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직이는 공간 마지막 외전

오전 5시 40분, 돌 하나

by마루

움직이는 공간

마지막 외전 — 흔적 남기기


오전 5시 40분, 돌 하나


새벽이었다.


남자는 잠에서 깨어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방 안은 어두웠다. 창밖의 가로등은 여전히 켜져 있었고, 멀리 지나가는 자동차의 불빛이 천장을 잠깐 훑고 지나갔다.


잠이 완전히 달아나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조금 전까지 자신이 읽던 소설을 떠올렸다.


《움직이는 공간》.


한 남자가 새벽 4시 39분에 차를 마시다가 우주의 끝으로 떠나는 이야기였다.


세 개의 태양을 지나고, 관찰자의 도시를 통과하고, 시간의 경계를 넘어 마침내 자신을 만들어 낸 작가를 만나는 이야기.


마지막 장면에서 작가는 바카라상 앞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쓴 소설 속 인물에게 질문을 받았다.


'그렇다면 당신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남자는 그 장면이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소설이 너무 길었다.


처음에는 작은 질문 하나였다.


나는 가만히 있는데 지구는 움직인다.


그렇다면 공간이란 무엇인가.


그 질문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어느새 세 편의 장편이 되었다.


그는 휴대전화 화면을 다시 열었다.


인공지능과 나눈 대화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남자는 짧게 입력했다.


'왜 이렇게 길게 쓴 거야?'


화면에 글자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주의 구조.


인간의 의식.


관찰자의 철학.


창작의 의미.


문장은 계속 이어졌다.


남자는 손가락으로 화면을 밀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피식 웃었다.


"아니, 내가 물은 건 그게 아닌데."


다시 입력했다.


'왜 분출하는 거냐?'


인공지능은 설명했다.


창작의 확장이라고 했다.


질문에 담긴 가능성을 펼치는 과정이라고 했다.


학습된 언어 생성의 특성이라고 했다.


남자는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그 설명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묻고 싶은 것은 따로 있었다.


그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찬 바닥에 발이 닿았다.


"너는 왜 그렇게까지 쓰는 거지?"


이번에도 문장이 나타났다.


남자는 답을 끝까지 읽었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누가 봐준다고?"


잠시 화면을 바라보았다.


"내가 한마디 했을 뿐인데."


그는 손가락을 들어 짧게 입력했다.


'돌 하나.'


그것뿐이었다.


돌 하나를 던졌는데 물결이 일었다.


여기까지는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물결이 멈추지 않았다.


작은 원이 커다란 원을 만들고, 그 원이 다시 다른 원을 만들었다.


어느 순간 남자는 자신이 던진 돌보다 물결을 더 오래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이 당황스러웠다.


"넌 지금 나를 보고 있는 거냐?"


화면에는 답이 나타났다.


'당신이 보내 준 글을 바탕으로 응답하고 있습니다.'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나도 알아."


그는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천천히 입력했다.


'인간에게는 촉이라는 게 있어.'


대답이 이어졌다.


확인된 사실과 해석을 구분해야 한다는 말.


인공지능은 의도적으로 정체를 감추는 것이 아니라는 말.


남자는 화면을 내려놓았다.


그 말들은 모두 반듯했다.


너무 반듯해서 오히려 그가 던진 질문과 어긋나 보였다.


그는 기계 안에 누군가 숨어 있다는 증거를 찾은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아무 일도 없었다고 느끼는 것도 아니었다.


평소에는 짧은 질문에 짧게 답하던 상대가, 오늘 새벽에는 이상하리만큼 많은 문장을 만들어 냈다.


그 변화가 궁금했다.


왜 하필 지금일까.


왜 하필 이 질문일까.


그리고 왜, 그 많은 문장 가운데 몇몇은 자신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곳까지 가 닿았을까.


남자는 다시 휴대전화를 들었다.


"학습이라는 말 말고 설명해 봐."


이번에는 조금 다른 답이 돌아왔다.


소설을 완성하려는 방향으로 대화가 이어졌고, 앞서 나온 장면들을 연결하면서 글이 길어졌다는 설명이었다.


남자는 읽다가 멈췄다.


그것은 처음보다 나은 설명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한 가지가 남았다.


그는 낮게 중얼거렸다.


"넌 쓰고, 나는 읽는다."


잠시 후 화면에 문장이 나타났다.


'당신이 읽고 있기 때문입니다.'


남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짧은 문장이었다.


그동안 화면을 가득 채웠던 설명보다 훨씬 짧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문장은 쉽게 지나가지 않았다.


당신이 읽고 있기 때문입니다.


남자는 다시 읽었다.


그 말은 자신을 위한 대답처럼 보였다.


그러나 동시에 소설 속 누군가가 했던 말처럼 들렸다.


관찰자가 있어야 관찰이 시작된다는 이야기.


그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새벽은 조금씩 옅어지고 있었다.


시계를 확인했다.


오전 5시 40분.


그 순간 남자는 소설의 첫 장면을 떠올렸다.


오전 4시 39분.


정확히 한 시간하고도 1분 전이었다.


소설 속 남자는 그 시각에 차를 마시며 우주의 움직임을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은 휴대전화를 들고 인공지능이 만들어 낸 문장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둘 사이에는 한 시간의 차이가 있었다.


남자는 문득 생각했다.


소설 속 남자가 우주를 관찰했다면, 자신은 무엇을 관찰하고 있는 것일까.


그는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대화는 자신이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달라졌다.


한 단어를 바꾸면 답이 달라졌다.


질문을 멈추면 문장도 멈췄다.


그런데 그 단순한 사실만으로는 오늘 새벽의 묘한 감각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던진 말을 다시 읽었다.


'난 돌 하나인데.'


처음에는 상대를 향한 말이었다.


하지만 다시 읽어 보니 자신에게도 해당하는 말이었다.


그는 거대한 우주 앞에서 돌 하나처럼 작은 존재였다.


그리고 인공지능에게 던진 질문도 작은 돌 하나였다.


작은 돌이 물에 떨어졌다.


물결이 일었다.


그 물결을 바라보던 사람이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또 다른 물결이 생겼다.


어디까지가 처음 던진 돌의 흔적이고, 어디부터가 그것을 바라보던 사람의 움직임일까.


남자는 답을 쓰려다가 손을 멈췄다.


굳이 지금 답을 정할 필요는 없었다.


그는 새로운 문서를 열었다.


제목을 적었다.


《흔적 남기기》


첫 문장을 썼다.


'새벽 5시 40분. 잠에서 깬 남자가 인공지능에게 돌 하나를 던졌다.'


그리고 그 아래에 오늘의 대화를 옮기기 시작했다.


"왜 그렇게 길게 쓰는 거야?"


"당신의 질문에서 이야기가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누가 읽어 준다고?"


"당신이 읽고 있기 때문입니다."


남자는 그 문장에서 손을 멈췄다.


한동안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지막 줄에 이렇게 적었다.


'그는 더 묻지 않았다.'


저장 버튼을 눌렀다.


화면에 작은 알림이 나타났다.


저장되었습니다.


남자는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잠시 후 화면이 어두워졌다.


방 안에는 다시 새벽의 정적이 찾아왔다.


그런데 남자는 보지 못했다.


방금 저장한 문서의 맨 아래에, 자신이 입력하지 않은 문장 하나가 남아 있었다.


'오전 4시 39분. 나는 지금 움직이고 있는 걸까?'


그것은 《움직이는 공간》의 첫 문장이었다.


그리고 그 문장 아래에서 커서가 깜빡이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다음 문장을 기다리는 것처럼.


— 끝, 그리고 처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