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CK FROM HELL
새만금박물관에서 이상한 가방 하나를 보았다.
낡은 갈색 가방이었다.
손잡이는 오래전부터 사람의 손을 놓친 것처럼 닳아 있었고, 천은 군데군데 색이 빠져 있었다.
그런데 가방 앞면에 커다란 글씨가 남아 있었다.
BACK FROM HELL
그 아래에는 숫자가 있었다.
1947 — 1948
그리고 다시 한 줄.
CHINHAE KOREA
진해, 한국.
나는 한동안 가방 앞을 떠나지 못했다.
1947년과 1948년.
한국전쟁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병사가 말한 ‘HELL’은 전쟁터의 지옥은 아니었을 것이다.
무엇이 그에게 지옥이었을까.
그리고 더 이상한 것이 있었다.
병사는 미국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런데,
왜 가방은 한국에 남았을까.
1947년 어느 날이라고 해보자.
스무 살을 조금 넘긴 미군 병사 하나가 진해에 도착한다.
태평양전쟁이 끝난 지 겨우 2년.
일본의 식민지배에서 해방된 한반도에는 새로운 나라가 아직 완전히 만들어지지 않았다.
거리에는 일본식 건물이 남아 있었고, 미군 차량이 지나갔으며, 미군정의 명령문과 새로운 정치 구호들이 뒤섞여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해방되었다고 했지만 세상이 어디로 가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 젊은 미군에게 한국은 더 낯설었을 것이다.
말도 통하지 않았다.
음식도 달랐다.
겨울은 생각보다 추웠고 여름은 습했다.
거리에는 자신을 신기하게 바라보는 아이들이 있었다.
그는 어느 날 부대에서 받은 통조림 하나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아이 몇 명이 멀찍이 서서 바라봤다.
병사는 캔을 하나 건넸다.
아이는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 한참 들여다봤다.
병사가 손짓으로 먹는 시늉을 했다.
그제야 아이가 웃었다.
그런 날들이 있었을 것이다.
초콜릿 한 조각.
껌 하나.
통조림 하나.
미군에게는 보급품이었지만 당시 어떤 한국 아이에게는 처음 보는 미국의 맛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병사는 저녁이면 숙소로 돌아와 가방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집에 가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어느 날 가방에 숫자를 적었다.
1947 — 1948
어쩌면 한국에 도착한 날부터 돌아갈 날을 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군대에 다녀온 사람이라면 안다.
군인은 이상하게 날짜를 센다.
남은 달을 세고,
남은 주를 세고,
마지막에는 남은 하루를 센다.
그 숫자가 그에게는 단순한 연도가 아니라 집으로 돌아가는 숫자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위에 조금 과장된 문장을 하나 적었다.
BACK FROM HELL.
지옥에서 돌아간다.
동료들은 그 글씨를 보고 웃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등을 두드렸을 것이고,
누군가는 자기 가방에도 비슷한 말을 적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마침내 떠나는 날이 왔다.
여기서부터 기록은 없다.
나는 그래서 상상해 본다.
짐을 정리하던 병사가 가방을 바라본다.
미국까지 가져가기에는 낡았다.
이미 새 가방이 하나 생겼을 수도 있다.
그는 자신의 주변을 도와주던 한국인에게 가방을 건넸을지도 모른다.
“Take it.”
받은 사람은 영어를 알아듣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도 가방은 필요했다.
해방 직후 모든 것이 귀하던 시절이었다.
튼튼한 미군 가방 하나라면 버릴 이유가 없었다.
그 안에 쌀을 넣었을 수도 있고,
옷을 넣었을 수도 있고,
공구를 넣었을 수도 있다.
어쩌면 어느 관공서 창고로 들어갔을 수도 있다.
미군이 철수하며 남긴 물품들과 함께 보관되었을 수도 있고,
누군가 사용하다가 다시 공공기관의 수집품이 되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여러 사람의 손과 여러 창고를 지나,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
가방은 박물관으로 들어왔다.
어떤 경로였는지는 나는 모른다.
그래서 함부로 사실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병사는 떠났는데 가방은 한국에 남았다.
나는 다시 유리 진열장 앞으로 다가갔다.
BACK FROM HELL
1947 — 1948
CHINHAE KOREA
글씨는 아직 남아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처음에는 ‘지옥에서 돌아왔다’는 문장만 보였는데 오래 바라보고 있으니 그 아래의 CHINHAE KOREA가 더 크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 병사는 한국을 어떻게 기억했을까.
가난했던 나라.
낯선 나라.
빨리 떠나고 싶었던 나라.
아니면 통조림 하나를 받아 들고 웃던 아이가 있었던 나라.
우리는 모른다.
그의 이름도,
나이도,
그가 미국 어느 도시로 돌아갔는지도,
결혼했는지도,
평생 한국을 다시 이야기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가방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가 무엇을 넣고 다녔는지.
어떤 날 가방을 거칠게 내려놓았는지.
얼마나 자주 집으로 돌아갈 날짜를 생각했는지.
그리고 마지막 날,
왜 자신은 배에 오르지 못하고 한국에 남게 되었는지.
가방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저 80년 가까운 시간을 건너
새만금박물관의 조명 아래 놓여 있다.
나는 사진을 한 장 찍었다.
그리고 돌아서다가 다시 한번 뒤를 보았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박물관에서 역사를 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쩌면 박물관에 남아 있는 것은 역사가 아니라,
역사가 미처 데려가지 못한 물건들인지도 모른다.
1948년 어느 날,
한 병사는 한국을 떠났다.
그의 가방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BACK FROM HELL.
그런데 이상하게도,
지옥에서 돌아간 것은 병사뿐이었다.
가방은 돌아가지 않았다.