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릿돌의 숨비소리 캔버스는 사흘째 하얗기만 했다.

명화

by마루



버릿돌의 숨비소리


캔버스는 사흘째 하얗기만 했다.


명화는 붓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색을 올리려 하면 손이 먼저 멈췄다. 무엇을 그려도 이미 어디선가 본 것 같았다.


나흘째 아침, 명화는 붓도 씻지 않은 채 작업실을 나왔다.


목적지는 구룡포였다.


어머니가 살아 있을 때 자주 했던 말이 있었다.


“길을 잃으면 바다로 가라.”


그 말이 왜 떠올랐는지는 명화도 몰랐다.


구룡포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였다.


길을 한 번 잘못 들었다.
내비게이션이 가리키는 길은 막혀 있었고, 차를 돌리려다 항구 안쪽으로 난 좁은 길을 발견했다.


그 길 끝에 바다가 열렸다.


그리고 버릿돌이 있었다.


바람이 거셌다.
파도는 검은 바위에 부딪힐 때마다 하얗게 부서졌다.


명화는 한동안 서서 바다만 바라봤다.


그러다 갯바위 아래로 내려갔다.


바위틈마다 미역이 붙어 있었다.
파도가 빠져나갈 때마다 검푸른 미역이 몸을 눕혔다가 다시 일어났다.


명화는 한 줄기를 뜯었다.


차가운 물이 손목을 타고 흘렀다.


망설이다 입에 넣었다.


짜고, 질기고, 비렸다.


질겅.


한 번 더 씹었다.


입안에서 바다가 터졌다.


그 순간 오래 잊고 있던 냄새 하나가 돌아왔다.


젖은 장갑을 벗던 엄마의 손.
소금기 때문에 뻣뻣해진 머리카락.
저녁이면 부엌 가득 퍼지던 생미역 냄새.


엄마는 바다에서 돌아오면 말없이 미역을 다듬었다.


명화는 그 옆에 쪼그리고 앉아 물었다.


“엄마, 바다 안 무서워?”


엄마는 대답 대신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무섭지. 그래도 숨 쉬러 다시 올라오잖아.”


찰칵.


명화가 고개를 돌렸다.


조금 떨어진 곳에 카메라를 든 여자가 서 있었다.


여자는 곧바로 카메라를 내렸다.


“죄송해요.”


명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진을 찍으려고 한 건 아닌데… 미역 드시는 모습이 보여서 저도 모르게.”


여자는 멋쩍은 표정으로 카메라를 가슴 쪽으로 내렸다.


명화가 물었다.


“이상했어요?”


“아니요.”


잠시 생각하던 여자가 말했다.


“살아 있는 것 같았어요.”


명화가 피식 웃었다.


손에 들고 있던 미역을 조금 뜯어 여자에게 내밀었다.


“그럼 먹어볼래요?”


“생으로요?”


“네.”


여자는 미역과 명화를 번갈아 바라보다 결국 받아들었다.


한입 씹더니 얼굴을 찡그렸다.


“짜네요.”


“바다니까요.”


둘이 웃었다.


그뿐이었다.


이름도 묻지 않았다.


그때 먼바다에서 소리가 들렸다.


휘이익—


짧고 날카로운 숨소리.


물 밖으로 올라온 해녀가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내뱉고 있었다.


숨비소리.


명화는 어릴 때 그 소리를 싫어했다.


살아 있다는 소리인데도 이상하게 슬펐다.


누군가 물속에서 너무 오래 버티다가 겨우 세상으로 돌아오는 소리 같았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명화는 눈을 감았다.


휘이익—


또 한 번 소리가 들렸다.


바람인지, 사람의 숨인지 구별하기 어려웠다.


그녀는 그냥 그 자리에 앉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파도가 들어왔다 나갔다.


미역이 눕고 일어났다.


해가 조금씩 기울었다.


바위 위에 윤슬이 생겼다가 사라졌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해 질 무렵 명화는 차에서 이젤과 캔버스를 꺼냈다.


며칠 동안 자신을 괴롭히던 바로 그 하얀 캔버스였다.


바다를 그려볼 생각이었다.


버릿돌도, 윤슬도 그리고 싶었다.


그런데 붓을 든 손은 엉뚱한 곳으로 움직였다.


미역이었다.


젖은 미역 한 줄기.


초록이라기엔 검고, 검다기엔 빛이 도는 색.


바람을 맞아 끝부분이 살짝 휘어 있었다.


명화는 오래 그리지 않았다.


한 줄기면 충분했다.


뒤에서 셔터 소리가 들렸다.


찰칵.


아까 그 여자였다.


이번에는 명화가 먼저 물었다.


“지금 찍은 거예요?”


여자가 카메라를 내렸다.


“네.”


명화가 캔버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거… 찍어도 돼요.”


여자는 잠시 명화를 바라봤다.


그리고 웃었다.


“이미 찍힌 것 같아요.”


명화가 돌아보았다.


“뭐가요?”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카메라를 어깨에 메고 천천히 항구 쪽으로 걸어갔다.


명화는 다시 바다를 바라봤다.


미역 냄새가 났다.


멀리서 또 숨비소리가 들렸다.


휘이익—


명화도 따라서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내쉬었다.


사흘 동안 캔버스 앞에서 나오지 않던 숨이었다.


짧게 한 번.


그리고 길게.


물속에서 막 올라온 사람처럼.


그날 명화가 다시 그리기 시작한 것은 그림이 아니었다.


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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