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 없는 수박 앞에서,

수박

by마루

씨 없는 수박 앞에서, 어린 날의 여름을 만났다

부안 길을 가다가 수박가게 앞에 차를 세웠다.

커다란 수박들이 층층이 놓여 있었다.

검푸른 줄무늬마다 작은 스티커가 붙어 있다.


씨 없는 수박.


가격을 물었다.


“한 통에 얼마예요?”


2만 3천 원.


수박 한 통이 2만 3천 원이라니.


요즘 물가를 생각하면 그러려니 하다가도, 수박을 한참 바라보고 있으니 이상하게 어린 시절의 여름 하나가 떠올랐다.


그때 수박에는 씨가 참 많았다.


한입 크게 베어 물면 검은 씨가 입안에 먼저 걸렸다. 씨를 골라내 먹기도 했지만, 아이들은 그런 귀찮은 짓을 오래 하지 않았다.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


퉤.


누가 더 멀리 뱉나 시합을 했다.


그러다 장난기가 발동하면 얼굴에 붙였다.


이마에 하나.

볼에 하나.

코밑에도 하나.


서로 얼굴을 보고 웃었다.


지금 생각하면 별것도 아닌데, 그때는 수박 한 통이면 한나절을 놀았다.


‘씨 없는 수박’이라는 말을 들으면 우장춘 박사를 떠올리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이것은 조금 바로잡아둘 필요가 있다.


우장춘 박사가 씨 없는 수박을 세계 최초로 만든 사람은 아니다. 씨 없는 수박은 일본에서 이미 개발된 기술이었다. 우장춘 박사는 한국에서 이를 재배해 보여주며 새로운 육종 기술을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오랫동안

**‘우장춘 박사와 씨 없는 수박’**이 함께 남았다.


과학의 역사는 그렇게 정리되지만,


내 기억 속 수박은 과학보다 냄새가 먼저다.


수박밭 냄새.


흙냄새.


그리고 여름밤 모깃불 냄새.


시골에서는 모기가 극성이면 마당 한쪽에 쑥을 놓고 불을 붙였다.


불꽃을 활활 피우는 것이 아니라 연기가 오래 나도록 했다.


매캐한 쑥 연기가 마당을 천천히 돌았다.


모기는 쫓아내고 싶었지만 사람도 눈이 매웠다.


그래도 대청마루에 앉아 있으면 그 냄새가 싫지만은 않았다.


마루에는 어른들이 앉아 있었고 아이들은 마당과 골목을 뛰어다녔다.


그리고 여름이면 가끔 어른들 몰래 수박밭으로 향했다.


수박서리.


지금 기준으로 보면 남의 농작물을 가져오는 일이니 분명 해서는 안 될 일이다.


하지만 옛 농촌에서 ‘서리’라는 말에는 그 시절 아이들의 장난과 여름밤 풍경까지 함께 붙어 있다.


어둠 속에서 잘 익은 놈을 찾겠다고 수박을 두드렸다.


통통.


누군가는 들킬까 망을 보고

누군가는 수박 하나를 품에 안았다.


도망칠 때는 그렇게 무거울 수가 없었다.


또 하나 잊히지 않는 것이 있다.


카바이드 불빛이다.


삼촌들이 밤에 고기잡이를 나갈 때 사용하던 불이었다.


카바이드, 정확히는 탄화칼슘에 물이 닿으면 아세틸렌 가스가 발생한다. 옛날에는 그 가스를 태워 밝은 불빛을 얻는 카바이드등을 사용했다.


어둠 속에서 그 불빛은 묘했다.


하얗다고 하기에도 그렇고

노랗다고 하기에도 어려운,


어딘가 푸른 기운이 섞인 강한 빛.


삼촌들은 그 불을 들고 물가로 내려갔다.


물속을 들여다보고 고기를 찾았다.


젖은 돌과 풀, 강물 냄새 사이로 카바이드 특유의 냄새도 따라다녔다.


석회 비슷하면서도 말로 설명하기 힘든 묘한 냄새.


어린 나는 그 냄새가 나면 알았다.


아, 오늘 삼촌들이 고기 잡으러 가는구나.


빛은 물 위에서 흔들렸고

아이들은 그 뒤를 졸졸 따라갔다.


그 모든 장면이 수박 한 통 앞에서 돌아왔다.


쑥 연기.


모기.


대청마루.


수박서리.


물가로 내려가던 삼촌.


어둠 속 카바이드 불빛.


그리고 얼굴에 수박씨를 붙이고 서로를 보며 웃던 아이들.


그 시절에는 씨가 귀찮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 정말 씨 없는 수박을 보고 있으니,


문득 그 씨가 그립다.


요즘 수박은 씨까지 없애 먹기 편해졌다.


가격은 2만 3천 원.


나는 가게 앞에 서서 수박을 한참 바라봤다.


수박 하나를 보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수박 뒤에서 사람들이 하나씩 걸어 나왔다.


대청마루에 앉아 있던 어른들.


쑥 연기를 피우던 사람.


카바이드등을 들고 물가로 가던 삼촌.


그리고 얼굴에 까만 수박씨를 붙이고 웃던 어린아이.


그 아이가 나를 쳐다보고 웃는다.


나는 이제야 알 것 같다.


없어진 것은 수박씨 몇 알이 아니었다.


씨를 뱉으며 함께 웃던

그 여름이 사라진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씨 없는 수박 앞에서

나는 자꾸 씨 많던 수박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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