 옷장 안의 풍경도 비슷하다. 작년까지만 해도 단정한 무채색의 옷들이 마음 편했는데, 올해는 흰색, 레몬색, 연보라나 연파랑 같은 화사하고 맑은 색들에 자꾸만 시선이 간다.
시간이 지나 예전에 써둔 글들을 다시 펼쳐볼 때면 묘한 낯섦과 함께 어설픔이 눈에 밟힌다. 지금의 내가 완벽하다는 뜻은 결코 아니지만,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분명 어딘가 달라져 있다. 나이가 든다는 건 이렇게 취향이 금방금방 바뀌고 선명했던 경계들이 옅어지는 과정일까.
문득 질문이 꼬리를 물었다. 그때의 글을 쓰던 나도 나이고, 오늘 차를 따르는 나도 나인데, 마음 한쪽에서는 두 존재가 결코 똑같지 않다는 어색한 거리감이 들었다.
지금 이 순간, 화면 너머로 마음을 털어놓고 있는 나 역시 며칠 전의 나와는 완벽히 같지 않은 존재다. 우리는 흔히 ‘나’라는 사람을 그때도 지금도 단단한 조각상처럼 변함없는 것으로 여기곤 하지만, 어쩌면 나라는 존재는 계절을 통과하는 나무에 더 가까운지도 모른다.
나무가 봄에는 연두색 싹을 틔우고, 여름에는 짙은 초록을 품다 가을이 오면 자연스레 단풍을 들이듯, 생차에서 숙차로 옮겨가는 입맛이나 어둠에서 밝음으로 이동하는 색감 역시 내 몸과 마음이 지금 이 계절에 필요한 온도를 본능적으로 찾아가는 자연스러운 흐름일 뿐이다. 작년의 글이 어설퍼 보이는 것 또한 내가 못나서가 아니라, 시간을 지나온 나라는 나무에 꽃망울이 맺히며 나무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그만큼 진해졌다는 증거인 것이다.
결국 어제의 나도, 작년의 나도 틀린 것이 아니다. 단지 그때의 계절을 진심으로 살았던 것뿐이다.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를 억지로 똑같이 묶어둘 필요도, 변해가는 취향에 불안해할 필요도 없다. 그저 차 한 잔을 마시며 ‘아, 오늘의 나는 숙차의 온도가 필요한 계절을 지나고 있구나’ 하고 담담하게 살펴보는 것.
나는 내일의 나의 취향을 알 수 없다. 오직 지금의 취향만 떠올릴 뿐이다. 지금 내가 좋아하는 향기는 생 로제이고, 지금 듣고 있는 음악은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5번 <전원> 1악장이고, 오늘처럼 약간 더운 날은 까슬한 이불의 촉감이 좋다. 이렇게 순간순간을 나의 취향으로 채우며 매 순간 새로 태어나는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것이 내가 내 삶을 온전히 누리며 자유로워지는 또 하나의 작고 다정한 명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